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1. 서론
일제 강점기는 한국 역사에 많은 해를 끼쳤으며, 한국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아프고 큰 상처를 입은 특수한 시기였다. 한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협하였고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일관하여 한국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저지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한나라의 민족성, 인권 등 모든 부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식민지 수탈 정책은 경제, 사회적 수탈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서를 말살시켜서 일본내의 차별받는 종속 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각종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다. 이러한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암흑 시기에 대응하여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완강하고 줄기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3.1 운동으로 인해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이 기록한 항일무장투쟁의 3대 승첩으로 꼽히는 니콜라예프스크 탈환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무장 투쟁은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무장 투쟁 외에도 이루어진 독립 투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펜으로써 투쟁을 이루어낸 문학 작품이다. 여러 시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제에 투쟁했으며, 우리 민족에게 힘을 복돋아주는 역할을 이루어냈다.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인 지지를 주었던 그들 중에서도 현재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이상화 시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본론
⑴ 이상화,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상화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시인이자 작가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그리고 권투 선수로서의 삶을 살았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그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그 자신의 꿈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았다. 그는 1901년 5월 22일 경상북도에서 태어났다.
고작 7살이라는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 보냈으며, 18세에 경성중학교를 졸업하여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 후 시간이 지나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과 『거화』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문학으로써의 독립운동 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1922년 문화사에서 배재학당과 휘문의숙 출신의 문학청년들이 모여서 발행한 잡지)’ 동인이 되어 실질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1919년 백기만과 여러 사람들과 함께 3.1 운동 때에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기도 하였으며, 1925년에 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고, 똑같은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이뿐만 아니라 의열단 이종암과 11명의 단원이 진행했던 군자금 모금 활동에 연루되어 감금되기도 하였으며, 1934년에는 조선일보의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지만 1년만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연구와 독서에 몰두하면서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했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또한 하려고 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43세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 외에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시로써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며 독립 투쟁을 진행하였다. 그의 시에는 평범한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의 의지와 암울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맞이할 수 있다.
⑵ 펜으로써 했던 그의 문학 투쟁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동인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후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 나혜석, 나도향, 박영희 등 여러 문인들을 만나 벗이 되어 이상화는 본격적인 문학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비탄에 빠진 우리 민족의 정서를 시적인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큰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일제강점기 시인이다.
이상화 시인은 자신의 재능을 개인의 존엄성, 일제에 대한 저항, 사회개혁으로 표현해 여러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반일 감정을 기반으로 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인 시가 《개벽》에 실렸다. 그것이 바로 1920년대에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민족적 저항 시이자 이상화 시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며, 이 시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절절하고 소박한 감정으로 노래하며 펜으로써 독립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 시에는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지라도, 봄이 찾아온다면 민족의 혼이 담긴 영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다시 일깨워주며, 일시적으로 우리의 국토를 빼앗겼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이끌어 올리는 봄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몸부림, 즉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과 피압박 민족의 비애를 담고 있다. 시에 담긴 민족적 저항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민족의 동질감과 단결력을 느끼게 해주어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 작품 외에도 1935년 4월 <시원>에 발표된 이상화의 <역천>도 있다. 이 시는 추수를 앞둔 풍요로운 가을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식민치하의 굶주리고 헐벗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가을은 그들의 고통을 잊게 하고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계절로 사람들에게는 ‘보배로운 가을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가을밤은 가을의 풍요로움과 황홀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는 보배로운 가을 밤의 푸른 하늘과 밝은 달, 정갑게 도란거리는 별들,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스쳐가는 아주 연약한 바람결초자도 그에게는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와 서로를 배반하는 역정과, 슬픔이 머리끝까지 솟아 오름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핵심 주제로 식민치하의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 출판한 후로도 이상화 시인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자진하여 교남학교에서 3년동안 무보수로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친일 작품으로 넘어가는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여러 수감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지키는 모습를 보였다.
조부, 형, 그의 큰아버지 그리고 이상화 시인은 철저한 가문의 신념하에 현실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이였다. 광복 7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민족의 영혼을 담고 있는 시로 유명한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올곧은 신념으로 나라를 되찾고, 지키고자 하였던 이상화 시인의 문학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외부적 탄압로도 억압할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일제강점기 시인이었다.
