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생인 박건병은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 읍내리 673번지가 본적이다. 아호는 맹천이다. 미주지역 독립운동계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역임한 박용만의 5촌 조카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에서 첫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지원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에서 파견한 김상덕(金이 철원군 동송면 도피안사에서 지역의 교육계와 기독교계 사람을 만나 애국단 소속 강원도 철원군단을 조직하자 참가하였다.
1920년 1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 때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2개월 정도 활동하다 베이징으로 갔다. 8월에 외교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베이징군사통일촉성회가 결성되자 합류하였다.
이듬해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가 열리자 참가하여 의안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회의에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하는 안건이 제출되자 찬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창조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국민위원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소련은 일본과의 긴장관계를 원하지 않는 데다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국민위원회의 신정부 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국민위원회는 신정부를 세우는 대신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24년 8월 북경한교동지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는 1925년 3월 1일 자로 기관지 도보를 창간하였다. 잡지를 순간또는 월간으로 발행하여 노령, 서간도, 길림, 일본, 국내 등지에 보냈다.
무장투쟁을 수단으로 절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대독립당을 결성해야 하며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운동도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잡지를 통해 국내외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도 이를 뒷받침하고자 창간호에 혁명운동상 조직의 여하 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듬해 7월 이후 관내 지역에서 대독립당 촉성운동이 시작되자 북경촉성회 결성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만주에서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가 열렸을 때 베이징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길현 동향수하자에 있는 계림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10일 동네를 침입한 강도에게 피살당하였다. 한창 활약할 나이인 41세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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