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3・5 만세시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을 다니던 김병수로부터 출발하였다. 1919년 2월 26일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으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일으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달받았다.
김병수는 그날로 기차에 몸을 싣고 모교인 영명학교로 향하였다. 평소에 민족의식이 강했던 교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군산에 도착한 김병수는 곧바로 스승인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를 통해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들을 소개받았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이두열과 전북 옥구 출신인 고석주도 이 자리에 함께하였다. 이두열은 영명학교 교사였고, 고석주는 구암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였다. 두 사람은 같은 교사였던 박연세, 김수영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할 필요성을 느낀 이두열과 고석주는 시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은 같은 교회 소속의 예수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었다.
이준명, 양기준, 유한종, 양성도, 안경태, 임병률, 이진규, 김준실, 송기주, 이재근 등이 이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교회 신자들이었다. 김성은, 유희순, 임종우 등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마지막으로 교사였던 그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기르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영명학교의 학생이었던 양기철, 전세종,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 홍천경, 고준상,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이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이두열과 고석주,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이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영명학교 안에서 학교의 등사판을 이용해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였다.
3월 6일을 향하여 차근차근 준비되던 시위 계획은 불행히도 거사를 하루 앞두고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영명학교에서 만세 시위가 준비된다는 첩보를 들은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준비하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된 것이다. 일제 경찰은 이두열과 고석주를 비롯한 교사들과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교사와 친구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과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면서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거리에 있던 민중들도 이에 화답하면서 만세 시위는 더욱 커졌다. 민중들은 군산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이리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체포된 군중들에게는 가혹한 고문과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포된 이두열은 1919년 4월 30일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고석주도 같은 재판에서 같은 죄목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고석주는 출옥한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투신했고, 충남 서천에 교회를 개척해 계몽운동과 농촌운동에 힘썼다.
출처: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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