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별기리 에서 아버지 김태석과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모는 천주교 신자였고, 부친도 조모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황해도 안악군 교동교회 목사로서 시무했다.
1909년 기독교 북장로회에 입교하였으며, 황해도 재령에서 명신중학교 3년 과정을 마치고 1914년 서울로 와서 장로교에서 세운 경신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뒤 기독교청년회관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후 2년간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다시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을 때, 1월 27일 저녁 7시경 박희도가 경성부 관수동 144 화교촌에 있는 중국
요리점 대관원에서 서울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모임을 열자, 주익 ·윤화정 ·전수학교의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보성법률학교의 강기덕 ·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주익이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약소국들이 독립할 수 있다고 신문에 났으니 독립운동의 좋은 기회인데 어떤가 하고 독립운동 문제를 제기하여 논의하였다.
2월 3, 4일경 강기덕과 김형기가 방문하여 독립운동 결심을 말하며 기독교청년회 참여 의사를 타진하였고, 강기덕이 그 후 2, 3차례 더 방문하여 설득하자 2, 3일 숙고한 뒤에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했다.
2월 10일 월요일 세브란스병원 안 예배당에서 음악회가 있은 후 이갑성이 자신의 집으로 김원벽· 배동석·김형기·이용설·한위건·윤자영 등 학생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이갑성은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물었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와 그곳에 파견된 한국인 대표에 관한 런던 타임즈 보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2월 12일 수요일과 2월 14일 금요일에도 학생단 대표 모임이 세브란스병원 이갑성 사택에서 열려 학생단 독립운동 협의를 진행하였다.
김원벽은 민족대표와 단일화 결정이 있은 후 선언서 원고를 태웠다고 했으나, 법정에서 증제 408호로서 인쇄된 학생단 선언서가 증거로서 채택되어 제시된 것으로 보아 학생단 선언서가 인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월 17, 18일경 청년회의 간사 박희도로부터 천도교·예수교 측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서로 연락 기관이 없으니 별도의 연락이 있기 전까지는 학생 측만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학생단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위해 2월 20일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학생단은 천도교와 예수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듣고, 인사동 승동교회에 수시로 모여 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김원벽이 박희도에게 갔더니 별도의 학생단 시위 계획을 만류하며, 하나의 운동에 두 가지 선언서가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므로 자기들의 계획에 학생 측도 합동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학생 측 대표자들에게 그 말을 전하며 의견을 구하였다. 학생단은 그것에 동의하여, 민족 대표 독립 선언과 별도의 독립 선언을 포기하고 운동의 일원화를 결정하였다. 전문학교 학생단의 제2회 독립운동은 3월 5일로 결행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2월 25일 민족 대표 독립 선언과 일원화 결정 이후 학생 측은 제2차 학생단 독립운동 협의를 위해 정동예배당의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서 모였다. 이 자리에 주종의·최순택·이용설·강기덕·한창환·윤자영·전성득·한위건 등과 함께 모였다.
여기서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가급적 중등학교 학생을 참가시키도록 하고, 다음에는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가 주최하여 독립운동을 하며, 제2차 학생단 시위 일시는 3월 1일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 정할 것을 상의하였다. 학생단은 제2회, 제3회로 뒤에도 계속하여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요한 간부는 뒤에 남겨 두고 계속해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였다.
2월 26일경 정동예배당에서 그를 포함하여 공업전문학교의 김대우·전수학교의 김성득·보성학교의 강기덕·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전수학교의 윤자영 등이 모여 3월 1일 이후의 학생단에 의한 후속 독립운동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3월 1일의 독립운동과는 별도로 그 뒤에 학생만의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밖에 전수학교의 윤자영·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은 책임을 져야 할 간부는 아니었지만 이 운동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중등학교의 대표자들은 강기덕이 주로 담당해 접촉했는데 중앙학교의 장기욱 ·고등보통학교의 박쾌인 ·경신학교의 강우열은 대표자가 아니었으나 해당 학교의 운동을 이끌었다.
이날 모임에서 다시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와 주목 받고 있는 사람은 3월 1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도록 할 것과 중등학교 학생 등이 폭력으로 나오지 않도록 주의할 것, 선언서를 될 수 있는 대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배포하도록 할 것, 그리고 선언서는 강기덕·김문진 등이 중등학교의 학생으로 하여금 배포할 수 있게 준비할 것 등을 정하였다. 그 자리에 강기덕이 이갑성으로부터 선언서를 가져왔다. 선언서는 정동교회로 가져가서 각급 학교 대표들에게 배부되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독립 선언이 있었고, 전날 밤 갑자기 독립 선언 장소가 태화관으로 바뀌는 바람에 탑골공원의 학생, 시민들은 별도의 독립 선언식 후 시가행진에 나섰다.
3·1운동과 3·5 학생단 시위운동의 주도자로 붙잡혀 징역 2년을 받았으나 재판과정이 길어져서 실제 복역은 거의 3년이나 되어 1922년 1월에야 풀려났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의 사무직원으로 2년간 재직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제5회 졸업식이 끝난 후 동문회가 결성되었을 때 제1회 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에는 언론인이 되어 시대일보사에서 2년 동안 일하는 한편 잡지 신생활 발간에 참여하였다. 민족회사인 대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 물산장려와 수출, 필수 소비품의 수입 사업을 위해 조합 형식의 기업을 설립하는 일에 최창선·민강·방규환·신장희 등과 함께 경영진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병에 걸려 4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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