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1대왕
이성계는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박의를 잡아 죽였다.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정월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 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 을 받들고, 원병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왔다. 이에 최영 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1377년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 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했다. 이어서 안변책을 건의했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
이듬 해 함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대파했다.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이 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 염흥방을 주살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했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 칭하고 의장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했다. 1393년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했다. 곧이어 방석, 방번 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해 방과로 결정했다.
태조는 방석, 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자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00년에 방원이 세제로 책립되었다. 곧이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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