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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놀이문화(조선시대 이전)

kjk쌤 2024. 9. 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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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우리 놀이문화(조선시대 이전)

 

4. 씨름

시대: (조선이전)

씨름의 유래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투기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인류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무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은 맹수나 기타 종족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기의 힘과 체력으로 싸워서 이겨야만 했다. 그러므로 씨름은 원시대에는 자기보호를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놀이로 발전한다. 따라서 씨름은 그 기원을 원시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씨름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씨름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퉁화성 지안현 퉁거우의 환도성에서 발견된 각저총에 씨름하는 벽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이미 씨름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씨름은 널리 보급된다.

무예도보통지 에 보면 현종 때 무예청에서 각저를 무과시험 종목에 포함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씨름이 공식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씨름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군인의 무예로서보다 민속놀이로 발전해 왔다고 하겠다.


특히 우리나라의 전통씨름 방식을 보면 개인의 힘과 재능을 겨루는데 그치지 않고, 마을단위의 대동놀이적 성격도 갖고 있다. 즉 마을 단위의 대동놀이에서 벌어지는 씨름판은 씨름하는 사람들만의 겨루기가 아니라, 마을을 대표해서 개인의 명예와 마을의 명예를 함께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이기면 마을 전체가 이기는 것이고 지면 모두가 애통해했다.


근대에 와서 1912년 최초로 씨름대회가 서울 단성사극장에서 열렸고, 1915년에는 서울 광무대극장 주관으로 이틀 동안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 후로 연례행사로 극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렸으나, 어떤 조직적인 씨름대회라기보다 다분히 흥행성을 띤 대회였다. 그러다가 조선씨름협회가 생기고, 1927년 전국적인 씨름대회가 열리는 등 조직적인 모습을 띠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42년부터 열리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고 1947년 제7회 씨름대회가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1972년 씨름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인 스포츠로 변화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씨름방법

옛날에는 씨름의 대전방식이 맞붙기, 돌려붙기 등 오늘날 통용되는 방식과 구별되는 지워내기란 형식이 있었다. 지워내기는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상대편 선수와 싸워 나가는 대전방식이다. 즉 아이에서부터 어른으로, 하수에서 고수까지 순차적으로 경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연령과 체급, 그리고 실력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절된다. 이런 지워내기 형식 때문에 씨름을 대동놀이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한 줄을 허리에 매는 줄씨름이 있고, 줄을 허리에 매고 다리에 매는 씨름이 있다. 오늘날 씨름은 후자에 속한다.
허리에 매고 다리에 매는 씨름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으로 구분한다. 지역적으로 보면 왼씨름은 주로 함경, 황해, 평안, 강원, 충청도에서 했고, 오른씨름은 경기, 전라도 등지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이런 지역 특색이 1972년 씨름협회에 의해 '왼씨름'으로 통일되면서, 오늘날에는 왼씨름이 일반화되었다.

 

1) 샅바 고리 매는 법

씨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샅바이다. 샅바 고리를 먼저 맨 다음 다리에 걸어 샅바를 매게 되는데, 아래 와 같다.
긴 띠를 자기의 오른쪽 다리 대퇴부 상단둘레보다 5cm쯤 더 여유를 두고 한바퀴 돌린 후, 긴 띠를 위로 올려놓는다.
완성 후 짧은 띠가 8~10cm 정도 되도록 겹쳐서 접는다.
긴 띠를 밑에서 둥글게 만든 후, 안쪽 방향으로 잡아 뽑는다.
긴 띠를 위에서 아래로 둥글게 만든 후 끼워 넣고, 고리가 될 바깥쪽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샅바 고리가 만들어진다.


2) 샅바 매는 법

샅바 고리를 오른쪽 대퇴부 상단에 끼운다.
긴 띠를 등 뒤로 돌려 복부를 지나게 하여, 다리 샅바 고리에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끼운다.
긴 띠를 안쪽 샅바 고리와 긴 띠의 교차점 밑 부분을 경유하여 둥글게 한 후 위로 뽑아 올린다.
뽑아 올린 긴 띠를 둥글게 된 부위에 위에서 아래로 끼워 넣고, 당겨 샅바 길이가 17cm 이내로 풀어지지 않게 한다.
묶고 남은 띠는 복부쪽 샅바에 적당히 끼워 넣는다.


