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수원백씨인 부친 백남현과 밀양 손씨인 모친 사이의 5남매의 장남이었다. 족보상의 이름은 형철, 속명은 상규, 법명은 진종 이었다.
유년 시절에는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세속을 떠나 고결하게 사는 삶을 동경하였다. 또한 부친이 잡은 고기를 불쌍하다고 하여 모두 살려 주었다는 일화, 모친의 고사리를 따는 것을 제재하였다는 일화가 전하듯이 유년시절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불교에 대한 인연이 남달랐다.
14세에 남원 교룡산성의 덕밀암 으로 출가하였다. 그의 출가는 유년시절부터의 불교 인연과 계모와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속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16세에 합천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를 단행하였다. 해인사에서 승려의 기본 교양을 익힌 후 고운사의 영민선사 에게 대비주 수행을 지도받았다.
서울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민족운동과 연계된 것은 1912년 5월 12일에 개교한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의 개설이었다. 이 임제종포교당은 1910년 9월, 친일승려인 이회광이 일본불교인 조동종과 비밀리에 맺은 조동종 맹약의 반발 구도에서 나왔다.
조동종 맹약은 1908년 3월, 등장한 종단인 원종이 구한국정부 및 통감부에게 공인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원종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국권상실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일개 종단인 조동종과 원종의 공인을 요청하면서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비밀조약은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손상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조약 내용이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임제종 운동이었다.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 계승에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종지 수호운동에 나섰다.
임제종 운동은 1911년 초반부터 송광사, 쌍계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주로 남방 지역의 사찰을 거점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주체는 한용운, 박한영, 송종헌, 진진응, 오성월 등이었다. 이 운동의 초기, 운동의 본부인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범어사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운동의 홍보를 위하여 각처에 포교당을 개설하였다.
그의 민족불교 활동은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불교 대표로서 3・1운동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던 한용운으로부터 1919년 2월 20일 경에 민족대표 참가 제의를 받자 즉각적으로 수용하였다.
그와 한용운은 1912년 초반부터 항일 저항불교인 임제종 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던 연고에서 추대, 수용이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불교사상적인 측면에서 한국이 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었다. 이는 1919년 8월 27일 고등법원 판사가 독립선언을 한 근본 목적을 묻는 질문에,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은 필요하다.
일본에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또 불교사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하여튼 조선의 독립은 용이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터이다 라고 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1년 봄, 출옥하여 대각사에 머물며 자신이 감옥에서 결심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상사조에 둔감한 승려들은 그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홀로 이를 추진하였으니 그 단체가 삼장역회이었다. 그리고 1921년 겨울에 창건된 선학원의 출범에 일시 관여하였다.
선학원은 수좌들의 중앙거점으로서 불교의 자주화를 지향했기에 그런 취지에 동의하여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선학원의 출범에만 관여하고, 자신이 감옥에서 약속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입적하는 그날까지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하는 일에 헌신, 매진하였다.
2007년, 그의 생가터에는 용성교육관, 용성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1990년 그의 문도들은 용성대종사전집 을 펴냈다. 그러나 이 전집은 백용성의 자료, 전적 등을 영인한 것이기에 부실하였다. 그래서 대각회, 대각사상연구원은 동국대와 산학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2013년부터 백용성대종사 총서 발간 사업을 추진하여 2016년에 백용성대총서를 발간하였다.
한편, 백용성 문도는 백용성의 비석을 관리하는 성격의 사찰인 용탑선원을 1948년에 세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세운 비석의 내용이 부실하다고 하여, 1994년 백용성의 비석을 해인사에 다시 세웠다. 이 비문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지관이 지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는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기려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같은 해 한글학회에서 민족정신 고취와 문화 발전에 이바지 한 공로로 감사패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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