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 조사 동기 및 목적
김치는 우리나라 대를 대표하는 음식중 하나이다. 이제는 외국에 수출을 할 정도로 뛰어난 발효 음식이지만 고작 우리가 알고 있는 김치의 종류 는 별로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 김치의 종류는 어느 정도인지 또한 계절별 김치의 종류와 담그는 과정을 조사하여 주변에 우리 김치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조사를 하였다.
㉡ 조사 방법
우리들이 즐겨먹는 김치의 종류와 담그는 방법을 부모님들의 고향별로 김치의 종류를 조사하였고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 다음과, 네이트, 네이버, 와 김치요리 연구가들의 누리집에서 자료를 모아 조사 하였다.
Ⅱ. 본론
㉠ 김치의 어원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를 지라고 하였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에서는 김치담그기를 염지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 가 물에 담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는 유교가 도입되어 복고주의로 흘러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저 라는 명칭이 쓰였다. 즉 본래 지라고 부르던 것이 유교의 복고주의에 따라 고려말 부터 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딤채 라는 말이 보이는데, 1518년의 벽온방 에는 무딤채국을 집안사람이 다 먹어라. 라는 말이 나오며, 1525년의 훈몽자회 에서는 저를 딤채조 라 하였다.즉 우리 겨레는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림으로써 독자적으로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채소 국물에 침지 된다. 또 국물이 많은 동치미 같은 것에서는 채소가 국물 속에 침전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네 고유의 명칭인 침채가 생겨난 것이다. 박갑수 는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는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다시 구개음화의 역현상이 일어나서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 김치의 역사
김치에 관한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2,600∼3,000년 전에 쓰여진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 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시경 에는 밭두둑에 외가 열었다. 외를 깎아 저 를 담그자. 는 구절이 있는데 이 저 가 바로 김치이다.
한나라 때의 에도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죽순 등 일곱 가지 저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므로, 이러한 한나라의 김치가 낙랑을 통하여 부족국가시대의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문헌상의 자료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식품에 관한 서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우리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문헌을 통하여 그 시대의 식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의 쇼쇼원문서 나 연희식 같은 문헌에 의하면 소금, 술지게미, 장, 초, 느릅나무 껍질에 절인 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수보리지란 김치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쌀가루와 소금에다 채소를 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쌀가루로 담그는 김치는 500년경의 중국 식품서인 제민요술 에도 나와 있다. 제민요술 에는 이밖에도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설명되고 있다. 일본의 옛 사서인 고사기에 의하면 오진왕 때 백제사람 수수보리가 건너와서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수수보리지는 중국에서 백제로 전해져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백제에는 수수보리지뿐만 아니라 제민요술 의 여러 김치가 식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백제에서뿐 아니라 삼국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려 중엽에 이규보가 지은 가포육영 이라는 시 속에 순무를 재료로 한 김치가 우리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다.
무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 이로써 고려시대의 김치로는 무장아찌와 무 소금절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15년경의 산림경제 의 김치류를 보면, 고추가 들어온 지 1백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보이지 않고 소금에 절이고 식초에 담그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 만들기 다섯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유명한 김치의 하나인 쓰촨포채 는 포채항아리에 8% 정도의 소금물을 6할 정도 되게 넣은 다음 여기에 소금물의 0.1% 정도의 천초, 3%의 고추, 3%의 술을 넣고, 따로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20%의 소금물에 절였다가 꺼낸 것을 항아리에 담고 약 10일간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동치미와 비슷하다.
또 엄장채란 소금, 술지게미, 향신료 등에 채소를 섞어 넣어 겨울을 위하여 저장하는 것이고, 자채와 저채는 같은 종류이지만 자는 소금과 쌀로써 발효시킨 것이고 저는 젓갈, 장, 생강, 마늘, 식초 등의 짜고 시고 매운 것과 잘 조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저채에 대한 설명에서는 엄장채, 자채, 제채가 다같이 저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개발된 종류의 저를 특히 저채라고 한다. 이들을 구태여 구별한다면 저채는 발효시킨 뒤 그대로 먹는 것이고 엄장채는 물에 씻어서 2차 가공이나 조리 재료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원십육지 에는 또 젓갈을 섞어주는 김치인 해저방, 곧 섞박지가 등장한다. 이것은 소금에 절인 잎줄기가 달린 무에 오이, 배추 등의 다른 채소, 청각채와 같은 해초, 고추, 생강, 천초, 마늘, 겨자 등의 향신료, 조기, 젓갈, 전복, 소라, 낙지 등의 해산물, 산미완화제 가 되는 전복껍질 등을 함께 버무려 알맞은 소금농도에서 젖산 발효시킨 것이다.
근대 및 현대의 김치 변화의 주된 요인은 김치 재료의 품종개량과 젓갈 및 조리법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결구형 배추가 우리 식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계속하여 배추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1960년대까지도 서울배추, 개성배추라고 하는 반결구형의 배추를 사용하여 김치를 담그는 집이 많았었다.
김치 조리법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은 6·25전쟁과 도로시설과 교통수단의 발달과 매스컴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지역 사이를 왕래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아 각지방의 고유한 김치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 지방에서 장기간 머물게되면서 서로 다른 지방의 김치를 먹어보고,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게 되어 다양한 조리법을 접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김치는 세계적인 음식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000년에는 일본·미국·영국 등 외국에 7,900만달러의 김치를 수출하였다. 또한 2001년 7월 5일에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 에서 김치를 국제식품 으로 공인을 하여, 앞으로 해외로의 수출 전망이 밝아졌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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