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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의 생애와 활동

kjk쌤 2024. 10. 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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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의 생애와 활동

 

서론

지난정부 6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국군 창설의 뿌리로 인정한다 고 한 발언 내용이 현재까지 언론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김원봉이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였다는 이유로, 자유 한국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는 이른 바 빨갱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사용하며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는 실태이다.

 

이처럼 보수 진영은 공로가 큰 독립 운동가들 중 자신들의 사상과 관념이 동일한 인물만을 선정하여, 정치적으로 우세할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고는 나머지 독립 운동가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만이 악순환 되다 보니, 현재까지 사상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광복에 기여한 공로가 큼에도 현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지 못한 인물이 다수이다.

 

그 중 한 명인 이회영 선생은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다복한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인본주의 사상을 잊지 않고 노비에게 존댓말을 쓰는 등 불평등한 사회를 혁파하고자 애쓴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재산을 독립 운동에 사용하는 등 그 기여한 바가 매우 혁신적이고 다양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반이 되는 임시 정부 수립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던 인물로 판단되지는 못하여 김구, 이승만에 비해 조명을 받은 적이 현재까지도 거의 없다. 결국 현대 매체를 조종하는 정치인 및 언론인들에 의해 세상에 자주 노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매체와 공인 발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이회영 선생의 업적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독립 운동가에 대한 우리 현대인들의 올바른 인식과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심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

 

2.본론

1) 경술국치 전의 국권 수호 운동

이회영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 피탈을 막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상동 교회 사람들과 특사 파견을 상의하고, 비밀리에 고종과의 면담을 추진하였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일본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 처지였고, 이를 간파한 이회영은 내시를 통해 고종에게 특사 파견 계획을 몰래 전달하였다. 얼마 후 이회영은 고종의 옥새만이 찍혀 있는 위임장을 받고 헤이그 특사에 대한 책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준은 이회영의 전송을 받으며 러시아로 떠났다.

 

이위종, 이상설과 만나 만국 평화 회의장 앞까지 도착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고종이 퇴위당하고 이준이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이회영은 헤이그 특사 지원 뿐 아니라 신민회 조직에도 앞장서서 참여했다.

 

이회영이 다니던 상동 교회에서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때 전덕기 목사와 이회영을 비롯한 청년회의 간부 몇 사람은 교회 지하실에서 따로 모여 비밀 조직을 운영하였다.

 

이 조직이 바탕이 되어 19074, 윤치호, 안창호, 신채호, 양기탁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비밀리에 창설한 것이 바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했고, 서점 겸 출판사인 태극 서관을 세워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도자기 회사를 세워 자금을 마련하는 등, 민족의 힘을 모으려고 노력하였다. 신민회는 국내 활동에만 국한하여 뜻을 둔 것이 아니었으며, 국외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훗날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립적으로 나라를 되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졌고, 신민회를 향한 감시 또한 강도가 높아져 결국 이회영을 포함한 신민회 회원들은 모두 국외의 지방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2) 무력 항일 투쟁의 기반을 마련한 신흥 강습소

이회영 일가는 급하게 전 재산을 처리하여 독립 자금을 쥔 채, 집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중국 지린성 류허현의 삼원보에 도착했다. 곧이어 안동의 명문가이자 큰 부자였던 이상룡 가족 역시 전 재산을 정리하고 삼원보에 오게 되었다.

 

이회영과 이상룡은 한인 동포들과 함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모여서 공부하는 주민 자치 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한 것이 그 바탕이 되었다. 경학사 내에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중요한 일은 300여명의 회원 모두가 모여서 의논할 수 있게끔 하였으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합심하여 독립 방안을 함께 모색하였다.

 

경학사의 첫 번째 사업이, 바로 항일 무장 투쟁의 발돋움이 되었던 무관 학교 설립이었다. 이회영과 이상룡이 중심이 되어 열었던 신흥 강습소 는 신민회의 신 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 자를 합쳐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독립군을 키우는 군사 학교였다. 실제로 학교의 본질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무장을 준비하기 위해 19195, 학교 이름을 신흥 무관 학교로 바꾸고 합니하로 옮겼다.

 

그 곳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으므로 군사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는 더 유리하였다. 18세에서 25세의 청년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는데, 학비와 숙식비가 모두 무료였고 그 비용은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과 이상룡이 거의 부담하였다.

 

학생들은 우리말과 역사, 지리 등을 공부하였고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08월에 일본의 간섭으로 문을 닫기까지 35백여 명의 독립군을 길러 냈으며, 졸업생은 대부분 독립군이 되어 일본과 투쟁하였다. 독립운동 역사에 빛나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의열단 활동, 한국 광복군 활동에 이르기까지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은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3)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아나키스트 활동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동생 이시영, 동지 이동녕 등과 다른 길을 택했다. 3.1 운동 이후 이동녕, 이시영, 김구, 안창호 등이 주축이 되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이회영은 정부를 세우면 권력투쟁 때문에 정부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며 반대했다.

 

그의 예견대로 임시정부는 계파 간의 알력과 갈등으로 인한 권력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회영은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신채호와 함께 양쪽 진영의 화합을 위해 임시정부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회영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의 영향을 받고 무정부주의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내부 갈등이 치열해지고 조직이 사분오열되자, 결국 임시정부와 결별했다.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한중일 아나키스트 연합단체인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활동했다. 무력 저항 조직인 흑색공포단을 만들어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회영의 아나키스트 활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1928년엔 아시아 각국 아나키스트들의 연합체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의 독립과 무정부주의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1931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중국 국민당을 상대로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이회영은 민족주의자이자 동시에 인본주의자였다. 스스로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하여 동등하게 대우했고, 독립을 이루되 만인이 평등하고 폭력적인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택한 무정부주의자의 삶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 염원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 만주행, 그의 순국길이 되다

이회영의 활동은 비교적 안전 지대였던 상하이 조계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193211,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행을 감행했다. 당시 만주는 이미 일본군에게 완전히 장악당한 뒤, 일본의 지휘를 받는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들어선 상태였다.

 

이회영은 만주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만주행을 선택했다. 만주 잠입의 또 다른 목표는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암살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을 짜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 잠입은 상하이에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연충렬과 이규서에 의해 다롄 경찰에 보고된 상태였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다롄행 여객선 4등 칸에 탔던 이회영은 다롄 수상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뤼순 감옥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던 중 6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으며, 일본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서둘러 화장하여 유족에게 유골만 내주었다. 조국의 독립과 장를 위해 싸웠던 이회영의 유골은 현재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3.결론

이회영은 중국의 대표적 문학가 루쉰, 러시아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예로셴코와 교류하는 등 아나키즘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아나키즘을 내걸고 조국독립과 민중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려 했으며, ··일 아나키스트 연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나키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렇지만 이회영은 숱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면서도 어떤 자리를 맡아본 일도, 자신을 내세우는 글도 남기지 않았다. 또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과 자리다툼에 대해 자유연합이론, 곧 하나의 이념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념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회영의 이러한 이념 공존 및 평등사상 덕분에, 당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갈등으로 분열될 수 있었던 임시 정부 및 그 외 독립 운동 활동이 어느 정도 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과거 독립 의군부와 같이 정치 제도 면에서 군주제를 채택하고 양반 중심의 독립 운동을 강조했던 이들과 달리, 이회영의 인본주의 및 아나키스트 사상은 모든 국민들이 존중받고 포용되며, 모든 민중들이 독립을 향해 기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광복 후 현재까지도, 이회영의 사상은 현대의 우리 한국인들에게 사상으로 인한 갈등을 일으키는 시민들에게 평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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