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정치에서 교육적으로 배워야 할 점
조선전기 제 4대 왕인 세종대왕(1418~1450)은 전에 재위했던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의 왕권 중심의 정치와는 다르게 민본 정치를 실천하여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해소하고자 하였고, 학문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학자들의 연구를 진흥시켜주었다. 이 점에서 내가 희망하는 직업인 교사와의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세종대왕 자신이 학문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정책을 실시하고 학자들과 직접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로 교사가 지녀야 하는 정신 중 하나인 배려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을 세종대왕은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들을 실행했는데, 학생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교사가 고취해야 할 태도와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인재들을 많이 등용하여 자신이 직접 관리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교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제자가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교육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지긴 하겠지만 이처럼 세종대왕이 갖추었던 덕목이 교사가 지녀야 할 덕목과 거의 일치하다고 판단하여 세종대왕의 정치를 주제로 삼게 되었다.
물론 세종 외에도 교육을 진흥시킨 조선의 왕을 꼽아 보자면 정조를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경우에는 학자들의 진흥을 우선적으로 두었지만, 세종은 앞에서 언급했던 민본 백성이 근본이 되는 정치를 실현해서 모든 백성이 잘 배우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점에서 세종대왕은 교육적으로 의의가 있는 사람이다. 충녕 대군(세종대왕)은 본명 이도로, 1397년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인품과 총명한 머리로 인해 아버지였던 태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다.
왕의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었지만, 충녕 대군은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확률이 적었다. 그러나 태종 후에 즉위하여야 할 첫째 아들 양녕 대군은 매일 술과 여자에 빠져 유흥 문화를 즐겨, 태종이 못마땅하게 바라보게 되었는데, 첩첩산중으로 효령 대군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겠다고 다짐하여 세자 자리를 충녕 대군이 물려받게 되었다. 이후 태종이 1418년에 충녕 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해 주어서 제 4대 왕, 세종이 되었다.
과거에 왕권을 중요시하여 6조 직계제를 실시했던 아버지 태종과는 다르게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움을 추구했던 세종은 6조 직계제에서 의정부의 허가를 받고 왕에게 올리는 의정부 서사제로 새롭게 바꾸었다. 비록 태종 때보단 왕의 절대적인 권력이 주가 되지는 않았지만, 세종의 이 제도로 인해 신하들과 왕의 상호작용이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져 학문적인 발전이 많이 이루어졌다. 또한 여러 가지 서적들을 편찬했는데, 월인천강지곡, 팔도지리지, 농사직설,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치평요람, 경제육전 등 각종 분야(지리, 농경, 음악, 정치, 경제 등)에 관련된 서적들을 편찬하였다.
삼강행실도라는 수신서 또한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도덕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여진족에게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4군 6진을 설치해 국토를 넓혔으며, 갑인자를 제조하여 인쇄술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화포의 주조기술, 화약제조 기술까지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주제에서 주로 탐구하게 될 내용은 교육에 관련된 것인데, 지금부터 교육 관련 정책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집현전은 사실 고려 시대 후기 때도 존재하였으나 그저 말뿐인 기관이었으며, 실질적인 학문 활동이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세종이 즉위하였을 때, 이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여 집현전을 주요 학문 기관으로 채택하고 발전해 나갔는데, 이곳에서 학자양성과 학문 연구를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세종은 학자들의 연구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많은 전적, 즉 서적들을 구입,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켰으며, 재능이 뛰어난 학자에게는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인 사가독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세종의 노력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재능 있는 학자들이 배출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집현전 내에서 가장 주요한 직무는 바로 경연과 서연이었다. 경연이란 집현전 학자들과 왕이 한 자리에서 같이 모여 경서, 사서 등 여러 가지 정치 관련 내용들을 합의하고,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서연은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를 집현전 학자들이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왕과 왕세자는 정책이나 유교학습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으며, 학자들은 개개인의 학문 수준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서론에서 언급한 서적들 또한 이 집현전 내에서 편찬되었다. 세종의 집현전 개혁을 통해 조선 전기에 학문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학자들이 많은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세종 시기에 유명한 학자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장영실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장영실이 세종 시기에 활동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완고한 신분제에 막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장영실은 일천즉천의 원리에 따라 관노비였던 어머니의 신분에 맞게 노비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재주로 여러 사람들에게 칭송받았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왕이 그를 발탁하였다.
이때의 왕은 태종이었으며, 세종이 즉위한 이후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 보내어 장영실의 성장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장영실은 명나라로 유학을 갔다 와서, 천문관측시설 관련 자료를 수집해 조선으로 돌아와 여러 가지 과학 기구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시계, 자격루이다.
