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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김옥균의 생애와 활동

by kjk쌤 2024.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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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중간고사가 끝나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서 전시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를 관람했다. 한성순보, 박영효, 천도교 등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본 이름들이 많아서 더 관심 있게 볼 수 있었다.

 

그 중 김옥균이 일본인 후원자 스나가 하지메에게 보낸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도가 통하면 하늘과 땅이 같은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글씨의 해설 오디오에서는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간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했다. 떵떵거리며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교과서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에 대한 설명인 일본으로 망명 이후 그는 편치만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김옥균의 일본 망명 후 삶이 궁금해졌다.

 

스나가 하지메라는 사람이 왜 그의 후원자가 되었을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마침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도 을사늑약을 체결한 사람들은 을사오적이라고 불리며 극명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갑오개혁에 대해서는 딱히 그런 언급이 없어 갑오개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궁금했었다.

 

그래서 김옥균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7세에 당숙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강릉의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박규수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고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1872년에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개화파는 급진과 온건 개화파로 분화되었고 김옥균이 속해있던 급진 개화파는 서양의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 수용하자는 입장이었다. 청이 청불전쟁으로 군대의 절반을 철수시키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는 청에 우호적이었던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민씨 정권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하고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의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청군의 진압으로 정변은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지만 오가사와라섬에 귀양을 가고 북해도로 추방되는 등 박해를 받다가 1894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2. 본론

1) 개화파로서의 정치적 행보

1851223일에 조선 충청도 회덕군에서 김병태와 부인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에 김병기의 양자가 되었다. 1861년 김병기가 강릉부사에 임명되자 16세까지 강릉 송담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다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1870년 당시 홍문관 제학으로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됐다.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한의원이자 개화 사상가인 유대치, 수도승으로 부산 왜인촌을 자주 드나들던 이동인, 역관 수석으로 청나라행 사신단에 있었던 오경석 등을 만났다. 또한 일본에서 들어온 지구본, 만화경, 망원경 등의 신기한 물건을 접하고 청나라에서 온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구 지리와 정세, 문물을 소개한 서적들도 탐독했다.

 

그는 박영효, 여흥 민씨의 총아 민영익, 유길준, 박정양, 서재필 등과 함께 봉은사에 자주 몰려나가 최신 일본 서적들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토론했다. 그러던 중 1872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개화당의 형성에 더욱 집중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김옥균은 1881년 음력 12월에 일본의 근대화를 관찰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고 기화근사를 편찬하였다.

 

2) 임오군란 이후와 갑신정변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여러 요직을 거치며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듯이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공업의 건설, 선진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인구 조사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교설립, 신교육 실시,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이러한 주장을 국가 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나 임오군란 이후 심해진 청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이 청으로부터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개화파와 개화정책을 탄압하였다. 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씨친청세력도 개화파을 박해하였다.

 

18829월 김옥균은 두번째로 일본에 건너갔다. 수신사 일행의 귀국 후에도 서광범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조선에서 학생들을 선발해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3월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치도약론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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