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전개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였으며, 박렬과 같이 흑우회에 가입하였다. 1924년 8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9월 무정부주의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경·상해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포들을 설득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파하고 무정부주의 실천을 위해 행동 기관지 흑우 제2호를 발간하여 이를 널리 홍보하였다.
이어 1928년까지 흑풍회와 흑우연맹을 결사하면서 무정부주의 사회실현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29년 4월 일본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이른바 폭력행위사건으로 3개월 간 옥살이를 하였다.
1931년 6월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11월에 흑색공포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더불어 의열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2년 8월에 귀국하여, 11월에 톈진 일본영사관과 일본 병사 등 주요 일제기관을 폭파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듬해인 1933년 3월 1일 항일선전문을 등사하여 상해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동포에게 배포, 선전하였다.
이때 흑색공포단 단원과 회합하고 주중일본공사가 장개석의 만주포기 및 열하지방 대일부저항주의를 책동하는 음모문제를 폭로, 저지시키기 위해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3월 17일 이강훈·백정기 등과 같이 아리요시 주중일본공사를 폭살시킬 목적으로 중국 상해공동조계 우창로에 있는 육삼정 부근의 중국요리점 송강춘에서 통과를 기다리던 중 일본첩자의 밀고로 모두 잡혔다.
1933년 11월 일본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2심에서 백정기와 같이 무기징역, 이강훈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일본 소재 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년 징역 20년으로 변경되어 12년 6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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