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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유도발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by kjk쌤 202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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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발과 유신영은 부자관계로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의 10, 11세 후손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힘써 마땅히 삼갈지어다. 충효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를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유성룡 이후 풍산 유씨 가문은 충효를 가업으로 삼았다. 유성룡의 장손 유원지는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충효청백만 있을 뿐이다 라고 하여 할아버지 유성룡의 유지를 전했다.

 

또 졸하면 분수에 편안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되어 재주와 임기응변 같은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성하면 자연스럽게 실제에 힘쓰게 되어 꾸밈에 힘쓰거나 스스로 속이는 병에 빠지지 않게 된다 고 하면서 졸성을 가학으로 제시하였다. 졸성은 사전적 의미로 보잘 것 없는 정성 이라는 뜻인데, 유원지가 제시한 졸성의 뜻은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유도발 집안은 유성룡의 아들 유단 이후 자손이 없어 줄곧 양자로 이어졌다. 유단은 형제 유진의 둘째 아들 유백지를 양자로 삼았고, 그 후 유후승, 유성흠, 유익, 유필조, 유진휘 등 선대가 양자로 대를 이었다. 그만큼 그는 집안에서 매우 귀한 자손이었다. 큰아버지 유진황과 작은아버지 유진우 등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가문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다라고 하면서 유도발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유주목은 유심춘의 손자이자 유후조의 아들로 당대 영남지역에서 탁월한 학자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소모사 정윤우의 추천에 의해 의장으로 참전하고, 1872년에는의상육조소라는 상소를 통해 외세에 대비한 대책을 제시하는 등 척사적 성향을 보였다.

 

1910829일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유도발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해 9월 일제의 강점 소식을 듣고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한다. 더욱이 팔촌동생 유도필로부터 전국 각지에서 전패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패는 각 지방 관청에서 봉안하던 전자가 새겨진 나무패로, 국왕의 탄생일이나 특정 날짜에 의식을 치를 때 관리들이 예를 올렸던 대상이다. 곧 국가를 상징한다. 전패의 훼철은 성리학에 철저했던 유도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변고였다. 이는 나라의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곧 망국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도발은 이미 자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는 유도필에게 내 나이 80세에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게 되었으니 그 욕됨이 심하다. 하물며 나라의 신하된 후손임에 있어서랴 라고 하면서 통탄했다. 유성룡의 후손으로서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죽음으로써 경술국치에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101127일 단식 17일째, 오후 5~7시 경 유도발은 자식들에게 향을 가져오라고 했다. 향탕은 향을 넣어 끓인 물로 시신을 씻을 때 사용한다. ‘향탕을 가져오라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은 차마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러한 망극한 상황을 당해서는 순응하여 따를 뿐이니 속히 향탕을 가져오라 고 다그쳤다.

 

결국 유도발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대한의 선비로서의 삶이 죽음을 통해 영원히 계속되는 순간이었다. 유도발이 순절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애도하였고, 혹 하루 이틀간 단식하며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은 제문을 지어 그의 죽음은 의를 실천한 것이고, 모든 사람이 선생의 마음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유도발의 죽음을 의 실천이자 독립을 향해 가는 시발점으로 평가하였다.

 

가문의 가업과 가학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실천해 온 유도발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죽음으로써 충효졸성의 가치를 완성했다. 그 죽음은 일제의 강제병합에 대한 강력한 항거이자, 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우는 울림이었다.

 

그는 해방 후 전라북도 진안군에 위치한 대한 이산묘에 배향되어 항일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이산묘는 유림들이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1925년 건립한 사우로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송병선, 최익현,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 34인이 배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도발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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