3) 샅바 잡는 요령
서로 마주보고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다.
자기의 오른쪽 어깨와 상대 오른쪽 어깨를 밀착시키고, 자기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허리샅바를 재봉선을 넘지 않게 잡는다.
자기 왼손으로 상대 오른쪽 다리샅바를 안쪽으로 끼워 밖으로 잡는다.


4) 준비자세
샅바를 잡고 일어서서 자기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자세로 다리를 적당히 벌린다.
무릎은 적당히 곧게 펴고, 서로 오른쪽 다리를 뒤로 물리지 못하게 하고 왼쪽 다리를 세워 서서히 일어난다.
서로 완전히 일어섰을 경우, 어깨는 서로 맞대고 등은 수평이 되게 한다.


5) 여러 가지 기술
씨름의 기술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손기술: 앞무릎치기, 앞무릎치기 되치기, 비켜 앞무릎치기, 연속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되치기, 오금당기기, 옆무릎치기, 손목잡아 짚기, 앞무릎짚어 오금당기기, 발목당기기, 오금당겨 안다리치기 등
발기술: 밧다리치기, 밧다리후리기, 안다리걸기, 안다리되치기, 안다리걸어 돌리기, 호미걸이, 덧걸이, 밧다리배지기 등
들기술: 들배지기, 엉덩배지기, 돌림배지기, 이중배지기, 들어 주저앉히기, 들어잡채기, 들어 앞무릎치기, 밀어치기
혼성기술: 잡채기, 차돌리기, 등쳐밧다리, 등쳐돌리기, 정면뒤집기, 팔걸어 뒤집기, 목말아 뒤집기 외
이중에 많이 사용하는 몇 가지만 자세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앞무릎치기: 상대방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거나 자기에게 의지하는 자세로 서 있을 때 실시한다.

뒷무릎치기: 상대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을 때 실시한다.

오금당기기: 상대의 오른쪽 다리가 자기의 앞으로 많이 나왔을 때 주로 공격하는 기술이다.

안다리걸기: 상대의 왼쪽 다리가 자기의 오른쪽 다리 가까이 있거나, 자세가 낮은 사람이 자세가 높은 상대에게 주로 사용하는 공격기술이다.

밧다리걸기: 상대의 오른쪽 다리가 자기의 오른쪽 다리나 몸통 가까이 있을 때 주로 사용하고 다리가 길고 키가 큰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공격기술이다.

호미걸이: 상대의 다리가 자기 앞쪽으로 많이 나와 있을 때나 상대의 중심이 상대의 뒤로 치우쳐 있을 때 사용한다.

들배지기: 상대방을 들어서 넘기는 기술로. 들기 기술의 기본동작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이 키가 작고 덩치가 작은 사람에게 주로 사용한다.

엉덩배지기: 상대를 들지 않고 넘기는 방법으로 주로 들 수가 없을 때 사용하는 기술이다.

돌림배지기: 상대를 들지 않고 넘기는 배지기 기술이다.

 

5. 제기차기

시대: (조선이전)

제기차기 유래

이 놀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고안된 축국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 황제 때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초기의 연구자들에 의해 정설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와 관련된 옛 문헌에서 축국을 찾아 제기차기와의 연관을 입증하였다.


