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우리가 태정 태세 문단 세 를 외우고 하나하나씩 묘호를 붙여보면 조금 어색한 이름들이 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세자 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묘호로 쓰고 있다는 점과 신하들에 의해서 반정으로 왕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점, 다른 왕들과는 달리 ~실록 이 아닌 ~일기 로 실록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연산군 왕위 시절에는 무오-갑자년에 일어난 두 번의 사화로 사림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왕의 자리에서 술과 노래를 즐겼으며, 궁녀나 신하들을 죽이는 각종 사건이 난무하였기에 신하들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내쫓았다. 그럼 광해군도 똑같이 사림들을 죽이고, 술과 노래를 즐겼으며, 궁녀나 신하를 죽였을까?
광해군은 선조의 첫 번째 후궁의 2번째 아들로 배경으로 보면 왕이 될 수 없는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13명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영민하여 왕의 자질을 보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서울에서 의주로 피신을 하고, 도망간 자신을 대신하여 민심수습을 위해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고, 전쟁을 지휘하게 한다.
이에 광해군은 전국 8도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을 지휘하며, 의병을 일으키는 등, 숨겨진 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 대신 정실부인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세자 책봉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선조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되자, 집권세력들인 북인의 주도로, 영창대군을 죽이고, 새로운 중전인 인목왕후를 폐위시켰다.
Ⅱ. 본론
1. 광해군의 중립외교 시행배경과 시행을 한 이유
임진왜란 직후, 조선은 초토화 되었고,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무리한 군사파병으로 명나라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북방에선 누르하치 가 오랑캐 라고 낮추어 부르던 여진족을 통일시키고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명의 변방을 위협하였다.
곧이어 후금이 명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명나라는 조선에 의리를 강조하며 군사를 요청했다. 조선에선 남인과 서인들이 광해군의 반대편에서서 우리가 명에 사대국가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임진왜란을 우리가 이겨냈을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명나라 덕분이다. 명이 있어야 우리도 있을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며 명에 군사를 보낼 것을 주장했다. 조선의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이에 명나라 편을 들게 되면, 조선에도 피해가 갈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골머리를 앓았다.
명에 대한 사대를 확실히 할 것이냐, 새로 떠오르는 비상 국가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냐는 온전히 광해군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나라의 운명을 건 선택이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2. 중립외교 시행과정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시행하기로 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1만의 군사를 만들어 일단은 명나라에 보낸다. 하지만 광해군은 강홍립장군에게 밀지를 보내어 말했다.
명나라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구하는 데 힘쓰라. 때를 보아 투항하라. 이에 강홍립 장군은 명나라와 같이 싸우다 후금에게 포위되었고, 후금의 강화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강홍립장군은 조선이 후금에 원한이 없고 지금 출병한 것은 부득이해서다. 라고 말하며 광해군의 뜻을 밝혔고, 광해군의 뜻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의 침략을 유보하였고, 전쟁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3. 시행 후 조선과 명 그리고 후금의 상황
1) 조선
전쟁으로부터의 위협에선 벗어났지만,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의리와 명분을 저버린 광해군을 아니꼽게 여긴 남인과 서인들은 인목왕후를 폐위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페모살제 를 명분으로 하여, 광해군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만든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인조는 남인과 서인의 뜻에 따라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한다. 이에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 1627년, 163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왕이 청의 황제 앞에서 피를 쏟으며 절을 하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게 된다.
2) 명
이미 임진왜란으로 인해 쇄약 해졌기에, 전쟁의 승산은 희박하였다. 결국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또한 무거운 세금과 수탈 그리고 말기 명황제의 포악적인 정치로 인해 이자성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들이 난을 일으켰고, 명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반란군의 규모를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명군이 패배하면서 명나라는 멸망하는 길에 들어선다.
3) 후금
명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금은 더욱 강성해졌다. 하지만 친명배금을 실시하는 조선을 아니꼽게 여기었고, 조선에서 일어난 이괄의 난을 구실로 하여 1627년 조선을 침략하였고,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으며 물러갔다.
이어 후금은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조선은 계속해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청의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었지만, 조선에선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고,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이 홍타이지에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이 확실해졌다.
이에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켜 배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1636년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왕은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황제 앞에서 머리를 3번 땅에 찧고 9번 조아리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렀으며,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고 수십만의 전쟁포로를 데리고 갔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많은 왕실세력이 인질로 데리고 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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