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얼마 전, 어느 독일인의 삶 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치 선전부에서 히틀러 다음의 권력을 지녔던 괴벨스의 여비서 브룬힐데 폼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엮은 책이었다. 그녀의 이야기 뒤엔 글쓴이인 토레 D 한젠이 그녀를 통해 현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미래에 언론과 미디어 분야 종사자를 희망하고 있는 나로서는 단연 언론이 당시 나치 시대 때 어떻게 이용되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한 대목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언론은 나치 선전부의 통제 아래에 있었고, 외국의 상황은 물론, 국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한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나, 독재 정권 시기에 언론들이 어떻게 이용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한국사 사건들을 통해 탐구하고 싶었다. 나는 본 보고서를 통해 역사 속 언론과 사회의 상관관계에 대해 탐구하고, 미래의 언론, 미디어 인으로써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고 싶어 역사 속 다른 두 얼굴, 언론 이라는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
1)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의 신라상 왜곡
우선 일제강점기 때에 언론의 역할을 어떠했을까? 에 대한 물음부터 해결해보도록 하겠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12일 한 기사를 보면 경주가 화류항 이라고 묘사되어있다. 여기서 화류항은 기생 따위의 노는 계집이 모여서 사는 거리라는 뜻이다. 즉 신라의 수도였던, 역사 유적이 많은, 경주를 기생집이 많은 고장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1939년에는 북방의 평양과 남방의 경주는 역사문화의 발상지로서 색향으로서도 이름이 높은 곳 이라고도 표현하며 언론을 통해 사실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밖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일제강점기 언론의 신라상 왜곡’ 책을 통해 당시 일본이 언론을 통해 신라의 이미지를 조작한 사례가 다분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일제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관광지를 소개할 때면 경주를 반드시 가봐야 할 장소로 빠짐없이 꼽으며 관광 명소로 전락시킨 것이 있다. 이에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일제는 신라의 수도, 천년 고도 경주라는 명백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과장했다 며 이는 자신들의 높음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었다 고 비판한다.
이와 함께 선진 문명국인 일본이 야만의 식민지 조선에 도움을 준 것처럼 언론을 통해 홍보하고, 경주의 역사 유적지로써 찬란했던 과거의 모습과 관광지로 전락하고만 현실의 초라한 모습을 대비시키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의 출판사 서평을 통해 일제강점기 언론인 학자들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임나일본부설 로 대변하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라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언론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듯한 글은 실리지 못하게 하며 신라에 대한 왜곡 사실을 퍼뜨려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은 이미지 조작, 식민지 지배 정당화의 매체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론은 독재 정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아 1979년 10월까지 제 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한 박정희 시대 때의 언론이다. 그 당시 과연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자기들 딴에도 언론의 힘이 무서운 줄은 알았는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은 집권 초기부터 만연했다. 61년 5.16 쿠데타 직후에는 민족일보가 폐간되고, 사장 조용수가 사형을 당했고, 1년 뒤에는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라는 구실로 정기간행물 1,200여종을 폐간시키고 916개의 언론사 가운데 일간지, 일간통신, 주간지를 포함해 총 81개만 남겼다.
1974년 10월 8일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론기관 대표들로부터 방위성금을 전달받는 자리에서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며 노골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등 언론 탄압은 더욱 과격해진다. 이에 74년 10월 24일 오전 기자들을 비롯하여 동아일보의 직원들 180여명이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집회를 열어 선언문을 발표하고, 언론 자유 수호 선언을 진행한다.
이에 박정희 정권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 12월 16일부터 동아일보를 겨냥해 엄청난 광고 탄압을 시작한 것이다. 일명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으로 인해 동아일보는 한 달 만에 평상시의 광고 98%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은 두 가지 양상을 띤다. 박정희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권력에 복종하고 충성했던 언론, 그리고 끝까지 박정희의 독재 정권을 반대하고 실상을 알리기 위해 투쟁했던 언론, 이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후자의 언론을 탄압한다. 즉, 그의 집권 시절 언론은 그에 의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2) 촛불의 힘을 일으킨 언론
지금까지 본 보고서를 통해 언론이 기득권 세력에게 이용되고,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만을 탐구해왔는데, 사실 언론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이용되어 오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2016년부터 2017년 동안 있었던 사상 최대의 집회 규모를 자랑하는 촛불 혁명 당시의 언론이 있겠다.
이는 2016년 10월 24일 저녁 JTBC 언론사가 최순실의 국정개입에 대한 증거로 태블릿PC를 입수하여 보도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계속해서 언론사들은 최순실, 그녀의 딸 정유라 그리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등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해 앞다투어 보도한다.
단단히 분노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앞에서 집회를 시작한다. 결국, 집회는 전국적 규모로 번져 100만 명이 넘는 숫자의 국민들이 집회에 참여해 모두 한목소리로 청와대를 향해 탄핵 요구를 외친다. 즉, 촛불 혁명을 일으킨 당시 언론은 시민들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고, 정부가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는 않는지에 대해 감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3) 언론과 사회의 관계
언론과 사회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일제강점기,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촛불 혁명 때의 언론의 역할에 대해 탐구해보았다. 위 세 사건을 통해 나는 사회와 언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정리한 사회와 언론의 관계는 아래와 같다. 우선, 사회가 언론에 영향을 준다. 세 사건을 예로 들자면, 사회 상황이 일제강점기였냐, 독재 정권기였냐, 또는 자유 민주주의 시대였냐에 따라서 언론에 미치는 영향이 각각 달랐고, 누가 기득권층에 있는가에 따라 언론의 역할이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다음, 사회로 인해 역할이 정해지게 된 언론은 거꾸로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제강점기 시대 때는 왜곡의 수단 이었던 언론의 역할로 인해 신라의 이미지가 왜곡되었다. 독재 정권 시기에는 정권을 위한 수단으로 언론이 활약 아닌 활약을 하며 당시 국민으로 하여금 박정희 정권의 이미지를 긍적적으로 심는 등 무지하게 만들었다.
2016년 2017년 사이에는 언론이 정부 감시의 수단 의 역할을 가지게 되면서 광화문 광장 앞에 온 국민이 모여 촛불을 들게 했고,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회와 언론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종의 순환형태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참고문헌
김창겸, 김덕원 외 3명 저, 2017.07.20. 일제강점기 언론의 신라상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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