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프랑스의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불에 탔다. 프랑스어과인 나는 당연히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기사를 찾아보던 중,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일부 중국인들 환호…왜? 라는 헤드라인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기사 내용은 프랑스가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불에 태웠던 과거를 생각하면 인과응보라는 내용이었다.
또 비슷한 내용의 다른 기사에서는 노트르담 재건을 위한 기부를 받는다는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에 일부 한국인들이 분노했었다. 한국의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여러 국가의 약탈문화재를 돌려주지 않고 이를 통해 관광 수입을 얻고 있으면서도 성당 재건을 위한 기부금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관점이었다.
이러한 기사를 읽고,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불에 탄 것은 슬픈 일이지만, 익히 들어 알듯이 루브르 박물관에 많은 약탈 문화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 것임에도 임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프랑스라는 국가에 정말 애정을 갖고 있지만, 잘못된 점을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 약탈문화재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 우리나라의 일이자 프랑스의 일인,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결심했다.
Ⅱ. 본론
1782년 정조는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세웠다. 외규장각은 1776년 창덕궁에 설립된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고 병인양요로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1,007종 5,067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한다.
고종이 집권한 당시 조선의 상황은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펼치며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다. 당시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교도들이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은 프랑스를 이용해 러시아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를 박해했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자국의 국민의 죽음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던 프랑스는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함대에 의해 궁전과 외규장각 도서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프랑스 군대는 은궤, 어새 등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류와 고문서들을 약탈해 갔다. 특히 의궤는 조선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건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의궤에는 왕의 결혼, 세자 책봉, 장례 등의 행사가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명목상으로는 조선 왕조 519년 동안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조선 초기의 의궤들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제작된 의궤만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833종 3430책뿐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과 일본 궁내부 등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기록 유산은 주로 글이 중심이지만 조선의 의궤는 그림이 중심이라는 점과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만큼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사람들의 옷 색깔, 모양, 크기가 아주 상세히 묘사돼 있으며, 각각 다른 깃발과 마차의 모습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때문에 높은 벼슬을 가진 양반은 물론 글을 모르는 백성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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