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최용덕 선생의 독립운동 생애와 활동
by kjk쌤
2024. 10. 31.
선생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대한제국(2등 군의관이었던 최익환과 태안이씨사이 3남으로 출생했다. 호는 창석이었다.
1900년대 후반기 사립 봉명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 접했다. 1916년 원세개가 설립한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훈련을 마치고 단기서군의 제2사단에서 근무하였다
원세개 사후 육군군관학교는 군벌 단기서가 풍국장을 대표로 하는 직예군벌과 장작을 수장으로 하는 봉천 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일제의 지원을 받아 참전군을 창립하면서 ‘참전군군관학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육군군관학교와 단기서군에 참여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전개했던 항일투쟁에 큰 자산이 되었다.
1919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던 한민족은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는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독립선언의 핵심은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한다는 것, 그리고 독립국임을 천명한 데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독립국, 다시 말해 ‘국가’와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선생은 중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뒤 군대를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주된 활동의 근거지는 중국 북경지역이었다. 당시 북경은 1910년 경술국치와 1919년 3.1운동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이주하여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최용덕 역시 북경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4월 19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판하는 성토문에 서명자로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19년 1월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주 대한인국민회는 1918년 11월 25일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선정된 대표는 이승만과 정한경 등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연합국들이 장차 한국의 완전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 일본의 현 통치에서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서, 다시 말해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이들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와 대통령으로서 지도력 부재, 임시정부의 외교방략을 비판하고 무장투쟁을 지향했다. 나아가 반이승만계 인물이었던 신채호,이회영 등과 회합하여 1920년 9월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군사통일촉성회를 결성하였다.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오성륜과 김재희,정인교 등 유능한 인재를 단원으로 확보하여 조직을 강화해 나갔고, 북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용덕 역시 성토문이 발표된 1921년 4월 이후 의열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국내에서 폭탄을 보관하고 전달할 적임자로 김한을 선정했다. 남은 것은 김한의 협조와 승낙이었다. 이를 위해 1922년 6월 선생은 양건호와 함께 중국 천진 프랑스조계 여관에서 남녕득에게 김한을 설득하기 위한 임무를 맡기고 서울로 파견했다. 또한 선생은 투탄의거에 필요한 폭탄 확보와 운반에 조력하였다.
이후 상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조소앙등과 재차 거사를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김상옥은 1922년 12월 1일 김원봉에게 권총 3정과 실탄 및 격문을 받아 국내에 잠입하였다. 최용덕 및 의열단이 준비한 거사용 폭탄은 별도의 경로를 통해 김한에게 전달받아 사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상옥은 서대순 등 옛 동지를 만나 거사 의사를 밝히고 계획을 상의했다.
그 결과 조선총독 및 일제 고관 처단, 조선총독부 및 관공서 폭파, 행동대와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적으로 훈련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첫 번째로 착수한 것이 서울 종로경찰서 투탄의거였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에서 활동했다. 주화대표단은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우방국이었던 중국과의 관계 유지와 중국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재산과 생명 보호 등 제반 문제 처리를 중국정부와 협의. 처리하기 위해 조직된 기구였다.
주화대표단은 중국측의 승인에 따라 1945년 11월 1일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전에는 1945년 10월 조직된 한교선무단이 이러한 역할을 맡았다. 주화대표단은 크게 중앙부처와 산하기구로 조직되었다.
산하기구는 다시 교무를 관장했던 각 지역 한교선무단과 군무를 맡고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교무조는 교포의 조사와 등기를, 군무조는 광복군 훈련준비와 중국 각지 수용소 한적사병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선생은 북경에 조직된 북경한교선무단, 그 중에서도 군사조장으로서 군무를 총괄했다.
북평잠편지대 지대장으로 한국광복군 확군활동에 기여했다. 한국광복군은 해방을 맞으면서 그 임무와 역할이 전환되었다. 한국의 국토를 방위하는 창군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는 한국광복군을 개편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확대는 중국 내 한적사병과 중국군에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한인청년들을 한국광복군으로 흡수‧편입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흡수‧편입된 인원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별로 잠편지대를 편성하였다. 선생은 해방 직후 북경지역에서 확군사업을 수행했고, 1945년 10월 말 북평잠편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말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북경판사처와 제3지대의 북경지구 특파단을 통합한 주북평판사처의 처장에 임명되어 화북지역 업무를 총괄했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산하에 신설된 주진판사처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공군 준장으로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엮임했다. 이후 공군 참모부장, 제2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후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0년 체신부장관, 1961년 주중화민국 대사로 2년간 활동했다. 1969년 8월 15일 광복절 숙환인 고혈압으로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