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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국어 자료실)

박완서 소설의 작품분석

by kjk쌤 2024.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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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 작품은 우리에게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서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작품을 단순히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이라 부르는 것은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희미해진 기억과 기억사이를 이어준 작가의 상상력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른, 성장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설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 낙원으로부터의 이탈

고향인 박적골에서 나는 부족함이 없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유년시절을 보낸다.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 기회가 없을 정도로 풍족한 마을에서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할아버지의 귀애 속 에서 자란 그녀의 유년기는 자연과 구별되지 않았던 낙원 속에서의 삶 그 자체였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 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 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 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 이 벌판 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무나 피마자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고향인 박적골은 한 여자아이의 유토피아, 아니 작가 박완서의 영원한 유토피아적 공간 인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 그 낙원으로부터 이탈됨으로써 지금까지 의 삶의 모순을 발견하고 혼돈을 느끼며, 비로소 세계 속의 자기 존재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고향, 즉 낙원으로부터의 이탈은 외형적 분리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차이를 동반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 강제로 실행된 도시 입성은 나에게 거부감과 두려움을 심어준다.

 

2) 도시 속에서의 이율배반적 체험

도시에서의 생활은 시골에서의 풍요와는 비교도 안되게 각박했으며, 경제적 능력으로 상하를 구분하는 또 다른 가치 기준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에 양반으로서의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에게 도시에서의 삶은 어려움 그 자체였고, 나는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로 인한 모순된 태도를 보이게 된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의식적으로 현실과 갈등을 겪는 다. 하지만 그는 그 부족함을 비판하면서도 차츰 그것에 동화되어 간다.

시골선 서울을 핑계로 으스대고, 서울에선 시골을 핑계로 잘난 척할 수 있는 엄마의 두 얼굴은 나를 혼란스럽게도 했지만 나만 아는 엄마의 약점이 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문 밖 사람이라는 열등감조바심과 함께 그 문 밖의 이웃들을 상종 못 할 상것들로 취급하는 엄마의 도시적인 것에 대 한 맹종과 경멸의 이중성에 대해서도 비난을 가한다.

엄마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어떡하든 밀고 나가는 강한 성격인데다가 교만하기도 해서 안집식구를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안집의 여러 식구의 관계는 복잡해서 첩도 있고 전실 자식도 있었다. 수입이 일정치 않은 가난뱅이 주제에 씀씀이가 헤픈 것도 엄마는 기회 있을 때마다 비웃었다. 가끔 주인 집 여자가 엄마한테 돈을 꾸러 올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 여자 앞 에서는 흔쾌히 꿔주고 나서 가고 나면 중얼중얼 욕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은 점점 나에게로 전이되어 서울에서의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와 접근을 모색하는 나의 모순적 태도에서도 드러나 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는 서울 사람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와 나는 현저동 에서는 박적골의 근거를 자랑으로 여기면 서 박적골에 가서는 대처 물먹은 티를 내는,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데서 오는 조바심을 자긍심으로 감추어 온다.

문명 속에서는 야성을 그리워하고 야성에 귀환하면 문명을 과시하고 싶은 양면적 감정은 이렇게 모습을 달리하면서 교차되고 반복된다.

 

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을까

소설로 그린 자화상-성년의 나날들 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박완서의 장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미완인 채 끝났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완결편 이라 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는 두 권으로 나누 어 묶인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이라 하겠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작품 속에 나타나는 소설적 상상력과 기억의 관계를 되짚어 보게끔 한다.

피난 생활에서부터 휴전 무렵까지의 이야 기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기억의 철저함과 세태풍속의 치밀한 복원은 앞선 작 품과 다를 바 없지만, 주체가 처해있는 상황은 사뭇 다르다고 하겠다. 도시체 험과 전쟁체험으로 대변되는 상황적 차이가 그것인데,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작 가가 몸소 체험한 전쟁은 가까스로 서울에 말뚝을 박은 한 가족의 운명을 뿌 리 채 흔들어 놓은 실체이자 가족사의 비극을 낳은 억압의 체험인 것이다.

 

1) 교화자의 몰락과 부재

이 작품에서 교화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은 어머니와 오빠로서 나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이들 교화자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훼손, 몰락함으로써 이들 영향력의 부재는 결국 상징적 질서의 파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전쟁은 양반 가문이라는 점잖은 근거와 신교육에 대한 열망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 가치기준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했던 어머니의 문밖의식 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선비의 잣대로 자신의 전향을 부끄러워했던 오빠의 담백한 순진성을 여지없이 배반하였다. 나는 부권으로 상징되는 삶의 질서 가 지극히 약한 시대 속에서 성장한다.

그의 가족관계 안에서 남자의 존재는 할아버지와 오빠이며 비록 그 현실적 힘이 매우 약하기는 하지만 유년기에 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대신해 주었고, 사춘기 이후에는 오빠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중학교 이후 오빠의 모든 언행이 나의 가치 기준이 될 만큼 주인공에게 있어 오빠의 영향력은 크게 자리했다. 그러나 14후퇴를 전후로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 온 오빠는 자아를 상실하고 거의 폐인이 되어 버림으로써 사정은 달라지게 된다.

