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우리나라 3대 미제사건 중 하나였던 일명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용의자가 등장하였고, 그가 범행을 인정하는 일이 발생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란, 경기도 화성시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된 사건이다.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던 사건이었기에 비록 공소 시효가 끝나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하더라도 용의자 발견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이후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는데, 과연 조선 시대에서는 살인죄를 어떻게 처벌했으며, 이와 비슷한 사건이 당대에도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 형법 및 형사법, 관련 사건 등을 다뤄보며 둘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본 탐구는 후에 경찰행정학과를 진학하여, 경찰이 되고 싶은 본인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조선의 형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형법 발달과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조선의 형벌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형벌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지함으로써 법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경찰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로 요구되는 대한민국의 형법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탐구를 통해 진로와 관련된 심화 내용을 이해하고 진로에 대한 의지를 돋우는 데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의미의 범죄는 법률상 형벌이 부과된 행위를 말한다. 조선 시대의 범죄개념은 일종의 사회·윤리적 규범 위반을 내용으로 하는 부분이 있어 현대적 의미의 형법과 달리 법과 도덕의 구별이 전제되지 않고 오히려 ‘도덕규범위반설’의 시각도 기초가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시대는 중국의 명률을 이어받아 보통형법으로서 적용하였으므로 명률의 형벌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조선 고유의 형법과 형벌이 우선으로 시행되었다. 개국 이래 명률을 형법전으로 삼고 적용하면서도 명률 소정의 형벌에 만족하지 않고 명률의 형벌을 가중하거나 변용하고 혹은 명률 외의 형벌을 창설하여 조선 특유의 각종 형벌이 발생, 소멸, 번성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각종 형벌은 사형, 귀양, 곤장 등이 있었다. 유교 이념에 근거하여 교화에 중점을 둔 형법 관념을 가졌던 조선 시대는 덕으로써 인도하고 형으로서 가지런히 한다는 치도론을 강조하였다. 조선 시대 형법의 법원 가운데 가장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명률에는 오늘날의 형법과 같은 수준의 범죄구성요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범죄에 대한 법 효과적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형벌과 매우 다른 형식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형법은 죄형정형주의 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구성요건이 행위태양별, 행위수단별, 법익침해의 결과의 경중 등을 각각 모두 반영하여 매우 세부화되어 있었고 조문의 수도 훨씬 많았다. 명률의 형벌체계는 오형 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오형을 들고, 각각 금납에 의한 수속액을 명시하고 있다. 명률은 정형으로 오형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실제 형벌을 운영함에서는 오형 외의 형벌을 여러 가지로 추가하거나 각종 부가형을 첨가하여 사실상 율령 상의 형벌보다 가중하고 있다.
조선 시대 살인죄는 국왕의 반역 역모죄와 더불어 중대범죄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명률에서는 살인을 모살, 고살, 투구살, 회살, 오살, 과실살으로 구분하였다. 사람을 모살하거나 고살한 자는 참수형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싸우다가 사람을 구타하여 죽인 투수살의 경우도 흉기를 사용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만 과실치사의 경우 속전을 징수하여 피해자의 집에 주도록 하여 그 형을 면제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실제로 행해졌던 처벌은 그때 일어났던 사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홍윤성이 거느리던 여종의 남편이 나계문을 죽였는데, 현감과 감사가 홍윤성의 군세에 겁을 먹고 처벌하지 못하였다. 세조가 온천에 행사하였다가 나계문의 아내 윤씨의 호소를 듣고 홍윤성의 종 등을 처형하였다.
또한 대명률에서는 “만일 노비에게 죄가 있어 그 가장과 가장의 친척 및 외조부모가 관아에 신고하지 않고 때려죽인 경우에는 100대의 형장을 치며, 죄가 없는데 죽인 경우에는 60대의 형장을 치고 1년의 도형(徒刑)에 처한다. 만일 가장이 품팔이하는 사람을 때렸는데 품팔이하는 사람이 그로 인해 죽게 된 경우에는 100대의 형장을 치고 3년의 도형에 처하며, 고의로 죽인 경우에는 목을 매달아 죽인다. 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화성연쇄살인사건과 같은 연쇄살인사건이 있었다. 때는 선조 36년이었다. 한양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인들의 시체들이 발견됐는데 그 시체들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해 보기가 끔찍했다. 사망한 여성들은 몇 달 전부터 실종된 평민층 부녀자와 기생들이었다. 얼마 후에는 승정원에서 일하는 유희서 가 살해되는데, 선조가 나서서 직접 범인을 잡으라고 왕명을 내린다.
형법은 그 사회의 명함이다. 형법을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형법도 조선 시대의 사회·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문화 등 조선 시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는 관료조직을 기반으로 한 계급적인 사회질서를 가지고 있었고 성리학적인 도덕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질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선 사회의 배경이 조선 시대의 범죄를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 현행 형법은 근대 이후 일본의 형법 및 그 전신인 독일의 형법을 계수한 사실 때문에 과거 전통사회, 특히 조선 시대의 형법과의 단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형법이 출발이 조선 시대의 형법과의 연속성이 끊긴 채 서구의 형법 이론을 토대로 한 유럽식 형법을 수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사고에는 여전히 전통사회의 사고방식이 남아 있어, 형법전 곳곳에 전통사회의 의식이 스며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조선 시대의 형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오늘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내용과 매우 비슷한 측면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그러한 내용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오늘날의 형법 적용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음은 형법규정뿐 아니라 그러한 규정을 실제로 적용할 때 동원된 해석의 원리들을 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은 명률을 형법전으로 삼고 적용하였으나 그 형벌에 만족하지 않아 조선만의 형벌이 번성하게 되었다. 조항을 세부화하고, 조문의 수도 더욱 많았는데, 그런 조선에서도 살인죄는 중대범죄에 속하였다. 조선에서 살인죄는 참수형, 교수형 등을 당할 수도 있는 죄였다.
이런 엄형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에도 연쇄살인사건이 있었다. 이는 여인들이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으로,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런 그는 선조의 반대로 당장은 벌 받지 않았으나, 후에 반란을 일으켜 사약을 받게 된다.
조선은 계급사회였으며, 성리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처벌 여부가 결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러지 않는다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 때문에, 조선과 대한민국 형법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형법규정과 해석 원리를 살펴보면 법전 곳곳에 있는 전통사회의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연쇄살인사건이 있었을까 라는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해 진행한 탐구였지만, 새로 알고 배운 건 정말 많았다. 현대에 들어와서 생겼을 것 같은 연쇄살인이 있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걸 조사하고 결국엔 범인을 알아낸 그 당시의 수사관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때에는 아무런 장비도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증거 수집이 더욱 어려웠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결국엔 밝혀낸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한 조선이 명률을 형법전으로 삼았는데 그 형벌에 만족하지 않아 자체적으로 형벌을 발전시켰다는 것에는 경외감을 느꼈는데, 당시 조선의 능지처참이나 거열형을 생각하면 당시 조선이 엄형주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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