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1906년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귀국, 항일청년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고향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안희제와 함께 협동조합 의춘상행을 창립하여 농촌경제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부산에서 송문빈·안희제와 함께 독립운동의 연락과 자금지원을 목적으로 한 백산상회를 경영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한 뒤 그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재무차장으로 있으면서 재정문제 해결에 노력했다. 이때 고향에 있던 사재 30만 원을 가져와 임시정부에 헌납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그가 요절하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 라는 제목하에 그의 죽음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했다.
본관은 파평. 자는 명구, 호는 우산. 아버지는 필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난징 등지를 돌아보면서 선배들과 사귀고 국제정세를 살폈다. 1906년 도쿄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귀국 후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항일청년비밀결사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고향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또한 안희제와 함께 협동조합 의춘상행을 창립하여 농촌경제부흥에 힘을 기울였으며, 부산에서 송문빈·안희제와 함께 독립운동의 연락과 자금지원을 목적으로 한 백산상회를 경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4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재무차장으로 재정문제 해결에 노력했다. 이때 미국 선교사를 통하여 고향에 있던 사재 30만 원을 가져와 임시정부에 헌납했다. 이어 임시정부 재무위원장·내무위원을 지냈으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1920년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발기인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벽에 부딪혀 임시정부를 개혁하고 운동노선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1921년 5월 안창호 와 함께 국민대표대회기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한 위에서의 개혁을 요구했고, 1922년 5월 국민대표대회준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가 요절하자 일본의 은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라는 제목하에 그의 죽음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했다.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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