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8월 15일 함북 경원군에서 최흥백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명은 최 표토르 세묘노비치이다. 부친 최흥백은 그 당시 경원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동포들이 굶어죽는 참경이 벌어지자 부친은 가족을 인솔해 동년 9월 9일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로 이주하였다.
이후 연추마을로 이사하였다. 이어 20세기 초,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노보키예프스크로 이사하였고, 다시 1910년에는 슬라뱐카로, 마지막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사하였다.
이주한지 2년 후인 1871년 한인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소년시절 러시아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선원생활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축적 하였다.
1878년부터 조선・중국・러시아 3국 국경이 접해있는 지역인 얀치혜에서 러시아병영의 통역으로 일하였다. 1880년 연추남도소의 러시아어 서기로 피선되어, 3년 동안 문서정리와 사무처리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884년 연해주 당국은 군사적 목적으로 조선 국경까지 군사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 도로는 블라디보스토크-라스돌리노예-바라바시-슬라비얀카-노보끼에프스크-크라스노예셀로 촌을 연결하는 군용도로였다. 군용도로 건설시 통역원으로 동원되었다.
연해주 당국으로부터 영군 300명을 거느릴 권한을 받아 연추에서 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10년간 도로건설에 관여하는 통역으로 일하면서 많은 조선인들과 가까워졌으며, 그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1893년 연추남도소의 도헌에 피임되었다. 이때 유실수를 이용한 녹지조성과 교육계몽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축적된 부와 러시아인 주류사회에서 얻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0년대 말 지금의 하산 지구 크라스키노의 노보키예프스크에 최초의 공원(과수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에서도 큰 업적을 세웠다. 해마다 성실한 많은 한인 젊은이들을 뽑아 러시아 대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넓은 인맥 덕분에 당시 큰 상업회사들이었던 추린, 쿤스트와 알베르스, 퍈코프, 마르코프 등의 지역판매상점이 포시에트 지구의 노보키예프스크, 슬라뱐카, 아디미 등에 유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 건물들은 주변에서 가장 멋진 벽돌건물들이었고, 주문신청을 받은 상점들은 1주일 안에 주민들에게 필요한 상품들을 제공하였다.
1894년 페트로그라드에 가서 제1차 전러시아 면장대회에 참여하였고, 그 후 13년 동안 도헌(都憲)으로 일하였다.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의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참여하였다.
1890년대 하반기 재러동포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지원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건설청부업과 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시기 연추지역은 조선, 중국, 일본과 관련된 러시아의 주요 군사지점으로서 다수의 러시아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할 막사 등 건축물과 이들이 거주하는데 필요한 연료, 상품 그리고 이들을 먹일 육류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특히, 의화단사건, 러일전쟁 등이 일어나자 더 많은 물류가 필요하게 되어,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914년 권업회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절정에 이르러 다시 개전할 조짐이 있자 독립운동 지휘기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의 노령이주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그 시기를 이용하여 재러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인아령이주오십년 기념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행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개최될 수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좋아지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15년 8월 일본이 한인지도자 28명의 추방을 러시아측에 요청하였는데, 그 명단에 들어 있었다.
아울러 1916년 8월 러일신협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주요 한인지도자인 김도여,이종호의 가택이 수색당할 때, 슬라뱐카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되기도 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얀치헤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18년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는 한인회임시중앙총회에서 보고위탁을 받아 초청받은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안건토의를 구성한 각 분과위원회 가운데 토지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간부선출에서 이동휘와 함께 만장일치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일본군이 1918년 8월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침략해 오자 가족을 이끌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우수리스크 군회(젬스트보) 의원, 검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대한국민의회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 등의 명의로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한 3월 중순, 국민의회가 이동휘를 선전부장에, 김립을 이동휘의 부관에 선임해서 이동휘를 간도방면에 파견해 독립운동의 선전 선동에 종사하게 하였을 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이동녕,이시영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게 되었다.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김신부로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회의가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였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연해주와 연흑룡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극동 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쉬코토보, 포시에트, 기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세력에 대해 대대적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김이직,엄주필,황경섭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기 전날 밤 몸을 피신하라는 가족들의 간청이 있었지만, “만일 내가 몸을 숨기면 일본군은 엄마와 너희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할 것이다. 나는 일본군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보았고,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단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에 너희들의 목숨을 내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살았고(당시 60세), 너희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다”고 말하며 죽음의 상황을 준비하였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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