축국은 제기차기와 전혀 다른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스포츠적인 구희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축국은 가죽주머니에 헝겊을 채워 넣고 양편에 대나무를 세워, 그 꼭대기에 그물을 얹어놓고 가죽주머니를 차서 위로 많이 올리는 편이 이기는 놀이 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왕운정의 축국도보에 의한 축국도와 정조 때 한교가 편술한 무예도보통지 권4 격구조에 축국을 설명하기를 옛날은 털을 묶어서 만들었고 오늘날은 가죽 태로써 만드는데, 그 속에 바람을 넣어 이를 찬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축국은 제기차기의 원형이 아니라 오늘날의 축구에 가까운 구기로 보여진다. 동국세시기 12월 내조의 기록은 축국과 제기를 혼동하게 한다. 젊은 사람들이 축국놀이를 한다. 그 공의 모양은 큰 탄환 만하며 공 위에는 꿩털을 꽂았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서서 차는데 계속 차다가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이 잘 차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이기구는 축국의 공과 흡사하고 놀이하는 방식은 제기차기이다. 이것은 제기차기에 대한 별다른 놀이이름이 없는 상황에서 축국이란 한자어를 차용하여 설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축국과 제기는 근본적으로 발로 찬다는 점 이외에는 전혀 다른 놀이라고 보여진다. 즉 축국은 오늘날 축구의 내용을 담고 있고, 제기차기는 요즘 아이들이 차는 제기차기와 같다. 어원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제기를 '적이'라고 하였는데, 음이 점차 와전되어 더기 저기 제기로 부르게 되었다.
어떤 놀이 연구가들은 제기차기의 연원을 뿌리가 달린 풀에서 찾고 있다. 즉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경이, 우산풀 등 뿌리가 많고 잎이 달린 풀을 뽑아 놀잇감으로 이용한 풀제기 에서 발전한 형태가 제기차기라는 것이다.

 

제기차기 방법

1) 제기 만들기

제기는 시대에 따라 만드는 방법이 달라져 왔다. 근래에 가장 많이 이용한 방법은, 구멍이 뚫린 옛날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쇠붙이에다 한지나 비단 따위로 싸서 7~8cm 정도의 술이 달리게 만든다. 또 종이 대신에 색실이나 털실로 술을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은 비닐로 된 제기를 많이 사용한다.
창호지제기: 질기고 얇은 창호지를 접어서 엽전을 싸고, 종이의 양끝을 엽전 구멍에 꿴다. 그 다음 종이를 잘게 찢어, 각 오리를 손으로 비벼서 술처럼 만든다.
천제기: 손바닥만한 천으로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크기의 쇳조각을 싸고, 중심에 닭털을 여러 개 꽂아 술을 만든다. 닭털이 빠지지 않게 실로 잘 동여맨다. 제기에 새 깃이나 색실오리, 창호지 등으로 술을 만드는 것은, 발로 차올린 제기가 똑바로 떨어져서 발에 잘 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닐제기: 적당한 크기의 비닐을 펴서 가운데에 동전을 넣고 둘둘 만다. 그리고 동전이 빠지지 않도록 머리 부분을 실이나 고무줄로 동여매고, 가위로 잘라 술을 만든다.


2) 놀이방법
제기 차는 다양한 방법

땅강아지: 한 발은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땅에 댔다 뗐다 하면서, 발 안쪽 모서리로 차는 방법으로 제기차기의 가장 기본이 된다.
헐렁이: 한 발은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땅에 닿지 않게 든 상태에서 까불어 찬다.
양발차기: 오른발 왼발 번갈아 가며 차는 방법으로, 양발 안쪽으로 차거나 한 발은 안쪽, 한 발은 바깥쪽으로 찬다.

귀 위까지 차기: 차올린 제기가 항상 귀 위까지 올라가야 한다. 만약 올라가지 못하면 죽게 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찬다.
물기: 차올린 제기를 입으로 받아서 물어야 한다.
머리에 얹기: 차올린 제기를 머리 위에 얹는 방법이다.

등에 얹기: 차올린 제기를 등으로 받아 올려놓아야 한다.
거리제기: 정해진 수까지 차고서 끝판에 발등으로 멀리 찬다.
뒤꿈치 차기: 한 발로는 발목 안쪽 모서리로 차고, 다른 발로는 뒤꿈치로 찬다.


