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창덕궁
Ⅰ.서론
진로체험주간을 통해 그동안 드라마와 같은 영상이나 말로만 접해 왔던 ‘경복궁’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상상해왔던 것과 달리 광화문 거리 먼 끝자락부터 보였던 경복궁은 커다란 신이 사는 곳이 아닌가라는 착각에 빠질 만큼 크고 웅장했다.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높이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높았고, 끝없이 드나드는 관광객이 많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궁궐은 컸다.
한국사에서 중요하게 배우던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궁궐 지붕의 단청 문양 하나, 또는 궁궐의 구조와 같이 옛 것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와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는 존재자체가 참으로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넓디넓은 경복궁을 돌아다니며 과거 시대의 궁과 현대의 빌딩이 함께하는 모습을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롭다고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는 바람에 원래 들어보기로 계획했던 해설은 거두절미하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경복궁에 대해 검색해 보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건축물로서 각 전각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언제 사용되었는지 등을 알아가면서 경복궁에 갔을 때 해설을 듣거나 사전에 조사라도 하고 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사실 우리나라의 으뜸이라는 경복궁을 잘 모른다는 점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경복궁도 모르는데 다른 궁궐에 대해 알 리는 더더욱 없었다. 서울의 5대 궁궐의 이름도 겨우 외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한국사 보고서 작성을 기회로 조선 시대의 궁궐의 건축물에 대해 알아보고자 창덕궁을 중심으로 탐구하였다.
Ⅱ. 본론
1) 창덕궁의 궁궐 분류 및 주요 건물
조선시대의 궁궐은 용도에 따라 크게 정궁, 이궁, 행궁, 별궁으로 나눌 수 있다. 정궁은 임금의 제 1궁궐로, 정식적인 정치와 왕실의 생활이 이루어진다. 이궁은 제 2궁궐로 뜻하지 않은 일로 궁을 옮기게 되었을 때 이용하는 궁을 의미한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달랐지만 이궁 또한 임금이 때때로 거처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식 궁궐이기 때문에 궁궐이 갖추어야할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창덕궁이 바로 이러한 이궁에 속하는 궁궐이다. 이 외에도 행궁은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도의 처소이며, 별궁은 별도의 궁을 뜻하다. 주로 전염병과 같은 변고가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이다. 17세기 초의 건물로 추정되는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중 가장 오래된 문이 된다. 현재 보물 제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천교는 돈화문으로 들어와 명당수를 건널 때 사용하는 돌다리이다.
궁궐의 초입에 물을 두는 것은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를 구현하고, 주술적으로 악귀를 쫓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특히 창덕궁의 금천교는 비단처럼 맑은 개울이라는 의미의 금천(錦川)을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이지만 나쁜 기운을 막는 개울이라는 금천(禁川)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금천교는 돈화문으로 들어와 명당수를 건널 때 사용하는 돌다리이다.
궁궐의 초입에 물을 두는 것은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를 구현하고, 주술적으로 악귀를 쫓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국가의례의 중심공간이다. 정전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는 조하례 (즉위, 탄생일과 같은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축하하여 예를 갖추던 일)이다. 조하례는 많은 인원이 모여 엄격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주변이 넓고 단정한 행각으로 마당을 지었다.
인정전은 외부에서 볼 때 2층 건물로 보이지만 실내에서는 높은 공간을 바람이 통하도록 하는 층으로 사용한다. 대한제국 시대 이후 전등과 커튼 등의 새로운 설비가 도입되어 현재에는 내부공간이 서양식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남겨져 있다.
정전인 인정전이 상징적인 정치행위의 공간이라면 편전인 선정전은 실제적인 정치 행위의 공간이다. 편전은 일상적인 접견과 회의장소로 사용되었다.
선정전은 여러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화재를 당해 재건을 반복했는데, 남아 있는 건물은 양식상의 특징으로 인조대의 건물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치 행위뿐만 아니라 왕비가 주관하는 행사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으로서 각종 정치시설의 가장 뒤편에 있다. 대조전은 왕비의 공간이기 때문에 후궁의 처소나 대비의 처소등 여성들의 공간이 주변에 있다. 조선시대 침전은 일정한 규범에 따라 건축되었다.
중앙에 3칸의 대청을 가지고 좌우에 온돌방을 가지는 형식이다. 중앙의 3칸 대청은 유교의 의례를 행할 수 있는 공간구조로, 이는 정전과 편전의 중심구조와 같다. 즉, 침전이 거주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세자가 머무는 공간인 창덕궁의 동궁은 성정각과 낙선재가 중심전각이다.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의 교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다른 영역보다 세심하게 계획되었다. 성정각 주변에는 곳곳에 붉은 칠을 한 나무판으로 판벽을 만들어 외부인의 출입과 시선을 제한했다고 한다.
