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입시(인문계열 자료실)

대독립당 촉성회 운동

by kjk쌤 2024. 12. 27.
반응형

대한민국 임시정부

반응형

31운동의 열기를 흡수하며 차분하게 독립운동의 진로를 새롭게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등장도 새로운 진로 모색이 낳은 대표적의 결과였다하지만 점차 뜨거웠던 열기가 식어 가는 가운데 1921년경에 이르며 많은 이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임시정부에 대해 여러 목소리가 나왔다.

그중 하나가 임시정부가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 같이 모여 논의하자는 목소리였다. 1923 1월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들었다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

대독립당 결성운동

대독립당 조직 광동촉성회의 결성을 알리는 선언에 확인할 수 있다광동촉성회는 독립운동의 통일과 통일적 당 조직의 유일한 방법은 먼저 통일적 당 조직의 방법에 대한 촉성운동을 각 지역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촉성회를 조직하여 각지에 산재한 각 단체원과 각 개인을 일정한 목표 아래 결합하여 잘못된 견해를 근절하고 민족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론 아래 집중하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항일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고자 개별 가입을 원칙으로 각 지역에 결성된 촉성회가 연합하여 정당 형태의 통일조직인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총지도기관을 결성한다는 구상이었다달리 말하면 광동촉성회는 특정 단대독립당을 결성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광동촉성회는 각지의 촉성회에 개별 가입한 사람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목표를 합의하고 이론을 일치시키며 대독립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동촉성회가 지향한 독립당은 개인본위를 원칙으로 조직원을 모으는 과정에서 통일된 이론과 책략을 확립하는 중앙집권 조직이었다단체간 연합체가 아니었다실제 광동촉성회는 이를 위해 독립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키자고 결의하였다.

더대독립당 결성운동

중국정세가 1927년 들어 급변해 가기 시작하였다. 4월에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반공쿠데타를 일으켰다이를 계기로 국민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에 대결이 더욱 격화하는 데다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의 적대적 대결도 날카롭고 강력해져 갔다

이처럼 대독립당 촉성운동은 1920년대 중후반 관내 지역 독립운동의 화두였다운동공간과 이념 및 단체를 불문하고 중국지역에서 항일에 동조하는 모든 희망을 모아 민족혁명을 지도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강경선과 박건병 지사는 베이징에서배천택 지사는 상하이에서 대독립당 촉성운동에 적극 동참하며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록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계가 결과적으로 좌우로 나뉘었지만 민족주의운동 계열은 대독립당 촉성운동 과정에서 자신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할 계기를 마련하였다안창호는 이때 대공주의를 제창했고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이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그 흐름을 반영한 첫 번째 결정물이 1930년의 상하이 한국독립당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