놀이하기
제기차기의 겨루기는 둘 또는 여러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하는데, 정해진 수를 먼저 차는 쪽이 이기게 된다. 예를 들면 두 편으로 나누어 할 경우 100번을 먼저 찬 편이 이기기로 하고, 땅강아지, 헐렁이, 양발차기 3가지 기술을 사용하기로 규칙을 정한다. 갑 편의 순철이가 3가지 방법으로 15개를 차고 영수가 25개를 찼다면 합이 40개이기 때문에 을 편으로 순서가 넘어간다. 을 편에 병수가 같은 방법으로 20개를 차고 명재가 35개를 찼다면, 아직 100개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갑 편의 순서가 된다. 이렇게 번갈아 차서 먼저 100개에 도달하면 이기게 된다.
차는 방법은 10개가 넘어갈 때마다 입에 물기, 귀 위까지 올라가게 차기 등의 규칙을 정할 수도 있다.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종들이기를 한다. 그 방법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진 편이 제기를 던져주면 이긴 편 사람이 발로 차낸다. 만약 헛발질을 하거나 차낸 제기를 종들이는 사람이 받으면 종들이기가 끝난다. 또 이긴 사람이 제기를 손으로 잡고 있을 때 종들이는 사람이 그 사람을 치면 죽게 된다.
종들이기를 하면서 만약 이긴 사람이 제기를 발로 찬 다음 손으로 잡고 멀리 뛰어가서 다시 제기를 차면, 그 개수만큼 더 종들이기를 받을 수 있다. 때문에 종들이는 사람은 얼른 뛰어가서 제기차는 것을 막아야 한다.

 

6. 그네뛰기

시대: (조선이전)

그네뛰기 유래

이 놀이가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어느 때부터 단오 명절에 하던 놀이가 되었는지 정확한 사료를 찾기는 어렵다.
중국 송나라의 사물기원 이라는 책에 북방 종족들이 경쾌하게 높이 뛰어오르는 모습을 익히기 위해, 해마다 한식이 되면 이 놀이를 한 것인데 후일에 중국 여자들이 그것을 배웠다. 는 글과 본래 산융의 놀이였는데, 제나라 환공이 북의 산융과 전쟁하던 시기에 이 놀이가 중국에 전해졌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북방 종족이라는 것은 우리의 조상이었던 고대 종족들을 포함한 일련의 종족을 가리킨 것이니, 고대 종족들이 아주 먼 옛날부터 그네뛰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옛날부터 행해지던 그네뛰기가 계속 평민들 놀이로 전래되다가 후에 지배계층에까지 확산되면서 기록으로 남게 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더욱 성행하여 대규모 경기로까지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시인 이규보는 우리나라 풍습에 단오에 반드시 이 놀이를 한다. 고 했으며, 성종실록 에 따르면 15세기에 서울 시민들은 단오 명절에 종로 네거리 뒷골목에 화려하게 그네를 설치하고 남북 두 패로 나뉘어 내기를 하였는데, 서울 안 부녀자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향전에 장장채승 그넷줄을 두 손에 갈라 쥐고 선뜻 올라 발 굴러서 한분 굴러 뒤가 솟고~로 춘향이가 그네뛰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행하던 놀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높이뛰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회도 열렸었다. 그러나 20세 초부터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밀양 아랑제 남원 춘향제 등 축제 때 간혹 치러지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 담뱃갑에도 그네뛰기 모습이 나오고, 1967년에는 우표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놀이로 이해되고 있다.

 

그네뛰기 방법

1)그네 달기

그네는 대개 마을 어귀나 동네 마당에 있는 큰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의 가지에 매달기도 하고, 마땅한 나무가 없을 때는 인공적으로 그네를 만들기도 한다. 즉 넓은 터에 긴 통나무 2개를 가로질러 그 가지에 두 줄의 동아줄을 매고 맨 아래에 발판을 놓는다. 그네 줄은 보통 볏짚이나 삼으로 동아줄을 만들지만, 물들인 천을 찢어서 오색 찬란하게 드리우는 일도 있었다. 그네 줄의 길이는 8~9m 정도로 하는 것이 적합하나, 경우에 따라서 더 길게 하기도 한다. 그네 줄의 굵기는 재료에 따라 일정하지 않지만, 반드시 손안에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굵기로 만들어야 한다. 나무 기둥을 세워서 만드는 그네를 땅그네라 일컫는다.


