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기
제주도는 여러 형태의 특징적인 화산지형과 지질을 지니고 있어 화산의 보고라고 불리고 있으며, 아름다운 경치와 온난한 기후, 독특한 문화와 전통 등의 관광자원이 풍부한 섬이다. 그래서 오늘날 제주도는 한국의 손꼽히는 관광지로, 국내외 여행객 구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다.
얼마전 최근 방영된 효리네 민박 이 인기를 끌면서 제주도 한 달 살기와 같이 일에 지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휴식을 취하는 목적으로 제주를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주가 1948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어 묻힌 피로 가득한 땅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제주 4·3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우연한 기회로 허영선 작가의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책을 읽은 후 이렇게나 커다란 사건이 다수의 사람들이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4월 3일이 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제주 4·3사건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았는데, 대부분 명칭만 들어봤다 고 대답했다.
그래서 언젠가 학우들에게 4·3에 대해 알릴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콘텐츠 제작을 위해 심도 있게 사건에 정확히 알아보고 기반이 되는 정보를 모으고자하는 마음에서 주제를 선정할 때 가장 먼저 제주 4·3사건을 떠올렸다.
물론 이러한 이유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도 주민들의 죽음과 그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벌써 70주년이 되어버린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느꼈던 마음도 한 몫 했다. 제주를 마냥 아름답고 한가로운 섬으로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곳에 있었던 비극을 알고 있어야 앞으로 섬 제주 를 더 가치 있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2. 제주 4·3사건의 배경
해방 직전까지 일본은 제주도를 전략 기지로 삼을 생각으로 무려 6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현재 제주도에 남아있는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동굴 진지와 전투기 격납고가 그 증거이다. 일본의 오키나와가 미군에 점령되자 일본은 제주도를 일본 본토를 되찾기 위해 미국과 결전을 치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미군이 제주에 상륙할 경우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유격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미군이 상륙하는 날에는 당시 20만 명의 제주도민을 총알받이로 세워 끝까지 맞서 싸운다는 계산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이후 한반도 북쪽으로 소련군이 주둔하고,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소련에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점령할 것을 제안했다. 즉, 즉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미·소 군정기 상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는 38도를 기준으로 북한, 남한으로 나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독립에 핵심 열쇠를 지니고 있던 소련과 미국의 협의가 중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회의가 결렬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에 넘겨버렸다. 1947년 11월 소련이 참석하지 않고 개최된 UN총회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선거를 감독하려는 목적으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자 애초에 참석하지 않았던 북한과 소련은 UN의 결정에 반발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결정을 환영하였고, 좌익세력은 이에 반대하였다. 한편,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와 김규식 등은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김일성에게 남북한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회의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미국과 소련 양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협상을 실패로 돌아갔다.
4·3사건의 발단 및 전개과정
해방을 맞아 일본군이 철수하는 동시에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도 도민들이 제주도로 한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돌아온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해 수백 명의 인명 희생되었으며,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로 식량난이 겹쳐 민심이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제에 동조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이 되었으며, 민생이 피폐한 상황에서도 군정 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나타났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이 겹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약 3만여 명이 모여 제 28주년 기념집회를 열었다. 기념집회를 진행하던 중, 구경을 하던 어린아이기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해한 결창이 군중에게 시민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에 돌입하여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하였다.
이들 중에는 일부 경찰과 공무원까지 있었다. 미군정은 총파업에 대해 진상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대응책으로 경찰의 발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좌익세력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1947년 3월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의 경무부장 조병옥은 3·1사건이 일종의 폭동이며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투입하여 강제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3월 15일부터 3월 18일까지 약 200명이 검거되었으며, 이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하였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제주도의 총파업 사태는 3월 말에 진정되어 갔으나, 경찰당국의 대량 검속이 진행되어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약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
이때 1947년 남한의 단독선거가 대두되었고,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되리라는 우려에 좌파뿐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격렬히 반발하였다. 제주에서는 2월 8일부터 여러 지역에서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2월 말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이 참석한 신촌회의에서 강건파와 온건파의 논쟁 끝에 12 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등을 주장으로 내세웠다.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무장투쟁을 경찰이 담당할 치안 문제 로 파악하였다. 4월 8일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4월 10일에는 국립경찰전문학교의 간부후보생 100명을 제주에 파견하여 경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진압한다는 방침은 반발을 사게 되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월 17일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경비대 제9연대에게 경찰과 협조하여 진압작전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고,
4월 18일에는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4월 28일에 경비대와 무장대가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할 것 등을 합의하였으나, 5월 1일에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었다. 방화사건 직후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총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미군정은 계속해서 강경진압으로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지역 문제가 아닌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고, 10월 18일에는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피난민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진압 군경과 여기에 가세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족 중에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 이라 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였다,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기도 하였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하여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제주 4.3 사건의 결과
4·3 이후 섬은 비슷한 시기에 치르는 제삿날로 가득했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는 보안 감찰, 요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고, 유적에게는 ‘연좌제’라는 장애물로 고통을 안겨주었다. 또 다른 현재 파악된 희생자 수는 제주인구의 1/10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빨갱이 로 몰리고 비난을 받을까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한다.
4·3사건이 사회로 들어나기 시작한 때는 1960년의 4·19 혁명 때었다. 제주 대학생 7명이 이때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해 현장조사를 나섰고, 구금을 당했다. 같은 해 6월 21일 재경제주학우회는 국회 앞에서 4·3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1933년 제도의회에 4·3 특별위원회 가 설치되었고 2000년 1월 제주4·3 특별법 이 국회에 통과되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노력을 통해 2003년 10월의 마지막 날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 때 드디어 정부는 4·3희생자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4·3사건 당시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한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과거사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4·3사건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고자 2008년 3월에 제주4·3사건 평화 기념관 이 세워졌다. 마침내 2014년이 되었을 때, 4월 3일을 4·3 희생자 추모일 로 지정되었다. 4·3이 발발한지 6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마무리하며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까지 제주도에서 무력 충돌과 그에 따른 진압작전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현대사의 최대 비극적 사건으로 꼽힌다. 보고서를 작성하며 잠시 잊고 있었던 4·3 사건의 많은 희생자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옆에서 남편의 시체가 실려 가도 모르는 척해야 했던 부녀자, 동굴 속에 숨어 들키지 않기 위해 아기의 입을 막았다가 아이가 죽어버렸던 일, 아버지가 아들 대신 죽겠다고 하자 둘 다 한 날 한 시에 죽게 된 사연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건들이 한데 모여 있던 곳이었다.
언제나 사람의 목숨을 쉬이 앗아가고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고문을 행하는 사건을 보면 분명 감정을 지닌 인간일 텐데,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 자체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행동에 문제를 삼지 않는 사회의 모습 또한 가장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인간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분위기가 그랬다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한 잔인한 행동은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를 떠올리면 정말 아픈 역사임에 틀림없지만 아프다고 숨겨버리면 상처는 곯고 썩기 마련이다. 동백꽃 은 제주 4·3사건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다. 그 이유를 찾아보니 동백꽃 잎이 떨어지는 모습이 피가 떨어지는 모습과 비슷하여 처참한 그 당시의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매년 제주 4·3 사건을 기억에서 떠올리며 다시는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인권과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 확실한 진상규명을 통해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허영선, 2014,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
국회도서관
'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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