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민은 1894년 12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함종에서 문명순과 안명숙의 2남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이며, 호는 무강, 무리이다. 처음 이름(본명)은 희석이었으며, 다른 이름으로 문강・문일민・문현철등이 있고, 중국 이름은 왕량이다. 부인 안혜순(2019년 건국포장)과 장남 문정진(1990년 애족장)도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함종의 함일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평양에서 물산위탁 판매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다음, 그해 7월 남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뒤 남만주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에 참가하여 한족회의 명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애국청년회의 연락과 조직 강화 활동을 벌이고 남만주 본거지로 복귀했다.
1919년 말 독립전쟁론자로 평가되는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또 서간도 및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이듬해 초기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 무렵 미 ・ 일 전쟁설과 함께 러시아일본 전쟁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1920년 초 독립전쟁을 시정방침으로 선포했고, 이후 한동안 국내외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임시정부와 연계된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입 작전이 강화되었다.
1919년 12월 문일민은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별동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20년 9월 18일 미국 국회의원단의 조선 방문(방한)에 맞추어 국내 주요 도시의 일제 기관 폭파와 일제 요인 처단 등의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사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그는 국내에 파견되는 행동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던 남만주 독립운동 조직 광복군총영에서는 일종의 국내 특공대로 서울・평양・신의주와 평안북도 선천 방면으로 3개 행동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문일민은 장덕진・박태열・우덕선, 김예진・안경신 등과 평양에 파견되는 제2대에 속하였다.
문일민은 대한광복군총영 평양 폭탄특공대 소속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대장 박태열을 비롯하여 표영준・우덕선・김예진・안경신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평남 안주군 입석에서 일본 경찰 한 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로 잠입했다. 이들은 1920년 8월 3일 밤 9시 50분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져 장벽 일부를 파손시켰고, 같은 시각 평양부청(당시 평양시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폭탄을 던졌다.
문일민은 우덕선과 함께 피신 중 평양성 칠성문 부근에서 검문하는 일본인 순사 요코야마를 사살하였다. 결국 우덕선・박태열・장덕진은 만주를 거쳐 중국 상하이로 돌아갔다. 문일민은 홀로 남아 의열투쟁을 지속하다가 1921년 초 상하이로 갔다.
그러나 안경신은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 폭탄 투척 의거 이후 함남 이원에 피신하여 은신 중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문일민은 박태열・장덕진・우덕선 등과 함께 궐석판결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국내에 남아 활동하던 표영준도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한편, 문일민은 1926년 침체 상태에 처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의 안전을 강화할 목적으로, 박창세・강창제・이수봉・이운환등과 상하이거류민단 의경대를 주축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대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남만주의 대표적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정의부로 가서 군사참모 주임으로 활동했으며, 정의부 산하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담당했다.
그는 1928년 2월 1일 열린 한국노병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허가되었고, 정의부 특파원으로 중국 광둥성에 파견되어, 황포군관학교 당국과 군사원조 관련 교섭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문일민은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광동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김원봉 일파의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싫증을 느끼고 박창세・조소앙 등과 탈당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하였다.
1942년 10월 25일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제3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 28일에는 최동오・조완구・이복원・조성환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 소 등 연합국 정부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안에 참여했고, 이튿날인 10월 29일에는 신영삼・왕통・한지성과 같이 국가와 군가 제정안을 제안하였다.
1944년 4월 14일 소집된 조선민족혁명당 제8차 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고, 1945년 2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유동열・신영삼・신공제・강창제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한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 10월 25일 문일민의 할복은 의거로 불러야 마땅하다. 해방 직후의 해방정국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풀렸으나, 한반도의 남북부에서 미군정과 소련의 영향이 지대한 상황이 전개되어 과거 친일파가 활개 치고, 남북분단이 점차 고착화 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에 한 개인,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이러한 현실적 모순을 타개해 보려는 하나의 극단적 선택이자 살신성인의 구체적 실현 방안으로 할복이란 경종의 수단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문일민의 중앙청 할복 의거는 2023년 10월 꼭 76년이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호소하고자 했던 정치지도자들의 단결과 친일 잔재 청산, 그리고 민족 통일과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오늘날의 당면과제는 아직도 우리 민족의 비원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문일민・안혜순 부부, 그리고 그 아들 문정진의 독립운동 헌신과 문일민의 살신성인적 중앙청 할복 의거를 다시 한번 주목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혜순은 총칼과 폭탄을 들고 직접 투쟁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남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통해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더구나 어린 자식 등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며, 애국애족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문일민 선생의 초지일관하며 굳건한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힘겨운 망명생활을 묵묵히 이겨내며 3남 1녀를 키워냈다. 자신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혜순 지사의 자랑스러운 삶과 투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난에 처한 한민족의 자유와 평등, 정의와 공화를 향한 공동의 목표와 이상,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고난의 역정을 헤쳐온 문일민・안혜순 부부 독립운동가로 그들의 헌신적 삶이 오늘에 시사하는 독립 정신과 그 참된 가치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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