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4대왕
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효령,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의 명분을 주어 그를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이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해 영향을 주었다. 태종은 1414년 육조직계제를 실시해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하였다.
최초의 공중시계였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완성되었다.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 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 학문, 철학, 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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