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부터 조선왕조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국가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근 5백년을 지속해온 왕실의 노쇠함과 권력 투쟁에 매몰된 양반들의 한심한 작태로 말미암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채 우왕좌왕 헤매었을 뿐이다. 결국 한반도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거듭 승전함으로써 한국의 운명은 일본 제국주의에 넘어가게 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더불어 정미7조약의 체결로 인해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더욱이 8월 1일에 단행된 군대해산을 거부한 시위대와 진위대가 전국 각지의 의진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군경과 전면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산과 들은 의병의 깃발과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박은식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 당국의 통계를 통하여 입증된 바 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08년 전라도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수에서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2%와 60%를 차지하였다.
그는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호는 대천, 아명은 정거, 이명은 준환으로 알려져 있다. 또는 는 경락이요 호는 묵헌이요 본은 창녕이니, 천성이 효우하고 박학다재하였으며, 후학의 교도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는 내용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그가 남긴 글도 많지 않거니와 후손들에 의해 기록된 문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단편적인 기록마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그것을 갈무리하더라도 조경환 의병장의 성장과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그가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자료보다는 1960년대 이후의 문헌에 의거하여 성장과정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일제의 잔혹한 통치과정에서 독립운동가의 항일 기록보다도 후손들의 생존조차 버거웠던 암울한 식민지 상황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의병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을 밝히기는 어려운 편이나, 그의 항일투쟁에 관한 내용은 비록 일제가 남긴 기록이긴 하나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그만큼 조경환 의병장의 빛나는 항일투쟁의 반증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이 글은 조경환 의병장의 항일투쟁을 복원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의병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을 간단하나마 살펴보겠다.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위의 본문에서 인용한 자료에 주목해보자. 그는 창녕조씨로서 자는 경락, 호는 묵헌이라 전한다. 그는 대천의 호가 있으니, 생전에 두 개의 호를 사용한 듯하다.
왕재일편찬한 전병장 조경환 순국사실에 의하면 조경환은 8세부터 25세까지 유학을 배웠으며, 23세부터 30세까지 전국의 명산대천을 순력했다고 한다 . 약 2년간 시기가 중첩되나 아마도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보면 188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유학을 배웠으며, 1900년 전후부터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까지 전국을 돌아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1907년 1월 1일 최익현은 원수의 나라 외딴 대마도섬에서 사망하여 충남 정산으로 운구한다는 소식 역시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수만명이 참가한 운구 행렬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 면암의 순국 소식은 특히 호남지역 우국지사들을 격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면암의 1876년 흑산도 위리안치를 계기로 호남지역에 그의 제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춘추대의 일월고충의 대명사인 면암의 충성심에 감복한 호남의 우국지사들은 면암의 순국이후 적극 거의를 모색하였다. 조경환 역시 면암의 순국에 충격과 함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1907년 후반 노사 기정진(1798-1879)의 제자인 기삼연(1851-1908)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는 1896년 음력 2월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 참여한 이래 10여 년 동안 불굴의 항일의지로 일이관지하였다.
그의 항일정신은 인통함원넉자에 집약되어 있는데, 이를 가슴에 새기며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 전념하였다. 절치부심하던 기삼연은 1907년 10월 중순 장성 석수암을 근거지 삼아 30여 명을 불러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주둔했다가 전북 고창 문수사로 이진하였다. 이때 50여 명으로 증가했는데, 아마도 전남 나주 출신의 김준(1870-1908) 이 의병을 모아 문수사에서 합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탐지한 일제는 법성포주재소, 영광분파소, 고창 및 무장 분파소 등이 연합하여 이들을 공격하였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한밤중에 기습을 당했으나 김준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일제의 연합부대를 물리쳤다. 문수사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준은 이후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였다. 당시 이들은 장성 고창 영광 함평 나주 등지에서 대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침략기구인 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일본인 농장, 일진회원 등 닥치는 대로 공격했던 것이다.
1907년 11월 1일, 이들은 고창읍성을 점령했다가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서 장성 백양사로 퇴각하였다. 기삼연과 김준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면서 새로운 전략 수립에 고심하였다. 이들은 대규모 의진의 기동성 문제와 정면 공격의 무모함을 지양하기 위해 의진을 나누어 유격전술로 전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기삼연은 장성 순창을 중심으로, 김준은 영광 나주 함평 무안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의진의 전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얼마후 기삼연은 담양 금성산성에서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아 6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그는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 은신중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 불법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 무렵 조경환은 김준 의병장과 산장에서 만나 시사를 상론한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감옥에 수일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다 . 아마도 그가 개설한 서당에서 만나 시국 현안을 논의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조경환은 김준 의병장과 의기투합하여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그리하여 1907년 음력 12월 중순 전남 함평군 해보면 배암동에서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함평읍,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월암산 등 수많은 전투를 주도하였다. 때로는 여러 의진이 합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연합의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눈부신 항일투쟁으로 일제조차 신출귀몰하다고 평가했던 김준 의병장을 잃은 조장군은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김준 의병장의 뒤를 이어 강력한 의진을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다소 느슨해지자, 그는 의병장을 잃고 떠도는 의병을 불러 모아 전열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이때 전북에서 이석용 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이 광주에 왔다. 전수용은 이석용 의병장과 의논한 끝에 전남지역에서 종횡무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김준 의진에 합류하기 위해 남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김준 의병장이 어등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는 크게 낙심하고 통탄했으나, 김준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을 만나 다시 한줄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용진에서 모여 제휴하기로 결정하고서 의병의 전력 강화에 힘쓴 끝에 200여 명의 의진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전열을 정비한 조경환과 전수용은 유격전술에 적합한 형태로 부대를 운용하기 위해 두 개의 의진으로 편성하였다. 이 때가 1908년 음력 7월경이었고, 전수용은 이무렵부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산이라 자호함으로써 전해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1963년 정부는 조경환 의병장의 공을 기려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화순군 북면 안심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손에 의해 1973. 10. 16(금) 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부인 이동임과 함께 이장하였다,
한편 광주광역시는 북구 오치동에서 북구 문흥동까지의 2,064m를 조경환 의병장의 호를 따 대천로로 명명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현 독립운동 생애와 활동 (35) | 2024.11.25 |
---|---|
조만식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41) | 2024.11.24 |
일제강점기 유학생과 학우회 (45) | 2024.11.23 |
반두복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42) | 2024.11.23 |
이효정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81) | 2024.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