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3대왕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 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때 원천석 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38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8년 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을 요청하는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에 다녀왔다.
1392년 3월에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기화로 정몽주는 간관 김진양 등이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정안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강비,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하자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 모만 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요동 정벌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정도전과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1399년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가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하였다. 1400년 방간과 지중추부사 박포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였다.
1404년에는 응양위를 설치
태종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즉위한 만큼 군사에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로 편입시켰다. 의관 자제 중 무예에 뛰어난 자를 뽑아 별시위로 편성하였다.
1404년에는 응양위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 을 내금위로 개편하면서 가장 신임하는 인물을 왕의 의지로써 등용하였다. 1409년 내시위를 설치했고, 10사 중 9사를 시위사로 개편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하였다.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를 설치해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 로 개칭하였다. 그 뒤 1412년에 의흥부 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맡게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409년 11도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였다. 1415년 경까지 해안을 중심으로 영진군, 수성군을 정비하였다. 1410년 경부터는 군역에서 제외된 향리·공사노비·교생 등으로 잡색군을 조직해 유사시에 내륙을 지키게 하였다.
수군은 시위패의 일부를 수군으로 충당해 강화하였다.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속선을 10척씩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였다. 1410년부터 1412년까지 병선 200여 척을 새로 만들었다. 1413년부터 1415년까지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배 밑바닥에 석회를 바르는 축선법과 배 밑바닥을 연기로 그을리는 연훈법을 채택해 벌레의 피해를 막도록 하였다.
사법, 경찰과 관련해 1402년에 고려 말 이래의 순군만호부를 순위부로 개칭하였다. 1403년에는 순위부를 의용순금사로 개편해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1418년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군권에 참여해 심정, 박습의 죄를 다스렸다. 그리고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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