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입시(국어 세특)

최남선의 생애와 활동

kjk쌤 2024. 9. 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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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생애와 활동

 

1. 서론

일제강점기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일본에 대항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을 노래하는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독립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다시 되새기며 현재의 평화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꼈다. 그런데 근대역사인물 탐구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정보를 찾아보던 도중에 친일을 애국으로 착각한 최남선이라는 문구를 보게 되었다. 최남선은 3·1운동 이후 변절했다는,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기미독립선언서로부터 받은 깊은 감명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대 권력자였던 일본에게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멀고 먼 독립이었음을 알기 때문에 최남선의 행보가 시대상을 반영한 사실주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급생 친구와 스치듯이 나눈 대화에서 나라면 독립운동을 못했을 것 같다.

 

아니, 안 했을 것 같다.’라는 말이 쉽게 나왔던 경험도 친일의 행동이 사실주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한몫 했다. 그러나 분명 친일의 행동이 민족을 반하는 행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에 앞서 느꼈던 배신감과 시대상에 따른 인물의 행보에 이해의 감정이 나에게 공존해 있었다. 나아가 배신감과 이해감, 두 감정의 혼재가 타당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최남선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고 그가 주장한대로 친일행동이 민족의 입장에서 타당하다 말할 수 있는지 판단해보고자 최남선을 탐구 인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잠깐 인물의 약력을 언급해보자면, 최남선은 지식인으로서 3·1운동 이전까지 잡지를 발행하여 지식을 민족에게 보급하는 민족계몽 활동을 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동조하고 지배를 위한 정책에 참여하며 친일 활동을 이어나갔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제대로 된 처벌 없이 풀려났다.

 

2. 본론

1) 성장과 일본 유학

육당 최남선은 조선시대에 예조에 속하여 천문, 지리, 역수, 기후관측 등을 담당하던 관상감의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운영했던 아버지 최헌구와 어머니 진주 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890426). 대대로 명문이었던 가문인데다가 아버지가 하급관리였기 때문에 최남선은 강원도 철원과 경상남도 창원에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스스로 한글을 독학으로 깨우쳐 1901(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글을 쓰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워 1904년에 대한제국의 국비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6년에 다시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학부 지리 역사과에 입학하지만 대학 재학 중 동맹 휴학 사건으로 제적당한 후 다시 복학했다. 이어 일본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광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2) 항일 운동과 잡지 창단

1907년 매년 열리는 와세다 대학 정치과 학생들의 모의국회 행사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 황제를 일본의 화족으로 대우하는 것을 의제로 제안했다. 이 제안은 한국인 유학생들의 반발을 일으켜 제안을 한 일본인의 퇴학처분과 학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에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한국인 학생들은 전원 자퇴를 결의하고 동맹 퇴학원을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의 투쟁을 전개했다.

 

최남선은 역시 항의 투쟁에 동참하여 한국인 학생들의 총동맹 휴학을 주도하다가 와세다 대학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 유학의 길에서 연을 맺었던 이광수와 함께 소년회를 결성하고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에 가입했다. 와세다 대학에 퇴학당한 뒤 귀국하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통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이광수와 함께 1908년 잡지 소년지를 창간한다. 최남선은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고, 이광수는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대중의 인기를 모았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발행한 잡지 소년지는 근대적 종합잡지의 대표적인 잡지이며 어린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 중 초기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1909, 도산 안창호선생과 함께 청년 학우회를 창단하여 노래를 짓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청소년 지도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의 고서인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발간하는 등 민족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국어인 일본어가 아닌 고유의 민족어인 조선어 사전 편찬 계획을 세우고 구상했다. 19193·1운동 때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그의 친구 이광수 역시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최남선은 일본에게 체포되어 28개월간 복역했다. 교도소 수감 전 이광수와 최남선은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3) 언론활동과 친일행보

최남선은 복역한 뒤 19211019일에 총독부의 도움으로 가석방 되었다. 총독부는 조선은행의 총재 미노베에게 잡지 동명 발행 자금을 지원하도록 주선했다고 한다. 가석방 후 1922년 동명사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을 창간했으며 이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듭된 경제적 위기와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인한 어려움은 최남선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광수 역시 점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며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고 한국인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등 친일파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1927년 총독부가 최남선에게 주거지와 연구비용을 지원을 약속하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일본이 자신들의 우위성을 부각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 왜곡하고자 설립된 한국사 연구기관이다. 조선사편수회에는 이완용, 권중현 등의 친일파가 다수 참여했다.

 

이 사건으로 절친한 사이였던 한용운은 그와 결별을 선언했다. 193312월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19352월 조선총독부 임시역사교과용도사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 ‘조선사편수회를 시작으로 조선 총독부를 비롯한 친일기관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선문화의 일본화라는 내선일체 사상을 강조, 중일전쟁 당시 친일논설을 언론에 개재,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학도병을 권유하는 글을 싣는 등 본격적인 친일적 행보를 걷게 된다.

 

 

4) 광복 이후의 활동과 최후

일본이 항복하자 친일파 최남선은 우이동에 은거하고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한다. 그는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가 친일파로 변절했다고 지적을 받으며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사람들로 하여금 비난을 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49년 이승만 정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에 최남선은 끊임없이 자신은 민족과 연구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일본에 협력했다고 주장했으며 특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자열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한편, 반민특위는 친일파 출신 정치인과 미군의 안일한 대처 등의 정치적 요소로 친일파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최남선 역시 겨우 한 달 만에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사실상 처벌되지 않은 채로 석방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으며 휴전 이후에는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는 등 신문과 잡지사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연관된 기고활동을 이어나갔다. 19571010<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과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결론

최남선이 당시에 조선의 3대 천재 중 한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에게 신망 받는 인물이었으며, 수많은 신문사에 기고글을 올렸다는 점을 근거로 보아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 잡지는 초기에 근대지식을 창출하고 확산하여 민족의 지식을 개편하고 국민을 형성하려는데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최남선이 창단한 잡지 소년 역시 한국 근대 잡지의 대표적 사례이자 선두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잡지가 나오기 이전에는 지식이 특정 부유층을 대상으로 보급되었음을 고려했을 때, 보다 대중적 수단인 잡지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지식을 접할 수 있는 지식의 보편화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증하면 최남선은 일개 문학인이 아니라 당대 민족을 대표하는 지식인의 지위임이 확인 되어 그의 친일 행위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일본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한국사를 왜곡하여 교육하려한 시도로 결성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기 때문에 한국의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수치스러운 반민족 행위자라는 것에 항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초기 잡지를 발간할 당시에는 민족의 계몽을 위해 힘쓰고 실제로 식민지 배경 아래에서 분열되어 가는 사람들을 민족으로 형성하는데 역할을 했으나 가석방 이후에는 친일이라는 민족 분열하는 활동을 했다는 말만 무성하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 자료

오마이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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