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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77

이효정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1913년 7월 28일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하였다. 1세에 부친의 별세로 서울에서 잠시 있다가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3년 뒤 귀국하여 서울에서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민족의식이 높았고, 자부심도 강하였다.  동덕여고보를 나와 교원, 간호부 생활도 잠깐 하였지만 공장에 취업, 노동운동을 하였다. 박두복과 결혼하여 울산에서 생활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남편이 월북하고는 좌익으로 몰려 오랫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010년 8월 14일 사망하였다. 동덕여고보에 입학한 후 한글학자 이윤재의 민족주의에 공감하였으며, 5촌 아저씨 이병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입문하였다. 3학년 때 이평산의 경성RS협의회의 독서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박진홍, 이순금 등과 백지동맹.. 2024. 11. 22.
유도발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유도발과 유신영은 부자관계로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힘써 마땅히 삼갈지어다. 충효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충’과 ‘효’를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유성룡 이후 풍산 유씨 가문은 충효를 가업으로 삼았다. 유성룡의 장손 유원지는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충효청백만 있을 뿐이다 라고 하여 할아버지 유성룡의 유지를 전했다.  또 졸하면 분수에 편안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되어 재주와 임기응변 같은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성하면 자연스럽게 실제에 힘쓰게 되어 꾸밈에 힘쓰거나 스스로 속이는 병에 빠지지 않게 된다 고 하면서 졸성을 가학으로 제시하.. 2024. 11. 21.
역사왜곡과 우리의 대응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가 이 명언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유명한 명언을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고 답할 것 같다. 혹은 단재 신채호 선생 내지는 윈스턴 처칠 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두 사실무근 하다.  많은 사람들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상고사 에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알고있거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상고사 어느 부분에도 이 문장이 나와있지 않았고 윈스턴 처칠이 이 말을 했다는 증거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수 없이 듣고 가슴에 새겼던, 역사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렬하게 외치던 명언의 출처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 2024. 11. 21.
안공근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1909년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로 재직하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직후 사직하였다. 1919년 상해의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밀파외교원에 선정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임시파로외교위원에 선임,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의 황해도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1920년 12월에는 상해대한인거류 민단의사회 의원으로 선임되고, 1926년 2월에는 여운형의 후임으로 상해한인교민단장에 임명되어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조상섭· 최창식· 이유필· 오영선 등과를 조직,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기 위하여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을 달성하려 한다. 는 선언을 발표하고, 그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2024. 11. 21.
유신영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유도발과 유신영은 부자관계로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힘써 마땅히 삼갈지어다. 충효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라고 하면서 충 과 효 를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유성룡 이후 풍산 유씨가문은 충효를 가업으로 삼았다. 유성룡의 장손 유원지는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충효청백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할아버지 유성룡의 유지를 전했다.  또 졸하면 분수에 편안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되어 재주와 임기응변 같은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성하면 자연스럽게 실제에 힘쓰게 되어 꾸밈에 힘쓰거나 스스로 속이는 병에 빠지지 않게 된다 고 하면서 졸성을 가학으로 제시하였다.  .. 2024. 11. 20.
문일민.안혜숙(부부) 독립운동 생애와 활동 문일민은 1894년 12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함종에서 문명순과 안명숙의 2남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이며, 호는 무강, 무리이다. 처음 이름(본명)은 희석이었으며, 다른 이름으로 문강・문일민・문현철등이 있고, 중국 이름은 왕량이다. 부인 안혜순(2019년 건국포장)과 장남 문정진(1990년 애족장)도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함종의 함일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평양에서 물산위탁 판매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다음, 그해 7월 남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뒤 남만주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에 참가하여 한족회의 명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애국청년회의 연락과 조직 강화.. 2024. 11. 20.
이인정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본관은 전주, 세종대왕의 5자 광평대군 의 후손으로 임정부정공파로 광평대군 15세손 택연의 3자 가운데 장남이다. 서산군 대호지면 사성리 510번지에 태어나 유학을 익혀 1894년 내부 과시에 합격하고 1897 ~ 1912년까지 자인 현감을 역임한 후 귀향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의 부군통폐합으로 55세에 초대 대호지면장이 맡겨졌다. 이후 정미면 산성리 98번지로 이거했다. 그는 4월 4일 대호지면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면민 4 ~ 500명에게 도로 수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 각자 찬성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향해 가자고 연설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면 소사 송재만이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앞세우고 애국가를 배포했다. 그의 지휘하.. 2024. 11. 19.
5.18 북한군 개입 주장 북한문제 전문가들과 김일성의 비밀교시, 그리고 5.18에서의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 의혹을 정리해 본다. 1) 김용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치고, 지하당 개입이 없는 사태는 하나도 없다. 민주화는 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서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으며,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5.18을 북한에서는 5.18민중항쟁이라 부른다.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2) 이영명 교수, 김일성의 비밀교시는 탈북한 북한간부들의 증언과 비밀자료로 엮은 것으로 산경신문의 2004년 5회에 걸쳐 연제되었다. 이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5.18.. 2024. 11. 19.
백용성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1864년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수원백씨인 부친 백남현과 밀양 손씨인 모친 사이의 5남매의 장남이었다. 족보상의 이름은 형철, 속명은 상규, 법명은 진종 이었다. 유년 시절에는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세속을 떠나 고결하게 사는 삶을 동경하였다. 또한 부친이 잡은 고기를 불쌍하다고 하여 모두 살려 주었다는 일화, 모친의 고사리를 따는 것을 제재하였다는 일화가 전하듯이 유년시절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불교에 대한 인연이 남달랐다. 14세에 남원 교룡산성의 덕밀암 으로 출가하였다. 그의 출가는 유년시절부터의 불교 인연과 계모와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속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16세에 합천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를 단행하였다. 해인사에서 승려의 기본.. 2024. 11. 19.
오광심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1931년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난징으로 이주하여 만주지역과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 부녀부에서 활약하였고, 1936년에는 난징의 대한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립될 때, 여군으로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신순호· 민영주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2년 2월 임시정부 군무부 제6징모분처의 간부로서 주임위원 김학규· 김광산· 서파· 박찬열· 지복영· 오희영 등과 함께 안후이 ·허베이· 산둥 지역에서 초모·선전·파괴 등의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6월 제6징모분처가 통합, 광복군의 제3지대로 확충, 개편될 때 제3지대장 김학규 휘하에서 기밀실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계속 중국에 머물면서 194.. 202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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