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세특)

윤치호 서양어 통역사

kjk쌤 2024. 9. 16. 14:58
728x90
반응형

윤치호 서양어 통역사

 

 

서론

예로부터 한반도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는 활발했지만, 비교적 서양과의 교류는 늦었다. 그 때문에 조선에 중국어나 일본어 전문가는 많아도, 영어와 같은 서양 언어 전문가는 처음에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서양과의 직접적인 교류 및 문화 공유, 혹은 국가적 논의를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첫 번째 서양어 통역사는 누굴까 궁금하였고, 조사 끝에 윤치호라는 인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윤치호의 일생은 크게 기독교를 믿기 전과 후로 나뉘며, 그는 개항기 시대 활동했던 관료이자 정치인, 사회 운동가였다. 3년 동안 일본에 유학을 위해 머물렀다가, 1883년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갑신정변의 주역인 급진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해로 망명하였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를 이끌었으며,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제2대 회장이 되어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맡았다. 게다가 안창호 등이 주도한 신민회의 교육 기관인 평양 대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신교육 구국 운동에 힘쓰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계몽 운동과 기독교 구국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의식 향상을 위해 애쓰던 그였지만, 1912년에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3년간 수감 생활을 겪은 후 1920년부터 친일 활동을 하였고, 이는 명백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2. (1) 일본 그리고 미국 유학 시절

윤치호는 1864년에 태어났다. 윤치호가 태어나기 1년 전 조선에서는 고종이 즉위했으며,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말은 즉, 윤치호가 태어난 시기는 서양 세력이 동양에 하나둘씩 밀려 들어오던 개화기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치호는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집안이 매우 부유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00칸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생활하였고, 전폭적인 지원 덕분인지 몰라도 습득 능력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일본에 유학을 갔을 때, 그는 일본의 근대화와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는 나중에 그가 계몽 운동에 힘을 쏟게 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그는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웠으며, 이 기간동안 영어도 틈틈이 익혔다고 한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선에서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고, 망가진 삶을 살던 윤치호는 미국인 선교사의 설득으로 교회에 나가게 된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있고 2년 후, 윤치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미국까지 보고 온 윤치호는 근대화에 대한 갈망이 분명 더 커졌을 것이다.

 

(2) 조선 최초의 영어 통역사

윤치호가 태어났을 당시 일본에는 이미 영어를 포함한 사용자가 많았고, 중국에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서양어 사용자가 거의 없었을뿐더러, 영어 통역사는 더욱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윤치호이다. 심지어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에까지 유창했기 때문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끼리의 쌍방 통역까지도 가능했다고 하며, 사람들이 그를 근대 통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통역 외에 번역도 하였는데, 그가 번역했던 책으로는 지금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책인 걸리버 여행기’, ‘이솝우화등이 있다.

윤치호가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한 계기는, 친분이 있던 김옥균이 영어를 배워야 일본을 통하지 않고 서양 문명을 직수입할 수 있다고 말해서이다. 윤치호와 김옥균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윤치호는 김옥균의 추천을 받아 첫 주한 미국 영사관 통역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 통역사의 보조 역할에 가까웠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전적으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 공사의 통역사 역할만으로도 바빴을 텐데, 윤치호는 밤에도 쉬지 않았다. 1년 반 동안 서울에서 통역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밤에는 조선 왕실의 영어 통역사 역할도 담당하였다. 조선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자 조선과 서양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3) 복음화 운동과 개화 운동

윤치호가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미국 선교사가 자신을 방황에서 이끌어 내주었을 때부터이다. 그는 1887년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것이 105인 사건을 비롯하여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잠시 머무르다 10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온 윤치호는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조선에 선교를 위해 온 선교사들의 통역을 도왔다. 그의 언어 능력이 또 이렇게 의미 있게 쓰였던 것이다.

 

윤치호는 계몽 운동, 즉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애썼던 인물이다.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을 맏고,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대한자강회, 한영서원 등 많은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안창호와 같은 사람들이 주도한 신민회의 교육 기관인 평양 대성학교의 교장 자리에도 있었던 적이 있다.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기독교 구국 운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렇듯 활발히 활동하는 윤치호를 일본이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 윤치호가 조선에서 계몽 운동을 펼쳤던 시기는 다름 아닌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다. 다음 주제에서는 윤치호가 친일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4) 105인 사건 이후 친일 행적

이렇듯 수많은 단체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윤치호도,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1911년 조선에서는 105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일본이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중에 하나로, 이 사건으로 체포되거나 기소된 사람 105명 중 99명은 석방되고, 윤치호를 비롯한 주모자 6명은 징역 5~6년을 선고받았다. 일본이 그에게 가했던 것이 너무나도 각박했던 것일까. 감옥에서 나온 윤치호는 친일 단체에들어가 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했던 말 중에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라는 말이있는데, 아마 친일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한 말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윤치호와 관련된 유명한 그러나 친일 행적의 한 가지로 의심받고 있는 것은 그가 애국가의 작사가라는 설이다.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우리가 각종 행사마다 부르며 시작하는 애국가는 친일의 잔재이다. 멜로디만 친일의 잔재이기에 작곡가가 문제라는 사람도 있지만, 가사까지도 문제되는 부분이 있나 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핍박은 말할 수 없이 극심했고, 고문의 고통으로 인해 친일파로 전향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치호의 친일 활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태세를 바꾸는 것이 결코 본받아야 할 태도도 아니다. 그는 분명 흑과 백을 다 가진 인물이지만, 나는 그 백의 부분에서 본받을 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3. 결론

윤치호는 서양어 사용자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한 당대 조선에서 첫 영어 통역사가 되어 조선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까지 4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많은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동기가 생기자마자 독학하는 등 스스로 노력하여 그 결과를 일구었다는 점이 대단하다. 조선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던 것은 특별하기도 하나 또 한편으로는 많은 어려움도 겪곤 했을 것이다. 물론 집안의 재력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의 통역 실력이 조선 왕실이나 주한 미국 영사관과 같은 막중한 자리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의 노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 학교 성적을 잘 맞기 위해, 대학을 잘 가기 위해 한정적이고 의존적인 언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통역사를 꿈꾸면서도 윤치호처럼 그에 걸맞는 노력은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낮밤을 쉬지 않고 일했던 윤치호의 모습을 보며, 언어를 배울 때 내가 가져야 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저 성실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의지, 더 잘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다.

 

나도 윤치호처럼 4개 국어, 혹은 더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프랑스어도 배워보고 싶고, 영국식 영어도 배우고 싶다. 그리하여 윤치호가 조선에 기여했던 바처럼, 우리나라 통번역 분야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 싶다. 윤치호처럼 최초가 되진 못하더라도, 최고가 되고 싶다.

 

4. 참고문헌

해피코리아 e뉴스 [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9 윤치호

[네이버 지식백과] 윤치호

한국일보 카드뉴스 <애국가는 친일파의 작품인가>

 

728x90
반응형
LIST

'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세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인도 위작 논란  (4) 2024.09.21
5. 18민주화운동  (15) 2024.09.16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10) 2024.09.16
이상화 와 일제 강점기  (14) 2024.09.16
문화재 반환의 실태  (6) 202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