2) 놀이방법
이 놀이는 한 사람이 뛰는 외그네뛰기와, 한 그네에 두 사람이 함께 마주 향하여 뛰는 쌍그네뛰기 가 있다.
외그네뛰기
그네뛰기의 기본은 구르기 동작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앞구르기 동작
그넷줄에 매달리며 두 다리를 앉은 자세가 되게 한다.
허벅다리에 가슴을 댄다.
엉덩이가 발판보다 더 내려가도록 깊이 앉는다.
머리는 두 팔 사이로 깊이 숙이는데, 이때 그네에 매달리지 말고 앞구르기가 끝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서 높이 오르기 위하여 발을 앞으로 내보내야 한다.


뒤구르기 동작
뒤구르기는 앞구르기 동작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한다.
그네 대로부터 몸 중심을 멀리 하기 위해서 두 팔을 완전히 편다.
두 다리는 기억자형으로 굽혀 무릎이 얼굴 앞 가까이 오게 한다.
엉덩이는 될 수 있는 대로 낮춘다.


쌍그네뛰기
뛰는 방법은 외그네뛰기와 비슷한데, 다만 두 명이 동작을 할 때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점이 어렵다.
두 사람은 각각 서로 마주보고 올라서는데, 발은 한발씩 엇바꾸어 놓이게 한다. 처음에는 4~5회 자연스럽게 구른 다음 점차 힘을 준다. 두 명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뛰고 한 사람은 뒤로 뛰게 되어 있으므로, 두 사람 다 서로 앞으로 나갈 때에는 팔을 완전히 펴면서 엉덩이를 발판 아래까지 닿게 하여 내밀어야 한다. 이때 상대편은 자세를 낮추면서 몸을 뒤로 힘껏 당겨주어야 한다.


그네는 누가 높이 뛰는가가 가장 중요한데, 순간적으로 올라갔다 내려오기 때문에 얼마나 높이 뛰었는가를 정확하게 잴 수가 없다. 따라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그네를 적당한 곳의 나뭇가지에 맸던 만큼 그네 앞의 나뭇가지 또는 꽃가지를 목표물로 정하고, 그것을 발끝으로 차거나 입에 무는 것으로 내기를 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일찍부터 했던 방법이 아닌가 한다.
방울 차기라는 방법이 있는데, 높이를 재는 방법이다. 그네 앞 장대에 매단 방울을 발로 차서 소리를 울리게 한다. 처음에는 낮은 곳에서 점점 높여감으로써 최고의 높이를 측정한다.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예를 보면 높이 12m 정도까지 올라간 예가 있다.
그네 발판에 긴 줄자를 매달아 그네가 높이 올라갔을 때, 줄의 정지 지점에서부터 공중으로 몇 m 올라갔는지를 재는 방법이 있다. 이는 근래에 창안된 방법이다.

 

7. 강강술래

시대: (조선이전)

강강술래 유래

강강술래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임진왜란과의 연관설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의 제사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침략해 오는 왜적에게 우리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남장시키고 손과 손을 마주잡고 둥그렇게 원을 만들며 춤추게 했더니, 이를 본 왜군들이 질겁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설은 학자들에 의해 점차 부정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교과서에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등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에서 비롯되었거나, 만월제의에서 나온 놀이라는 것과, 마한 때부터 내려오는 달맞이와 수확의례의 농경적인 집단가무 등 다양한 설이 있다.

강강술래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한자 기원설로, 강강수월래 즉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왜적을 경계하라는 뜻의 적개심을 높이려는 구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로 한자를 꿰어 맞췄다는 견해가 많다. 다른 설은 우리말 기원설로, 강강술래의 강 은 원을 뜻하고, 술래는 수레를 의미하는 말로, 둥글고 둥글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국한문 혼합기원설로, 강강은 우리말 원, 술래는 순유, 순라에서 나왔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전라도 남해안지방의 사투리 강강은 둥근 원을 만들고 돈다는 뜻이며, 술래는 도적을 잡는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강강술래 방법

걷기와 뛰기가 주를 이루지만, 중간 중간에 여흥놀이로 멍석말기와 풀기,문지기놀이,남생이놀이,기와밟기,고사리끊기 등이 있다.
1) 가장 중심이 되는 원무는 주로 오른쪽으로 돈다.
2) 손잡기와 걷기: 오른손은 손등이 위로,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가게 옆 사람을 잡는다. 걷기에서의 발은 뒤꿈치부터 노래에 맞추어 딛는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달떠온다 달떠온다 , 강강술래 동해동창 달떠온다 , 강강술래
저 달이 뉘달인가 , 강강술래 강호방네 달이라고 , 강강술래
강호방은 어디가고 , 강강술래 저달뜬줄 모르는가 , 강강술래
3) 뛰기 : 걷기보다 빠르게 겅중겅중 노래에 맞추어 뛴다. 다리를 많이 벌리지 않고 무릎을 올리면서 흥겹게 뛴다. 노래로 다음과 같다.

