5.18민주화운동
1. 서론
나는 사회와 문학 쪽으로 진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아 5.18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이 온다’는 소설이긴 하지만 그 책에 나온 정부의 만행들이 실제 사건에 기반한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소년이 온다’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5.18당시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소년이 온다’에서 영감을 받아 5.18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중점적으로 탐구하고 싶었다.
5.18민주화운동을 더 심화탐구하고 싶어 배경, 전개과정과 그 영향에 대해 조사하고자한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에서 시행한 5.18기념행사를 알아보고 5.18민주화 운동이 국가 기념일이 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기까지 어떤 시련이 있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5.18에 대한 여러가지 시각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먼저 국내와 국외로 나누었는데, 국내에서는 국정교과서의 5.18에 대한 서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국외의 5.18에 대한 시각을 탐구하기 위해서 5.18민주화 운동을 보도한 해외 언론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를 통하여 민주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5.18에 대한 지식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5.18과 관련된 사회 현상을 배우고 이를 전세계적으로 확장하여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한 소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2. 본론
(1) 기억해야 할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의 배경과 전개, 결과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박정희 정권은 삼선 개헌, 유신 헌법 등을 통해 군사 체제를 유지했으나 군사 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고,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사망한다.
박정희가 사망한 후,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전국의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으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적으로 표출되었다. 1980년 5월 13일부터 사람들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거리시위를 시작했고,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에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광주에서도 전개되었는데, 5월 14일에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신군부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연금하고 구금했고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도 폭행했다.
5월 19일 새벽 계엄군과 시민의 충돌이 일어났고,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한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 했다. 20일에는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고,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나타났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에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
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5월 21일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전남도청으로 들어왔다. 많은 시민군이 사망했으나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은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주장하며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항쟁 기간 중 22~26일에는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다.
(2) 계속되는 5.18민주화운동
특별법 쟁취와 학살 책임자 처벌, 망원동 묘역과 국립 5.18 민주 묘지
1988년 국회 광주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광주청문회가 실시되면서 그동안 왜곡되고 은폐되었던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1994년 3월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가 결성되어 '책임자 고소고발사업,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등을 목적으로 5월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다.
검찰이 전두환, 노태우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자 시민사회운동단체들과 학생운동단체 등이 집회와 시위를 벌이거나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1995년 10월 26일에 ‘5·18학살자처벌 특별법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집회와 시위, 농성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노태우 비자금 문제로 드러난 신군부의 부정비리 청산도 함께 주장했다. 12월 19일 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들이 법률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제도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시민들은 ‘망월동 묘지’에 묻혔고,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1997년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었다. 이후 망월동 묘지는 민주성지로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고, 많은 국내외 참배객들이 다녀가고 있다. 국립 5·18민주묘지는 5·18민주유공자법 제정에 따라 이제 국립묘지가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1990년대에 5·18희생자 묘역을 민주성지로 바꾸자는 운동이 있었고, 정부는 광주광역시에 국립 5·18민주묘지를 조성하였다. 2001년 12월 21일 국회에서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국립 5·18민주묘지는 불의와 독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역사 교육의 장과, 민주와 정의를 위한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3)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다양한 시각- 교육과 외신 보도의 관점
국정 역사 교과서는 교육부가 저작권을 가지고 편찬하는 교과서를 말하는데, 정부가 공개한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고 5·18의 의의를 축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5·18 역사 왜곡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중학교 국정 교과서는 5·18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란 목적 살인죄로 처벌되고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지만 국정 역사 교과서 최종본에는 살인 진압 책임자가 누구인지와 국가 기념일 지정 내용을 생략해 수구와 보수 세력이 5·18을 왜곡하도록 방조했다.
