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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5.18 북한군 개입 주장

by kjk쌤 2024.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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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제 전문가들과 김일성의 비밀교시, 그리고 5.18에서의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 의혹을 정리해 본다.

 

1) 김용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치고, 지하당 개입이 없는 사태는 하나도 없다. 민주화는 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서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으며,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5.18을 북한에서는 5.18민중항쟁이라 부른다. 4.19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2) 이영명 교수, 김일성의 비밀교시는 탈북한 북한간부들의 증언과 비밀자료로 엮은 것으로 산경신문의 20045회에 걸쳐 연제되었다. 이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5.18광주의 북한개입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3) 결정적 시기

19768월 대남공작원들과의 대담

결정적 시기를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정세는 오직 혁명가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성속되게 됩니다. 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종 형태의 대중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 탄압을 유도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시위 군중들이 동료들의 피를 보게 되면 더 격렬하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19741월 대남담당요원들과의 담화

결정적 시기가 조성되었다고 해도 그 시기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4.19때의 교훈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혁명을 모스크바에서 지도할 수 없듯이 평양에 앉아서 남조선혁명을 지도한다는 것은 혁명의 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1979113호청사 부장회의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 민중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197912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하에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쿠데타입니다...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김일성의 5.18관련 발언

1980년대 초 간부용 강연자로에서 5.18무사고정시견이초과운동 과 관련해서 광주문제에 언급한 발언이 있었다. 51.8무사고정시경인초과운동은 단순히 우리나라의 경제혁명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19805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일어났던 영웅적인 인민항쟁의 정신을 끊임없이 이어가자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공주인민봉기에서 용감하게 전사한 우리 혁명 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자는 것이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속에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고정 간첩망을 통해 광주교도소 습격을 사주한 것이 아닌가?; 5/21, 무장시위대의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은 5.18광주사태의 성격규명에서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광주교도소에서는 총 수감인원 2700명에 간첩 및 좌익사범 170명 수감되어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6차례에 공격으로 총격전을 감행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시민군 26명 사망했다. 이 대목에서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 일부이겠지만 불순세력들이 주동한 국가전복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나?

 

간첩 이창룡의 검거사건; 23, 오전 6시경 남대문 경찰서에 잡혔다.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다. 현금 1,935,000, 난수표 3, 무전기 1, 독침 1, 위장 주민등록증 2, 환각제 등 22339종을 압수했다.

 

26일 시위대가 전남일대의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사건;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 TNT 10여상자,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의 탈취되고 이 중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는 367대로 구성되었다.

 

미리 침투해 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 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26일 발생한 민간이 사상자 35명 중에서 13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는데, 총상 13명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한 사망이다. 총상의 70%가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다. 계엄군에는 카빈총이 일체 없었다. 시민군내에 불순분자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재춘 방위병으로 기동타격대로 1987,7월에 글,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95년 서울지검이 발표한 총 사망자 193명 중에서 13명의 신원미상자가 발견되었다. 보상금이 1인당 15,000달러가 지급되었는데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무등갱생원의 M-16무장 36인조; 끝까지 무장해제에 저항, 당신들은 무기를 반납하면 돌아길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면 돌아갈 집은 커녕, 밥 한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이제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

 

4) 광주사태 기간 중 북한의 동향,

김일성은 517일 심야와 광주사태 발생 당일인 18일에 연이어 군··기관 고위관간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국내정세를 검토하고 통일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인민군은 18일 전군 연대장급 이상 전원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의 정세를 평가한 후 군사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19일에는 북한전역에 걸쳐 군수물자 동원검열을 실시하는 등 전쟁준비계획을 총점검했다. 20일에는 중국을 방문 중이던 군사대표단장 백학림 중장이 북한은 통일을 위해 전쟁준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공언했고, 21일에는 긴장된 국내외 정세를 이유로 군인의 외출을 일체 금지시키는 한편 출장중인 군인과 당원을 27일까지 귀대하도록 지시했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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