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2대왕
1388년에 순군부만호로서 도만호 왕안덕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 의 옥사를 국문하였다. 1389년 7월 절제사 유만수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 여절익위공신 에 책록되고, 밀직부사에 올랐다. 그 해 6월 자혜윤으로서 지밀직사사 윤사덕과 함께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 삼사우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 영안군 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되고, 이듬 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 개수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되었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 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되었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3월에 개경으로 천도했고, 집현전을 설치했다. 그해 8월에는 분경금지법을 제정하여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방원을 세제로 책봉했다. 그해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 분리체제를 이룩했다.
그 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 권근과 문하부좌산기상시 김약채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그 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을 편찬하였다. 11월에는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하였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해 노비 변정을 기도하였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으로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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