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강원도 통천군 순잠면 오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춘기이며 어머니는 김성녀였다. 자필 이력서에 나타난 가족 사항을 보면 위로 4명의 형, 유봉준 , 유덕로, 유상근과 두 명의 누이 동생 유상철, 유상렬이 있었다.
둘째 형인 유봉준은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 거주하고 있어 이력서를 작성할 1932년에는 북간도 화룡현에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 상하이로 오기 전까지는 북간도 화룡현 명신사 부흥평 2호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 6살부터 9살 때까지 한학을 배우고 10살에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하였다.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연길현 2도구로 이사를 하면서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북간도에서도 한 곳에 오래 정착해 살 수 없었다. 연길현 2도구에서 3개월 정도를 거주하다가 봉밀구 필산촌으로 이사하여 약 1년 반 여를 거주하였다.
이 기간에 선생은 아버지를 도와 농사 일을 거들었다. 필산촌에서 다시 용정촌으로 이사하여 1년 정도 머물며 동흥중학교에서 1년 정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동흥중학교는 중국 만주 지린성용정에 설립된 민족주의 학교로 대성중학, 은진중학과 더불어 용정 주변지역의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다.
동흥중학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천도교단에 의해서 1921년 10월 설립, 운영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만주지역의 많은 한인들 역시 만세시위와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는 만주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10년을 전후해 설립된 교육기관에서 전개한 민족교육운동의 결과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더욱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6년 일제측의 자료에 의하면, 간도 내에 한인이 설립한 학교의 숫자가 모두 191개교인데, 그 중 종교단체에서 설립한 학교가 74개교였다.
천도교 역시 1920년대에 들어 간도를 중심으로 교육기관 설립에 노력하였다. 천도교에서는 1920년 11월 청년들에게 천도교의 교리와 포교를 위해 천도교간도협성종학강습소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 협성강습소는 천도교의 용정・연길・화룡교구에서 합동으로 설립, 운영한 것이었으나 정규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용정 등 3개 교구에서는 정규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준비하고 용정교구를 중심으로 1921년 3월 마침내 동흥학교를 설립하였고, 4월 15일에 개교하게 되었다.
설립 목적은 천도교의 발전과 민족적 교육 및 민족적 단결을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동흥학교는 초등과 1, 2, 3, 4학년과 고등과 1, 2학년 과정의 학제를 계획하였으나, 설립 초기 교사 모집 등의 이유로 인해 먼저 초등과정의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고등과정은 중학강습소로 대치하여 운영하다가, 1921년 10월 1일에 중학강습소를 동흥중학교로 승격, 전환하고 초등과정의 소학교는 동흥중학교의 부속학교로 체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선생의 학업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화룡현으로 다시 이주한 뒤 19살에 하얼빈으로 가서 이모부인 이종익의 집에 머물렀다. 이모부 집에서 특별한 일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선생은 이모부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약간의 여비를 얻어 다렌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 때가 1930년 경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사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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