 

뛰어보세 뛰어보세 . 강강술래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 . 강강술래
얕은 마당 깊어지고 . 강강술래 깊은 마당 얕아나지게 . 강강술래
3) 멍석 말기와 풀기 : 노래에 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멍석을 말았다 푼다. 돌아나올 때도 처음 말기 시작한 사람이 방향을 달리하면 안되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 말았다가 앞사람을 따라 풀어져 나와야 한다. 노래로 다음과 같다.

몰자몰자 덕석몰자 . 비 온다 덕석몰자
풀자풀자 덕석풀자 . 볕 난다 덕석풀자
4) 청어엮기 : 노래에 맞추어 청어를 엮는다. 청어 엮는 방법은 아래와 같은데, 보통 여섯 명 내지 일곱 명이 한 모둠이 되어 청어를 엮는다.

5) 청어풀기 : 청어를 다 엮은 다음 마찬가지로 노래에 맞추어 청어를 푼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청청 청어 엮자 . 위도 군산 청어 엮자
청청 청어 풀자 . 위도 군산 청어 풀자
6) 고사리끊기 : 노래에 맞추어 고사리를 끊는다.

7) 기와밟기 : 앞사람의 허리에 허리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선다. 그러면 한 사람이 그 위에 올라가 등을 밟고 올라서고 옆에서 두 명이 양손을 잡아 떨어지지 않도록 보조한다. 이때 노래의 박자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어딧골 기완가 전라도 기왈세 , 몇 닷 냥 쳤는가 스물닷 냥 쳤네
8) 남생이놀이 : 남생이놀이는 모두 원이 된 상태에서 자리에 앉는다. 앞소리가 나와서 놀 사람들을 부르면 흥겹게 원 안으로 나온다. 이때 점잖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생이처럼 뒤뚱뒤뚱 까불까불 나오고, 나머지는 뒷소리로 촐레촐레가 잘 논다라고 논다.

 

8. 놋다리밟기

시대: (조선이전)

놋다리밟기 유래

놀이의 유래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공민왕의 파천과 연관된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상고시대의 원무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다.
먼저 안동지방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로, 지금부터 6백여 년 전 고려 31대 공민왕이 왕비인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지방에 피난 갔을 때, 마침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젊은 부녀자들이 나와 그 개울 위에 일렬로 엎드려 사람다리를 놓아 노국공주를 지나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고을 부녀자들은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해 명절인 정월 대보름날 밤을 택하여 이 놀이를 했고, 그 후 하나의 연중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주장은, 보름날 달밤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일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원초적인 놀이로, 원시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놀이라는 것이다.
안동의 풍속을 보면 시골 여인들 중 늙고 약한 여인들이 떼를 지어 성 밖으로 나와서, 밤이 되면 마치 물고기를 길게 꿰맨 형상으로 앞뒤로 길게 엎드려 눕는다.

 

그런 후 한 어린 계집애가 여인들이 엎드린 그 위를 걸어갈 때 좌우에서 부축하여 준다. 계집애는 그 위를 왕래하며 마치 다리 위를 걷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계집애는 말하기를 여기가 무슨 다리 인고 라고 먼저 노래를 부르면, 엎드려 있던 여인들도 일제히 청계산의 동교라고 노래 부른다. 이와 같이 큰길을 거닐 듯이 동서남북 자유로이 왕래하며 밤을 지새운다. 이 놀이는 밤이 깊어서야 끝난다.

