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의 생애와 활동
1. 서론
장지연은 1864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가입해 활 동하였고 《황성신문》을 통해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치고, 애국 계몽 운동과 국채 보 상 운동에 뛰어들어 신문과 잡지 등에 논설을 써서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이 후에도 장지연은 언론인으로서 독립을 위해 애썼지만,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에는 친 일 행적을 보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주필로 활동하면서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게재한 것이다. 그는 192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말년에 그가 한 친일 행동은 지금까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여전히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항일 정신을 드높인 언론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데, 그가 친일 행적들을 했음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정말 참된 언론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추앙받았을 것이다.
그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년 전부터 그의 친일행적들을 발견한 학자들이 이러한 서훈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결국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이 취소되었다.
물론 유족들의 반발로 보훈처의 처분은 무효 처리가 되었지만, 장지연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역시 그의 친일 행적들을 고려하여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때 그렇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목 놓아 통곡하기도 했던 그가 왜 그런 모순적인 행동들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장지연에 대한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어떻게 내려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장지연의 생애와 활동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2. 본론
1) 개화기 성장과 항일 운동
1864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 향시 응제과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고 이후 3~4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894년 식년시 진사를 3등으로 합격했으나, 이 무렵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관직에 임명되지는 못했다.
장지연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후학 양성과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부터 내부주사를 겸직하다가 1898년 10월에 의면했다.
2)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
1898년 4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에는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 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으나 수개월 후 그만두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 윤치호, 이달용 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 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재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글을 인용했다. 한편, 장지연이 사장직에 있던 황성신문은 통감부의 압력에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 정간되었다.
장지연은 1906년 1월에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장지연은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고,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 등을 남궁억, 윤치호 등과 함께 조직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 대립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장지연은 1909년 10월부터 진주의 지방지 경남일보 의 주필이 되어 <황성신문>과 해조신문 이래 중단했던 언론활동을 재개하고 1913년 8월까지 계속한다. 경남일보의 발간 목적 중 하나가 경남의 효자 충신 등 유교의 삼강을 잘 지킨 인물들의 전기를 소개함으로써 풍속을 선량토록 하는 등 유교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데 있었다는 점에서, 장지연의 유교에의 애착과 그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지향을 읽어낼 수 있다. 그가 이 신문의 주필로 있을 당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실어 문제가 되었었다.
⑶ 경술국치 이후 친일 성향의 언론 활동
그러나 그로부터 약 1년 후에 장지연이 지은 것이 유력시되는 천장절 축하시가 이 신문에 실린다.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대해 초기에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초빙 제의를 거절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신문에 다수의 글을 기고하게 된 것도 모순적인 행동이다. 그는 1914년 12월 이후 ‘객경’이란 필명으로 매일신보 에 글을 싣기 시작, 1918년 7월까지 무려 730여 편을 상회하는 분량의 글을 투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신문이 일제의 원활한 식민통치를 돕기 위한 총독부의 기관지였음을 비추어 볼 때, 이 신문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는 그 자체로 ‘변절’이라 해석될 소지가 충분하다. 실제로 그 기고문 가운데에는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듯한 글과 내선일체를 희구하는 글, 그리고 일제에게 유리한 아시아주의를 주장하는 글이 산견된다.
예컨대 조선풍속의 변천에서 총독부에서 새 정치를 펼친 이래 착착 구폐를 개 하고 새 변화를 선포함에 조선 구습의 풍속도 차 개량되어 변천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여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 만필소어 에서는 동양국은 오직 일본과 본국 두 나라일 뿐이고 서로 손을 잡고 친선한 다음에야 외부를 막을 수 있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 신문에 투고하는 동안 그는 매일신보사시회 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시를 이 신문의 사조 나 시단 에 실었는데 그 가운데에도 친일인 내용의 시가 있었다. 예컨대 1916년 12월 하세가와가 새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시를 실었다.
하세가와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한국주둔군사령이 있었던 자로 무단통치를 이어갈 총독으로 부임한 것이었는데, 장지연은 이 시에서 하세가와가 구면으로 낯이 익어 꽃도 예전처럼 기뻐한다 는 내용의 환영을 표한 것이다. 1918년 1월 1일에 대정6년시사 라는 이름 아래 실린 시들 가운데 이왕동상 에는 조선과 일본이 융화되어 서광이 빛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할 것은, 그가 이 신문에 조선의 유교 전통문화를 옹호하는 글도 비중 있게 싣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대동교가 해산된 이후에도 대동교의 취지에 따른 유교 개혁을 시도하는데, 1915년에는 유교조공자 라는 글을 이 신문에 실으면서 공자의 유교 창시 경위와 전파 과정을 설명하고 종래 유교 경전에서 빠졌던 ‘이적’을 기술하여 유교의 종교적 요소를 강화하려 하였다.
장지연은 1918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사설이 실린 것이 마지막 글이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병으로 요양하던 중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했다.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3. 결론
당시 장지연의 생전에 생각들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가 대동아론을 옹호하며 일제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글을 썼던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말년의 업적으로 그의 일생 전체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행위이다. 그가 그전까지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치고, 애국 계몽 운동을 했던 것은 분명히 인정해주어야 하는 업적들이다.
황성신문은 경술국치 전까지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로 현재 평가받고 있다. 또 그가 국채보상 운동에서 대한매일신보에 글을 씀으로써 국민들의 참여를 더 많이 이끌어냈던 것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성과이다. 장지연의 이러한 활동들이 항일 운동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는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또한 다른 독립 운동가들조차 조선의 전통적 사상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갈 때 그는 생애 말까지 유교 개혁을 외치며 자기 민족에 대한 애착을 이어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의 ‘조선유교연원’ 저술은 조선유학사 정리의 효시라고 현대에 평가될 만큼 현대의 전통적 가치 계승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선영, 2009, 「장지연의 변절과 신채호의 순국」, 한국언론학회
국회도서관 자료
'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문헌 (51) | 2024.10.13 |
---|---|
제주 4·3사건 (86) | 2024.10.11 |
5.18 민주묘지 팸플릿 (31) | 2024.10.05 |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104) | 2024.10.04 |
서재필 선생의 생애와 활동 (17) | 2024.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