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당시 활동하던 저항 시인이다. 현대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생애 유일한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등 익히 알고 있는 작품들이 윤동주 시인의 시이다.
그는 한국 시인이었음에도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그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윤동주의 시에는 그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이 많아 그의 내면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더불어 그는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당대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시어를 많이 사용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기록을 바탕으로 현대에는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나 책이 많이 발간되었다.
그의 시에는 민족의식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 있어 중고등학교에서 교육용으로 가장 많이 선정되기도 한다. 그의 시는 시대적 배경이 녹아있는 독립운동이 자극제이자 소극적인 개인들의 일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윤동주 시인의 전반적인 생애와 그가 추구했던 가치, 일제의 탄압이 그에게 미쳤던 영향을 탐구하고 앞으로 우리가 올바른 민족의식을 기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한다. 또 역사를 사랑하는 학생으로서 개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본론
일제 강점기와 당대 국문학
1910년, 강압적인 한일합병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전기 시설이나 다양한 근대 문물과 기술의 도입 등 조선은 일제에 의해 빠르게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넘어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발전이 아닌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일제는 조선을 근대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산림을 파괴하고 문화재들을 과도하게 보수하고 수정하는 등 조선의 땅에 일제의 잔재를 심어두었다. 강압적인 무력 통치에 저항하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일본은 통치 방식을 문화 통치로 전환했다. 문화 통치는 말 그대로 문화를 뿌리부터 바꾸고자 하는 방식이었다.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는 창씨 개명을 강요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조선인들을 회유하여 친일파를 확산시켜 내부분열을 촉진했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일본은 군국주의를 표방하며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한다. 많은 조선인이 강제로 징용되고, 일본군 성노예인 위안부도 이 당시에 생겨났다. 전쟁 중 의약품 개발을 위한 막대한 생체 실험도 조선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강압적이고 잔혹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지식인들은 글로써 참담한 심정과 일제에 대한 반항심을 드러냈다.
이렇게 조선의 근대화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바탕으로 조선의 문학은 한문학에서 국문학으로 전환되며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많은 지식인은 저항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돌아섰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지위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지식인을 비롯한 정치인 또한 변심하여 조선을 일제에 넘기는데에 가담했으며, 최남선, 이광수와 같은 근대 문학의 대표 주자들도 친일 성향을 띄게 되었다. 또한, 3·1운동의 좌절로 인한 허무와 패배 의식의 영향으로 1910년대의 문학은 대체로 우울하고 패배적인 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두움 속에서도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이태준, 김사량 등 저항 시인들은 끝까지 일제에 대한 탄압을 국문학으로 맞서고자 했다. 이육사, 한용운 시인처럼 실제로 독립운동을 하며 시를 쓴 작가도 있는 한편, 윤동주 시인처럼 글로써 독립 의식을 담아낸 시인도 있다. 소설이나 시, 기고글을 통해 국문학은 발전해갔으며, 특히 문화 통치 당시 우리말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어 한글 신문 창간, 조선어학회 설립 등 다양한 국어 지킴 노력이 이어졌다. 그 당시의 국문학은 현재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들이 많으며, 독립의 의지를 담은 시들은 후손들에게 일제강점기 당시의 잔혹함과 깊은 애국심, 국력 강화의 중요성 등 잊지 말아야 할 점들을 시사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윤동주의 일생
윤동주는 1917년에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북간도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독립 군사기지와 비밀기지, 학교가 설립된 곳에서 그는 일본의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곳인 기독교계 학교에 다니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의 유년기 생활은 후에 윤동주의 시에서 기독교적 성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후 18세가 되던 해,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학교로 전학을 온다.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조선 학생을 심히 차별하고 학대하는 등 잔혹한 일제의 탄압을 몸으로 느낀 윤동주는 퇴학을 결심하고 이후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한다. 15세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시를 썼던 윤동주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진학을 희망한다. 명석한 윤동주가 의대나 법대에 가기를 바랐던 그의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합격하여 국문학과 민족 사상을 학습한다.