오빠는 나에게 천성의 생각하는 갈대였다. 그런 그가 지금 살찐 돼지가 되려고 열심히 자신과 식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말이 많아지면서 표정도 과묵하던 때의 준수한 모습은 간데없이, 소심하고 비루해지고 있었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 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오빠 같은 한낱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함부로 넘나들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오빠가 얼굴을 잃고 돌아왔다 고 해도 지금의 오빠보다는 유사성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비극적으로 강요된 이러한 성년식은 전쟁이라는 상황이 초래한 것이긴 했 지만 나를 더욱 괴롭힌 것은 오빠의 쇠락과 그 쇠락을 맹목적 사랑으로 덮고 있었던 어머니의 집착이었다. 어머니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빈집털이를 하러 다니는 며느리와 딸을 애써 모르는 체 하며, 한마디 위로 와 말조차 아낌으로써 당신만 그 치욕스럽고 께적지근한 짓으로부터 결백하 려는 예의 양반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쟁 전까지 집안의 실질적 가장 이자 신학문으로 상징되어지는 어머니가 무력해지고 판단 능력을 상실한 데 는 오빠의 쇠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2) 전쟁체험에 대한 성별화된 기록

저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자전적이면서도 전쟁체험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생존의 서사라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전쟁체험이 어떻게 자전적 서사 의 틀 속에서 발화되고 기록되며, 증언 주체의 주체성 확립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가부장적 전통에 비춰볼 때 남성은 전쟁을 유발하고 주도할 가해자 의 편에 있는 반면, 여성은 피해자로서 혹은 남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생존의 영역을 책임지는 주체로서 자리 매김 된다. 박완서의 증언적 서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여성은 살아남아 전쟁을 증언하는 말하기의 주체이자 전쟁동안 생계를 책임지는 주체이다. 또한 나는 불모의 현실 속에서 스무 살 청춘을 살아 낸 성장의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체성 확 립의 과정이 스무 살 청춘의 성장과 맞물리면서 여성 성장소설의 국면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가족의 생계와 운명을 책임지게 된 여성들은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겪고, 그것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을 정립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오빠와 엄마를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꾸려가는 것은 올케와 나 이다. 또한 두 여자가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장면들의 세세한 기록의 현장은 음식에 대한 감각적 묘사로 오롯이 재현된다.

올케와 나는 오빠와 어머니를 대신해 가짜 피난을 떠나고 귀환해 생계전 선에 나선다. 박완서 소설에서 성격이 가장 강력한 인물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어머니 라 하겠다. 올케는 이 집에 반 자루 가량 남아 있던 밀가루 자루 주둥이를 틀어쥐고 발 발 떨었다. 내가 올케 입장이라면 부엌에서 배불리 훔쳐 먹고 나서 상을 들여갔을 것이다. 올케가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에게 대들고 싶은 걸 참고 순 종한 건 존경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의 통제하에 있어야만 우리 식구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본능적인 생존 감각 때문이었다.

세 끼를 굶고 나서야 나와 올케는 급기야 빈집털이에 나서며, 도둑질일 수 밖에 없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뭐니뭐니 해도 올케는 우리 식구의 대들보였다. 만약 올케가 꼼짝 못 하게 되면 나 혼자 힘으로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릴 능력도 의욕도 나에겐 없었다. 나 혼자 그 짓을 하느니 어디론지 도망가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올케가 푹 하고 웃으면서 내 등 위로 자신의 상체를 꺾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내 등 을 짓눌렀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터져 나오는 폭소를 참느라 가슴이 그렇게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줄 알았다. 안심이 되어선지 나도 웃음이 나려고 했다.

얼마나 우스우냐 말이다. 늙은이도 아니고 스무 살밖에 안 된 계집애가 내 손 은 약손이라니. 그러나 이윽고 나는 내 목덜미가 홍건히 젖어오는 걸 느꼈다.

올케와 나는 이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들을 지금까지 함께 나눈 믿음과 정으로 버텨 나간다. 또한 다시 피난을 가야하는 상황에서 죽은 전처의 처가로 피난을 가겠다며 고집을 피위는 남편을 보며 또 한번의 정신적인 수난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케는 남편이 망가져가는 그 형극의 시간과 남편의 죽음을 그렇게 말없이 견디었다.

오빠의 죽음을 전후한 그림자 같은 생존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 올케는 기지촌 장사를 다닌 끝에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내고, 나는 미군 PX에 취직해 한 남자를 만나 생살과도 같은 엄마와 가족과 분리해 결혼을 하게 된다.

올케의 생활력과 인내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은 분명 나의 성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쟁체험에 대한 성별화된 기록과 집 밖 세상을 본격적으로 체험하는 내가 속악한 세태를 접하면서 내적사회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의 기술은 생존의 서사인 동시에 성숙의 서사인 것이다.

 

참고자료

이보영, 성장소설이란 무엇인가. p 12.

이지현 (2013)성장소설을 통한 현대소설의 교육연구. P 8~12

전혜정(2004) 성장소설 연구 P 18~22

이재선 현대한국소설사 (민음사) 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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