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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국어 자료실)

윤동주의 생애와 활동

by kjk쌤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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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나의 진로는 영화 수입/배급 이다. 어느 날, 2016년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보게 되었다. 나는 원래 한국 영화는 잘 보지 않는데, 이준익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해서 보게 되었다. <동주>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형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일대기를 구란 작품이다.

잔잔하게 진행되는 흑백 영화를 숨죽여 보았고, 중심인물인 윤동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그의 시 글귀들을 적어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 국어 시간에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배우게 되었고, 오랜만에 보는 그의 문장들이 아름다워, 시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그를 역사 보고서의 인물로 선정했다.

윤동주는 교과서나 모의고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조선의 시인으로 이육사와 한용운과 함께 조선의 저항시인으로 손꼽힌다. 대표작으로는 서시’,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등이 있다. 그는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고, 이를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또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앉아서 펜대만 굴리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그런 자신의 모습을 성찰했다. 따라서 윤동주의 작품들이 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반성과 성찰이다. 그는 1917년에 태어나 27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제에 대한 비판,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드러나는 작품들로 한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했다.

 

유년 시절 그리고 창씨 개명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이었다. 위로 누이 두 명이 연이어 요절한 뒤 태어난 아이라 집안사람들의 기대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가 자란 명동촌은 1910년부터 1920년대 만주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촌락이다. 명동촌은 한인의 문화교육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안중근 의사도 거사 전 이곳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문익환 목사도 명동촌 출신이다.

이 마을의 실질적인 리더는 김약연 목사로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독립운동가 삼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5, 숭실학교로 건너왔는데, 일제가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로 독립운동가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윤동주는 문과(문학과) 진학을 희망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의과 대학이나 법과 대학을 원해 심한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그의 고집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결국 질 수 밖에 없었다. 윤동주는 1938,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다.

 

창씨개명; 히라누마 도쥬

윤동주는 친일 행적이 없는 시인이다. 굳이 친일 행적으로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창씨개명 하나 정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 창씨개명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유학으로 유학을 가려면 도항증명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창씨개명은 필수였다. 일본 유학을 위해 그는 히라누마 도쥬로 창씨 개명을 하게 되었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그가 느낀 고통과 참담한 비애는 시 참회록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시집 원고에는 언제나 윤동주로 표기했고, 외국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윤동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 전에 벌써 참회록을 써놓고 자책과 반성을 했다.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으로 인해 1940년대쯤부터는 대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고 변절되었다. 창씨개명을 했지만 윤동주는 민족적 배반을 하지 않고 본인의 정체성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시를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했다. 그가 현대 문학사 최고 정점 중 하나가 되는 이유는 그의 대단한 시 세계도 되지만 변절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영원한 벗이자 라이벌, 송몽규

영화 <동주>의 이준익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이 동주뿐만 아니라 몽규도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사촌형으로 19179, 윤동주와 3개월 차이로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하였으며 일본 유학길도 같이 떠난 죽마고우였다. 윤동주의 시 이런 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윤동주는 왜 송몽규를 완고하던 형 이라고 표현했을까? <문익환 평전>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라고 저술한다.

실제 송몽규의 반일투쟁의식은 남달랐다. 그는 19살에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한 뒤, 김구 선생이 있는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송몽규는 군사 훈련을 열심히 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참여하기도 했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문익환은 자신보다 뛰어난 윤동주에 열등감을 느끼고, 윤동주는 송몽규에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목표로 삼은 교토제국대학의 문학부 사학과를 송몽규만 합격하기도 했다. 이를 보아 송몽규의 문학적 재능 또한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송몽규도 1942, 소무라 무게이로 창씨개명을 했다. 윤동주와 같은 이유로 일본 유학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이처럼 평생을 윤동주와 생과 사를 함께 한 송몽규는 윤동주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죽음, 그리고 남겨진 것

윤동주는 일본 유학 당시,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는 말)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의 핵심 인물로 체포되었고, 후쿠오카 감옥에 갇혔다. 송몽규도 같은 죄목으로 같은 감옥에 갇혔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각각 징역 2년 형과 26개월 형을 선고 받았지만, 19일 간격으로 나란히 옥사했다. 윤동주의 죽음에는 많은 의혹이 제기된다.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 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피 부족으로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와 송몽규가 실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는 추측이 가장 유력하다. 송몽규가 말한 바와 같이 송몽규와 윤동주가 주사를 맞아왔다는 것과 후쿠와 형무소의 연도별 사망자수가 매년 두 배씩 늘어났다는 것이 일본이 생체실험을 행했다는 실증을 가지게 한다.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주사한 액체는 다름 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이었다.

윤동주는 19452, 건강이 악화되어 27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가 사망한 후 19482,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임시로 발간되었고, 같은 해 3월 정식으로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1995, 그가 다녔던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느낀점

윤동주는 시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조선의 시인이었다. 윤동주 작품들의 주제의식들은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모의고사 국어영역에서 출제비율이 매우 높다. 2020학년도 수학능력평가시험에서도 그의 시 <바람이 불어>가 등장했다. 윤동주의 서시는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삶에 대해 고뇌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성찰하는 시인의 시를 읽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며 일제 강점기 당시 지식인의 고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로 나라를 위해 조용히 투쟁하는 윤동주의 모습에 감명 받았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가 항일 시인이었느냐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한글로 시를 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해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항상 일제 강점기 인물들을 공부할 때마다 내가 당대 사람이라면 나라를 위해 침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데, 자신만의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가 존경스럽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도 부당한 상황이 와도 시인처럼 직접적으로 목소리는 못 내더라도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나의 위치에서 저항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전자기기의 발달로 핸드폰, 태블릿 등으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는 세상이 왔지만 70년도 더 된 그의 시는 지금까지도 사랑받는다. 그 이유는 시가 윤동주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담긴 문장들로 이루어져서가 아닐까

참고자료: 국회도서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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