자격루는 시간 간격으로 물이 흐르게 하여 종이 치게 되면 12자 인형이 출현하게 되어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이 당시 그의 발전은 혁신적이었으며, 현재에도 칭송받고 있다. 이외에도 앙부일구, 혼천의, 간의 등 여러 천문학 기반 과학 기구들을 제작하여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세종대왕은 이 업적을 매우 크게 생각하여 노비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종3품의 대호군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점에서 세종대왕의 재능 위주의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학문 수준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또 다른 인물의 예시로는 김시습을 들 수 있다. 세종이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김시습을 불러 한시를 짓게 하였을 때 그는 매우 흡족해하며 비단을 하사하였다. 다섯 살짜리 아이였던 김시습을 궁궐로 불러 그의 재능을 칭찬하고 비단을 하사하는 모습에서 조선의 한 세대의 학문을 책임질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 자신과 학자들만 힘쓰게 한 것이 아니라, 나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그저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지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세종은 가끔 선비로 변장하여 백성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직접 나가 바라보았다. 그 때에 세종대왕은 명나라의 언어인 한자를 백성들이 전혀 응용하지 못해 여러 불이익을 보는 상황을 자주 관찰하였다. 비록 설총이 제작한 "이두"가 있었지만 그조차도 농사를 지어야 했던 백성들에게는 어려웠으며 농경 생활로 인해 학습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이를 세종대왕은 매우 안타깝게 여겨 우리나라만의 언어를 백성들이 배우기 쉬울만한 언어로 창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는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 즉 명을 받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일반 백성들이 언어를 배우게 되면 양반과 평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왕자, 공주, 몇 명의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하여 결국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훈민정음 안에는 매우 과학적인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는데, 사람의 목구멍 모양, 혀의 위치, 잇몸, 입술 모양 등의 발음 기관을 고려하여 초성(자음)을 만들고, 하늘과 땅, 사람을 본떠 중성(모음)을 만들었으며, 초성을 다시 활용하여 종성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과학적인 글자가 백성들에게 전파되어 그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국가가 유교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 또한 유교를 기반으로 생활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백성들이 유교 경전을 읽고 학습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이는 한자라는 어려운 글자에 막혀 좌절하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들이 쉽게 글자를 사용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유교적인 덕목을 함양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또한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삼강행실도가 대표적인 예시인데,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충과 효의 덕목을 터득하기 위해 글자를 배우게 한 것이고, 그림을 그려 백성들이 더욱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훈민정음은 현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어나 중국어로 쓰인 문장을 한국어로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한글이 유일하다. 영어 발음에서는 R과 L의, C와 K의 발음의 차이에 유의하여 발음해야 하지만 국어는 그러한 섬세함을 필요로 하지 않고 편하게 발음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그 당시의 조선 백성들에 삶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이로 하여 백성들의 삶이 완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종대왕은 앞에서 언급한 것들처럼 민본 정치,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여러 혜택들을 보장해 주었고 학문의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사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교사들은 세종대왕에게 동기부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되기 위한 덕목은 우선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주로 학생과의 공감, 공정성, 배려하는 마음가짐 등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성을 갖추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와 유사하게, 세종대왕은 조선의 학문 발전을 위해 집현전 설치, 경연과 서연의 실시 외에 여러 가지 정책들을 시행하여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장영실이나 김시습 등 나이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모습과 백성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교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세종대왕의 인품을 동기부여 삼아 진로를 준비하게 되면 더욱 탁월한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장영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한 점에서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에게만 적극적인 지원을 하며 다른 학생들을 배척하는 행위는 올바르지 못하다. 그것은 잘못된 적용 방법이다. 신분제의 틀에서 벗어나 실력 있는 인재들에게 여러 기회를 제공했던 세종대왕의 업적은 교사들의 수업 과정 속에서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올려서 학생들이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도록 하는 행위에 적용되어야 한다.
또한 백성들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세종의 애민정신은 학업 스트레스나 가족관계, 학우 간의 갈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학생들에 대한 공감으로 작용해야 한다. 이 탐구를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방면에서의 세종대왕의 업적이나 장영실에 대한 스토리, 세종대왕의 즉위 과정 등 진로활동 외의 지식을 터득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뜻깊은 탐구였다고 생각하며 교사가 가져야 할 덕목을 위인인 세종대왕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된 것 같다. 세종대왕이 실천했던 그 정신을 나중에 교사가 되어 학교 내에서 학생에게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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