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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일제강점기 유학생과 학우회

by kjk쌤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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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일제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대학 등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한인 학생들은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미국 등 외국으로의 유학이 쉽지 않았던 당시 실제로 유학이 가능했던 곳은 거의 일본으로 한정되었다.

 

한국인 학생의 일본 유학은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학업을 연마하는 한편 단체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면서 계몽활동을 펼쳤다. 최초의 유학생 단체는 1895년에 설립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였다. 이후 제국청년회, 태극학회, 대한유학생회, 대한학회 등을 거쳐 1909년 첫 통합단체인 대한흥학회가 탄생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1210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7개의 출신지방별 유학생 친목회의 연합체로 설립되었다. 한동안 친목회의 분회 조직이 남아 있었지만 19161월 모두 해산되면서 학우회는 동경 지역 유학생을 망라하는 통합대표조직이 되었다.

 

19312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할 때까지 유학생 단체를 넘어 일본 지역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독립운동단체이기도 했다.

학우회의 목적은 회원 상호 간의 지덕체의 발달과 학술연구 및 의사소통 도모였고 동경과 인근 지역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회원이 되었다. 학우회에 참여하지 않는 유학생들은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학생들 사이에서 학우회의 조직력과 통합력은 매우 컸다.

 

31운동을 경험하고나서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더욱 고조되었으나 여전히 교육의 기회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고등교육 기관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28독립선언 이전 약 600명에서 3여 년이 지난 1922년에는 3000명 가까이 증가했다.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및 러시아혁명이라는 굵직한 세계사적 전환기에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유학생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신 사조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게다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오는 한국인 노동자가 늘면서 재일한국인 노동운동과도 적극 연대하였다.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1920년대 초중반 학우회 및 일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그 궤적을 함께 한 인물이 이옥이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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