또한 본문 분량도 2쪽에 불과해 5·18 민주화 운동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고 관련 사진도 2장밖에 없는데다 5·18 당시 참혹했던 살인 진압을 보여주는 사진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등학교 국정 한국 교과서는 치밀하게 준비된 신군부의 내란과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이 마치 대학생 시위를 진압하다가 발생한 것처럼 왜곡되어 기술했다. 그리고 전일빌딩 헬기 사진을 교과서 최종본에서 삭제해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사격과 살상을 부정하려 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과거의 왜곡된 국정교과서를 극복한 5.18인정도서에 대해 탐구하였다. 광주시교육청이 중고등학생을 위한 5.18인정도서를 개발했다. 이 인정도서는 질문과 만남을 통해 생각을 넓혀준다. 구체적으로 5.18의 발생 배경, 전개 과정과 같은 역사적 사실은 물론이고 주먹밥이나 영화 ‘택시운전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에서 역사 왜곡이나 사회적 연대같은 깊은 주제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다루었다. 또한 광주시교육청은 5.18 40주년을 맞아 40주년 계기교육, 5.18사이버기념관, 다함께 챌린지를 운영했다.이 행사에서 시교육청은 국립 5.18묘지 참배 행사를 진행하고 정부주관 기념식을 방송으로 시청하는 등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을 통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며 코로나 19방역을 철저히 했다.
맨 처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의 사주로 인한 폭동으로 보도되었으나 많은 정의의식을 가진 언론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세계로 알려지며 큰 영향을 끼쳤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독일의 기자로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처음 알렸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영상에 담아 언론 통제로 인해 대한민국 내에서는 보도될 수 없었던 광주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는데, 자신이 촬영한 필름을 큰 금속캔 속에 포장해 과자더미 속에 숨겨서 일본으로 반출한 뒤 독일 함부르크의 뉴스에 방송했다.
위르겐 힌츠페터 덕분에 외국의 다른 언론들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위르겐 힌츠페터는 푸른눈의 목격자로도 불린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에 간 특파 기자였는데 박정희 정권하의 여러 공안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직전 가택연금 중인 김영삼과의 인터뷰 등을 녹음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행 중일 때 일본에서 광주로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취재하여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로 담았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보낸 필름은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여러 나라에 즉시 보도됐으며, 그 해 9월에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방송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언론 통제시절의 대한민국 내에서는 비밀리에 알려져 상영됐다. 오늘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영상자료는 대부분 위르겐 힌츠페터의 작품이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 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인 기자인 노먼 소프는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로 근무하던 중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했다. 노먼소프는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 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전세계의 방송사에서 이것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방송했다. 프랑스 언론사 르 몽드 지는 1980년 5월 27일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 미국의 AP통신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라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거나 외면한 대한민국의 언론을 비판했다.
3. 결론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 5·18민주화운동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으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5·18 묘지로 승격되어 명예를 온전히 회복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95년 5·18특별법으로 제정되었으며,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연대의식은 세계 곳곳으로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해야할 5.18민주화운동, 계속되는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시각으로 나누어 탐구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 조사했고, 이를 통해서 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세력의 진압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항거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의 영향에 대해 조사하면서 5.18민주화운동 특별법과 국립 5.18묘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재에는 5.18민주화운동이 민주주의의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과거에 방문한 적이 있던 국립 5.18묘지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배울 수 있었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국정교과서에 대해 알아보면서 역사의식의 함양을 위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현재 광주시교육청이 실행하고 있는 정책과 프로젝트를 탐구하며 민주정신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외신보도를 조사했고, 그중에서도 위르겐 힌츠페터와 노먼 소프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며 그들이 해외에 미친 영향력을 알게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에대해 살펴보며 현재의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노먼 소프의 인터뷰를 보며 그 당시에 민주주의를 위해 힘쓴 사람들을 기억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참고문헌
오늘경제, 광주시교육청 5.18 40주년 계기교육
서울신문, 5.18은 옛날 일 청소년 절반만 제대로 안다
5.18기념재단
국회도서관자료
민주화운동기념관
국가기록원 5.18민주화운동
'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재필 선생의 생애와 활동 (17) | 2024.09.30 |
---|---|
미인도 위작 논란 (5) | 2024.09.21 |
윤치호 서양어 통역사 (11) | 2024.09.16 |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10) | 2024.09.16 |
이상화 와 일제 강점기 (17) | 2024.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