창덕궁의 중심영역이 비교적 전형적인 공간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것에 반해 동궁영역은 복도와 누각을 적절히 연결하여 공식일정과 휴식을 병행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원래는 후궁의 처소로 지어졌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순종의 계후인 윤황후, 영친왕 이은과 그 부인 이방자 여사 등이 광복 이후까지 거주하여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이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
낙선재는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누마루 아래에서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에는 현대적인 느낌의 추상적인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얼음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어 빙렬(氷裂)문양이라고도 하는데 장식 효과와 함께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밖에 각종 창호의 무늬도 매우 섬세하고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 문이 있다.
2) 창덕궁의 창건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 2대 정종은 고려의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 하였다. 이후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하여 경복궁과 함께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복궁의 이궁답게 경복궁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이며,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 불렸다. 창덕궁의 창립 이후로도 역대 임금들이 모두 창덕궁을 선호하여 매년 건축 사업이 이어졌다.
조선후기 임진왜란에 의해 소실되자 창덕궁 복구공사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건 후 인조반정 때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 6월에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만에 복구되었다. 목조건물은 비교적 분해와 재조립이 용이하기 때문에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거나 상한 부분을 깎아내고 더 작은 부재로 활용하는 등 다양하게 재사용할 수 있어 빠른 시간에 복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러 번 화재를 겪으면서 초기의 모습과는 달라진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경복궁의 정궁 역할을 대신하였으며,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밝은 덕을 창성하게 한다. 는 뜻을 지닌 궁궐인 창덕궁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창덕궁의 후원
존덕정은 관람지에 있는 육각형 정자이다. 내부의 게판 중 정조가 1789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는 글귀가 유명하다. 불교 경전을 인용한 것이지만 자신을 만 갈래 시내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로 비유하여 강력한 왕권의 절대군주로서 자부심을 드러낸 말이다.
존덕정의 위쪽에는 반원형의 연못과 사각형의 연못 2개가 별도로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을 네모지다는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현재는 하나로 합쳐져 있다고 한다. 존덕정 앞 반월지(半月池)가 차서 넘치면 수로로 흘러서 관람정 앞 관람지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이다. 관람정은 관람지에 접하고 있는 정자이며, ‘관람’은 뱃놀이를 구경한다는 의미이다.
옥류천 영역은 왕이 시강 후 휴식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후원 중 가장 깊숙한 위치에 놓여 있다.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개울이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져 있는 어정으로부터 계곡물이 흐른다.
어정은 청의정과 소요정 사이에 있는 작은 샘으로 후원에서 가장 좋은 약수로 전해진다.1636년(인조14년)에는 넓은 바위에 U자형의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들여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소요정 앞으로 떨어지면서 폭포를 이루도록 했다.
옥류천 주변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왕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건축물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Ⅲ. 결론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지어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화재를 겪어 이를 복원하였으나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도 존재한다. 아름답기로 잘 알려진 창덕궁의 후원은 존덕정과 옥류천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한제국의 왕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었으며, 현재 창덕궁은 궁궐로서의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며 좋았던 점은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건물의 명칭에 대해 명확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소 조선의 건축물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정전이나 편전과 같은 궁궐 용어가 전문적이어서 마냥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창덕궁에 대한 보고서를 쓰며 그러한 인식은 금세 사라졌다.
조선시대 궁궐 구성이나 문양 하나에 담긴 의미를 스스로 자료를 찾아 알아가는 과정이 매우 뜻깊었다. 건축 분야에서 깊은 이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과 흥미를 절로 일었던 시간이었다.
후에 서울의 5대 궁궐 모두 사전에 공부를 하거나 직접 해설을 들으면서 조선의 궁궐에 대해 더욱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조선시대의 정원이나 우리나라 전통 정원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 이제는 단순한 목조건물이라고 보는 것이 아닌,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했던 존재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평소 역사적인 장소에 갈 때면 그냥 눈으로 보고 그쳤던 습관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품고 있는 장소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처럼 궁에서 사진만을 찍었던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우리나라 궁궐을 역사적, 건축사적 관점에서 알려줄 수 있는 콘텐츠의 필요성을 느꼈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자료
Ⅰ
'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지연의 생애와 활동 (103) | 2024.10.08 |
---|---|
5.18 민주묘지 팸플릿 (31) | 2024.10.05 |
서재필 선생의 생애와 활동 (17) | 2024.09.30 |
미인도 위작 논란 (5) | 2024.09.21 |
5. 18민주화운동 (15) | 2024.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