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근현대사에서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독립 운동을 했던 많은 운동가들이 있지만, 이 운동가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공통된 마음을 갖게끔 했던 독립 운동 단체들도 한국사 교과서에 많이 소개되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독립 운동가들의 소리가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신문사였다.
신문은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종이’라는 매체로 전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 필요성에 대해 알리고, 독립 운동가들의 말이 힘을 갖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대한 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다양한 신문사가 있었고, 특히나 조선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신문을 발간한 신문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을 선정한 것은 독립 신문에 담긴 서재필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서재필은 청년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도 민중의 의견이나 생각이 도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만민공동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토론회를 펼쳐 시민들에게 독립 운동가로서의 입장을 전하고, 그들의 생각을 듣고자 했다. 또한, 한성순보 이후 서재필 선생이 최초로 신문 광고를 독립 신문에 도입하면서부터 신문 광고의 역사적 시초가 되어 여러 조선의 기업이 광고를 하여 조선 경제를 스스로 부흥할 수 있도록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신문 광고의 형태는 독립 신문의 광고 형태와 똑같이 이어져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이를 봤을 때 서재필과 그가 창간한 독립 신문의 영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서재필 선생의 구한말 관료 시절부터 그가 참여한 개화 운동과 망명, 또 복귀 후의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그가 했던 독립 운동, 해방 직후 그의 삶을 탐구하고자 한다.
본론
1) 구한말 관료 생활과 개화기 개화 운동
고종 15년인 1878년, 서재필은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고종 임금이 주관하는 전강에서 높은 성적으로 1등하여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1882년, 18세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변의 촉망을 받았으나, 급제 직후 마땅한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교서관 부정자’라는 경서 인쇄 및 관인 관리 직무를 맡았다. 이 무렵에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나 김옥균이 만든 개화당에 가입했다.
벼슬에 오르며 개화파 인사들과 꾸준히 교류를 갖게 되는데,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고 한다. 서재필은 관료 생활을 하며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에 6개월간 당도하였고, 서재필은 당시 어학의 재능이 뛰어나 일본어뿐만 아니라 일본에 체류 중인 미국들에게서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서재필은 이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884년 초부터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계획하였다.
우정국 낙성식 전 날, 계획을 도모한 개화파는 모두 서재필의 자택에 모였다. 서재필은 거사 당시 우정국의 입구를 지키며 칼을 빼어들고 누구도 우정국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서재필은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반응이 좋지 않았고, 서재필은 결국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다. 서재필의 생부는 은진 감옥에 투옥 당했으며, 서재필의 친형제 3명은 죽임을 당하였다. 아들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 딸은 연좌제로 노비가 된 것이 서재필의 개화 운동의 결과이다.
2) 1차 미국 망명과 복귀 후 독립신문 발간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 등은 어려움 끝에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지만, 박영효와 서광범은 미국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불이익과 차별을 받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는 잡일을 가리지 않고 여러 노동을 전전하며 미국 생활을 버텨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교회를 꾸준히 나가며 영어 공부를 하였고, 교회를 다니며 우연히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아 그의 도움을 통해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라는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며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서재필 선생은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훌륭한 성적을 받았고, 특히 말솜씨가 뛰어나 논술대회와 웅변대회에서 입상을 하였다. 서재필은 또한 의사 면허와 시민권을 얻으며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을 많이 깨우친 채 조선의 요청으로 복귀한다. 그는 복귀 이후에도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말하며 조선의 권력 내보다 권력 외에서 미국시민으로 조선 민중을 계몽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것이 ‘신문 발간’이었다.
그는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을 받았고, 5천원의 추가 지원 비용을 유길준에게서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이승만, 신채호, 이완용, 박영효, 주시경, 유길준, 박중양, 이상재, 박정양 등을 영입했다. 또한,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기사를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3) 일제 강점기 독립 협회 활동과 독립 운동의 참여
서재필은 1896년 7월 2일 남궁억, 이완용, 안경수, 김가진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 맞은편에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하여 그 규모를 축소하였지만 모양만은 똑같이 한 ‘독립문’이 들어섰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하였고,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독립문을 설계하였다. 또한 서재필을 비롯한 독립 협회는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서재필은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을 비롯하여 학생 청년들을 보아 토론, 토의하는 법을 비용 없이 무료로 가르쳤다. 또한, 원산에 있는 원산학사에도 매주 주말에 방문하여 토론 기술과 화법을 가르쳤다. 서재필은 이후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였던 ‘윤치호’와 함께 독립 협회에서 ‘노비 해방 운동’을 진행하며 토론을 통해 노비 해방 풍조를 점차적으로 확산시킨다.
이후 정부의 압박 때문에 출국하여 2차로 미국 망명을 떠났지만, 그는 미국 내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으며, 만세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해 3월 중순 서재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 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동시에 미국 잡지 이브닝 레저 지를 찾아가 조선의 문제를 다룰 것을 설득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를 소집하였다. 한인연합회의 이후, 서재필 선생은 영문 기관지 한국평론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영문 소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4) 해방 직후 귀국과 정치 활동
그는 계속해서 미국에서 활동하며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조선을 위해 언론 활동도 꾸준히 진행해온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였다.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재필을 급히 귀국시키고자 하였다. 미군정은 그의 한국 입국을 추진했고, 서재필 선생은 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청받아 1947년 6월 1일,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서재필 선생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 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하여 민주주의 사회가 되도록 힘썼다. 서재필 선생의 정치 참여 요청, 대통령 출마 요청은 제헌국회 총선거를 치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48년 6월 11일 서재필 선생에게는 연명의 간원문이 전달되었고, 6월 29일에는 ‘서박사 추대 연합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며 7월 4일 공식 불출마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1948년 9월 10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또한,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남기며 한국인들에 대해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그는 의료 활동에 전념했으나, 후두암에 걸려 서재필 선생은 1951년 1월 향년 88세로 생을 마쳤다.
결론
독립 신문은 초판 300부에서 나중에는 3,000부를 발간하였고, 독립 협회는 초기 10여명의 회원에서 나중에는 4,000여명이 넘는 회원을 갖게 된다. 서재필 선생은 비록 해방 이후 한국 정부와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조선을 위하고 독립을 원했던 사람은 서재필 선생이었을 것이다.
또한, 서재필 선생이 영문으로 작성하여 발간한 신문, 기사들이 해외 동포들과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알리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된다. 또한, 서재필 선생은 독립 신문에 광고를 도입하여 국내의 다양한 기업들이 홍보되어 경제적으로 자립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하였고, 이와 같은 신문 광고가 현재까지도 같은 형태로 이어지는 것은 서재필 선생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서재필 선생은 이승만의 선생이자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에게 귀감이 된 인물이었고, 서재필 선생이 매주 무료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 온 것은 수많은 학생들을 깨우치게 하고 훌륭한 인재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현대에는 ‘서재필 의학상’, ‘서재필 언론문학상’ 등의 서재필을 기념하며 만든 상들이 있다.
이러한 상들은 현대에 서재필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친 훌륭한 인재들에게 수여되고 있는 높은 가치의 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당대에도 서재필 선생은 독립 운동가로서 조선인들과 조선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현대에도 그 영향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우리 역사넷
최기영 역, 2010, 『서재필이 꿈꾼 나라』, 푸른역사
이종찬, 1997, 『서재필의 생애와 사상』
국회도서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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