(3) 투쟁을 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었던 사건
그는 서울 중앙학교 3년을 수료한 뒤, 대구 3,1 운동 거사 모임에 참석하여 독립 운동을 계획하기도 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던 그는 이듬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모습에 분노해 1924년 귀국한다. 이러한 간단한 것에서도 그가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해 서울 가회동에 머물며 시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고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저항 민족시인의 반열에 오른다. 그 후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할만큼 심각했다. 1928년 6월 신간회 출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국지사들이 달성군의 한 부호를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에 연루돼 역경를 겪기도 하였으며, 1936년에는 독립운동가인 자신의 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을 다녀온 뒤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했었는데 귀국 후 대구경찰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2개월간 감금당하며 심한 고초를 당한다.
1939년에는 교남학교 조선어, 작문, 영어 겨사로 지내며 불건전한 내용의 교가를 만들어 부르게 했다는 이유로 가택 수색을 당해 자신의 작품 원고와 시인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되는 고난을 겪었다. 1941년 시 <서러운 해조>를 문장 폐간호에 발표한 그는 1943년 4월 25일 결국 대구 계산동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형 이상정은 계성,신명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이다.
남경, 상해 등 중국 각지에서 항일투쟁하던 그는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신한민주혁명당을 조직하는 한편 화중군 사령부 고급막료로 한구전투, 남경전튜에 참전해 일제와 싸웠다. 해방 후 상해에 머물면서 교포 보호에 힘쓰던 그는 1947년 귀국 후 뇌일혈로 사망했다. 이상정의 부인이자 시인 이상화의 형수인 권기옥은 한국과 중국 양국의 첫 여성 비행사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녀는 숭의여학교에서 송죽결사대에 가입하고,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6개월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임시정부공채 판매에 나서며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던 중 일제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권기옥은 중국에서 미국인 비행사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1924년 중국 윈난성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2월 여성 비행사 자격을 얻었지만 항공 전투단을 구성할 여력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신에 중국 공군에 들어가 일제와 싸웠다. 해방 후 한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고 6·25 당시에는 국회 국방위원회 여성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4) 이상화, 그의 일화
이상화가 추운 어느 겨울날 지인과 사업가들과 모여서 나라를 잃은 울분을 토하며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를 수상하게 여긴 일본 경찰이 들어왔다. 경찰은 숯불이 빨간 화로를 인심 쓰듯이 식탁 중앙에 올려놓았다. 모두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상화가 아무 말도 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맨손으로 숯불을 들고 담뱃불을 붙였다. 뜨거운 숯불에 손이 타들어갔으나 개의치 않았던 이상화의 독기에 무서움을 느낀 경찰이 아무말없이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이상화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일화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상화와 현진건의 일화도 있다. 1838년 가을 저녁. 동아일보의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현진건이 이상화 집으로 찾아왔다. 현진건의 술 실력을 잘 아는 이상화는 술상을 내오게 했다. 이상화는 시를 통해서 민족의혼을 일깨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고민을 말하고,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현진건에게 말했다.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현진건은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옳은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화와 현진건은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죽기 전에 독립이 못되면 자식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이상화와 현진건은 다시 술잔을 높이 들어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라고 선창하자 빙허가 ‘반드시 봄이 온다’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3. 결론
현재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독립 운동가들이 자신들을 희생하여 공동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역사시간을 통해 그들의 노력을 알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투쟁을 기억해야할 의무가 있고, 그들을 추모하고 기억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시대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3.1 운동,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도 또한 기억해야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분들 또한 알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생각한다면 이상화 시인이 했던 독립 투쟁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고 증명할 수 있다. 문학으로써 일제에 대해 투쟁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와 함께 펜으로써 투쟁한 또 다른 문학인들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정신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독립을 꿈꿀 수 있었다.
그는 문학으로써 투쟁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여러 민족 운동에 가담했기에 일제강점기하면 꼭 떠올려 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무장으로 이루어진 독립 투쟁을 중요하다고 여길지라도 곳곳에 숨어있는 또 다른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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