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기독교에 입교하여 전도사업에 힘쓰다가 미국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여자전문학 입학했다. 귀국 후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얼마 후 사직하고 평양 진명여학교의 경영권을 인수해 교장에 취임했다.
경영난으로 김수철에게 학교를 넘기고 대동군의 한적한 농촌으로 들어가 전도사업과 부녀 계몽운동에 전념했다. 1920년 11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평안남도 총무인 김봉규가 영원·덕천·맹산 지방의 청년 다수를 규합해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에 본부를 두고 인쇄기 3대와 활자 등을 사들여 사형선고문·협박장·경고문 등을 인쇄해 일본관헌과 친일파들에게 보냈으며 재산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우편물호송대를 습격해 탈취한 송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1920년 11월 6일 영원군 서창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 청년 2명과 같이 가다가 불심검문을 당하자 청년들을 구하기 위해 순사의 허리를 껴안고 군도를 빼앗아 던져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6개월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했다. 1921년 만기 출옥할 즈음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이 발각되어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계속 복역했다.
1927년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환으로 근우회가 조직되고 1928년 평양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되자 지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임시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9년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는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0세가 넘어 대동군 대보산 중턱에 수양관을 세워 안창호와 그 동지들에게 제공해 수양동우회의 활동에 조력했다. 8·15해방 후 평양에서 조선민주여성총동맹 북조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45년 11월 공산당은 내 동포가 아니다 라고 하며 월남했다.
1948년 2월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자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가서 가난하게 살다가 양로원에서 죽었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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