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발과 유신영은 부자관계로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힘써 마땅히 삼갈지어다. 충효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라고 하면서 충 과 효 를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유성룡 이후 풍산 유씨가문은 충효를 가업으로 삼았다. 유성룡의 장손 유원지는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충효청백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할아버지 유성룡의 유지를 전했다.
또 졸하면 분수에 편안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되어 재주와 임기응변 같은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성하면 자연스럽게 실제에 힘쓰게 되어 꾸밈에 힘쓰거나 스스로 속이는 병에 빠지지 않게 된다 고 하면서 졸성을 가학으로 제시하였다.
졸성은 사전적 의미로 보잘 것 없는 정성 이라는 뜻인데, 유원지가 제시한 졸성의 뜻은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 를 의미한다.
유도발은 아버지 유진휘와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승수, 호는 회은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풍산 유씨의 대표적 집성촌인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하회마을이다. 아버지 유진휘는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황해도 송화, 경기도 강화 함경남도 고원 등지에서 군수를 역임하였다.
유도발 집안은 유성룡의 아들 유단 이후 자손이 없어 줄곧 양자로 이어졌다. 유단은 형제 유진의 둘째 아들 유백지를 양자로 삼았고, 그 후 유후승, 유성흠, 유익, 유필조, 유진휘 등 선대가 양자로 대를 이었다.
그만큼 그는 집안에서 매우 귀한 자손이었다. 큰아버지 유진황과 작은아버지 유진우 등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가문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다’라고 하면서 유도발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유도발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해 9월 일제의 강점 소식을 듣고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한다. 더욱이 팔촌동생 유도필로부터 전국 각지에서 전패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패는 각 지방 관청에서 봉안하던 전자가 새겨진 나무패로, 국왕의 탄생일이나 특정 날짜에 의식을 치를 때 관리들이 예를 올렸던 대상이다.
곧 국가를 상징한다. 전패의 훼철은 성리학에 철저했던 유도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변고였다. 이는 나라의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곧 망국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도발은 이미 자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는 유도필에게 내 나이 80세에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게 되었으니 그 욕됨이 심하다. 하물며 나라의 신하된 후손임에 있어서랴 라고 하면서 통탄했다. 유성룡의 후손으로서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죽음으로써 경술국치에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도발・유신영 부자의 학문과 사상은 풍산 유씨 가문의 가업과 가학인 충효졸성으로 집약된다. 충효는 국가에 대한 의리로, 졸성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로 나타났다.
이 신념으로 경술국치와 광무황제 고종의 서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는 나라에 대해 의리를 실천했고 아들은 나라와 아버지에 대해 충효를 실천했다. 충효졸성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실천사상으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들의 자결 순절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투쟁의 일환이었다. 그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은 이들의 항일정신을 일깨워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는 울림이었다. 유도발, 유신영은 대를 이어 죽음으로 일제에 맞서 항거한 대한의 선비였다. 출처: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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