현대의 연세대학교인 당시의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적 정서를 고취하는 학교로서,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가르치고 조선의 독립 의식을 일깨웠으며 또한 국학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윤동주는 졸업 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교토로 유학을 떠난다. 영문학을 전공하며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때, 1943년 교토에서 그들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실제로 윤동주는 송몽규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유학생들을 모아 소규모 독립운동을 기획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안타깝게도 학생들이 체포되어 지도부가 사라지며 그들의 야심찬 독립 운동 계획은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장하는 송몽규는 윤동주와 달리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송몽규는 어린 시절부터 조선에서도 여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학업 정진에도 힘쓰며 독립운동가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춘 유망주로 불리던 학생이었다. 그는 유학 생활 초반에도 일본 땅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민족 계몽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제의 눈엣가시였던 젊은 독립운동가 송몽규와 늘상 함께한 윤동주 또한 그와 함께 수감되었다.
일각에서는 윤동주가 쓴 시의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윤동주가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동주는 수감 생활 중 알 수 없는 주사를 계속 맞았다. 결국, 그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1945년 12월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사망했다. 그는 일생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실시한 적은 없다. 사촌이자 절친이자 그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송몽규는 적극적으로 몸으로 일제에 맞섰지만, 윤동주를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 소극적인 자신을 반성하고 부끄러워 하는 자아 성찰이 저항적인 시를 쓰도록 하였다.
윤동주의 민족사상과 그의 시
윤동주는 20세부터 약 10년간 청년기의 정신적 방황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독, 자아 성찰 등 내면의 자아를 끊임없이 반성하였고, 조국을 잃은 슬픔과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반항하는 저항심 등을 그의 시에 녹여내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당시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자신의 내면적 모습과 대조하는 등 독립의 염원을 담은 시를 많이 써냈다.
윤동주의 시는 대게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아의 의지를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창씨개명과 일본으로의 유학 등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역사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적극적이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당시 민중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정서 또한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실존주의적 사상도 볼 수 있다. 암울한 시대 현실 속에서 자신이 갖는 의미와 독립을 향한 민족적인 의식이 그를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도록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에서 볼 수 있듯이,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드러낸다. 단순히 운명에 순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자아 달성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뒤 발간되었다
.암울한 시대 현실 속에서 자신이 갖는 의미와 독립을 향한 민족적인 의식이 그를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도록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에서 볼 수 있듯이,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드러낸다. 단순히 운명에 순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자아 달성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뒤 발간되었다. 광복 후 혼란스러운 정치적, 외교적 상황에서 개인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윤동주의 시는 앞으로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자아 성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당시 상황의 암울함을 드러냄으로써 역사적 아픔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결론
보통 일제 강점기에 쓰인 저항시들은 굵고 강한 이미지를 활용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드러낸다. 윤동주와 같이 소극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로 글을 썼던 문학인은 드물다. 윤동주의 시에는 그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이 많아 그의 내면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윤동주가 얼마나 순수한 인물이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그 스스로 적극적이지 못한 나약한 존재라며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결국 그 좌절감을 뛰어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이상에 다다르고자 했던 노력하는 인물형이다.
윤동주의 끊임없는 자아 성찰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반성의 여지를 준다. 덕분에 윤동주는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 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도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순수한 문체는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역사의식을 깨닫게 하고, 학문적 연구의 가치가 있는 시를 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당시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자신의 내면적 모습과 대조하는 등 독립의 염원을 담은 시를 많이 써냈다.
윤동주의 시는 대게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아의 의지를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창씨개명과 일본으로의 유학 등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역사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적극적이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당시 민중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정서 또한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그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조선의 수많은 윤동주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주었다. 그의 시는 시대적 배경이 녹아있는 독립운동이 자극제이자 소극적인 개인들의 일기가 되었다. 이렇듯 비록 적극적, 행동적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지 못한다면, 끝없는 성찰을 통해 올바른 이상향을 추구해나가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윤동주 시인을 보고 느낀 점이다.
비록 지금은 학생의 신분에 있지만, 앞으로 나는 사회에 나가서 그 어떠한 것이든 부당하고 옳지 않은 일을 보고 듣게 될것이다. 그럴 때마다 항상 스스로를 반성하며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삶에 있어서 부끄러움 없이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옳은 것을 좇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공부하고 바로잡는 일을 하고자 한다. 윤동주 시인을 나의 롤모델로 삼은 이유는 이것에 있다.
그처럼 훌륭한 시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반성하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여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을 본받고 싶다. 이것는 나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젊은 층에게도 시사하는 바이다.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루고자 할 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 우리에게 남긴 정신일 것이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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