 

놋다리밟기 방법

성 안의 놋다리는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이동하는 가운데 진행된 행렬형 놋다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 밖의 놋다리는 행렬형과 아울러 쭉 둘러서서 원을 이루고 양편의 공주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서로 싸우기도 하는 원무형 과, 두 줄로 늘어서서 경쟁을 하는 일종의 경합형 등이 결합된 형태로 놀았다고 한다.


성 밖의 놋다리는 동부와 서부의 두 패로 나뉘어 저녁을 먹은 다음 동부는 현 옥정동에 소재했던 초당집 마당에 모여들고, 서부는 현 법상동에 소재하는 잿집 마당에 모여 총명한 소녀를 공주로 뽑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원무인 둥둥데미 노래 에 맞추어 놀다가, 이어 실감기와 실풀기가 이어지면서 일행 모두가 원 안쪽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려 사람다리를 만든다.

 

이것이 웅굴놋다리 가 되는데, 이때부터 공주가 양쪽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를 밟게 된다.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두 바퀴 돌고 나면 놋다리의 선두는 원형에서 벗어나 시가지 대로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이른바 줄놋다리 가 시작된다. , 서부의 놋다리가 행진 끝에 천리천 서문 둑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 비켜가기도 한다. 또 사이 좋게 하나로 합쳐져서 공주도 한사람만 세워 놋다리를 계속하기도 했다. 놋다리밟기를 해야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권장하기도 했으니, 양반집 처녀와 새댁들도 모두 다 참가했으며 성 밖의 놋다리는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성 안의 놋다리는 삼웃들파 와 관아앞파 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다고 한다. 삼웃들파는 저녁을 먹은 후 노래를 잘 부르는 노인들이 먼저 놋다리 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다니면, 젊은 부녀자들이 모인다. 그러면 놋다리를 구성하여 넓은 길을 따라 성안을 두루 돌았는데, 공주라는 명칭은 쓰지 않고 17~18세의 소녀를 뽑아 놋다리를 밟게 했다. 관아앞파는 별다른 앞놀이 없이 관아 앞에 모여 줄놋다리를 구성한다. 앞사람의 허리를 안고 머리를 앞사람의 오른쪽으로 돌려 붙인다. 이 성 안의 놋다리도 역시 다른 파와 마주치면 길을 뺏기지 않으려고 싸웠으며, 밤늦게까지 놀았다고 한다.

구체적인 놀이방법은 아래와 같다.


1) 둥둥데미
부녀자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하는데, 둥둥데미에 들어가기 위한 대형을 만들기 위해 일렬로 길게 늘어설 때까지 계속해서 연결한다.
일단 일렬로 정돈되면 모두 왼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다음, 선두가 둥둥데미 노래 에 맞추어 일어서면 나머지 일행은 놓았던 손을 다시 잡고 선두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손을 타넘으면서 오른쪽으로 감아 돈다.
이때 앉아 있는 사람은 서서 도는 사람이 잡은 오른손을 어깨 위에서 뒤로 한 바퀴 돌려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일어선다. 처음엔 한 사람씩 타 넘던 것이 원이 커지면서 여러 명씩 건너뛰게 된다.
둥둥데미가 끝날 때까지 노래는 계속 반복되고, 일행은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2) 실감기
둥둥데미가 끝나면 곧 노래꾼의 실감기 노래 에 맞추어 원이 풀어진다. 가장 가운데 위치하는 선두가 그대로 손을 잡고 나선형으로 겹겹이 감겨 있는 원 사이의 길을 찾아 나온다. 이때 풀리는 원 끝 부분에서 에스자로 구부러져 안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하나의 큰 원형을 이루게 된다.

 

3) 웅굴놋다리

겹겹이 만든 원을 풀어 큰 원이 되면 앞뒤의 맨 앞사람이 빠져나와 한 명은 원 안에, 한 명은 원 밖에 선다.

나머지는 모두가 손을 잡은 채 원 안쪽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리며,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때까지 좁혀 들어간다.
이리하여 웅굴놋다리를 시작할 대형이 되면 잡은 손을 놓고, 각각 놓은 손을 허벅지에 고정시켜 공주가 지나갈 때 흔들리지 않게 하고 고개는 숙인다. 이때 치마를 어깨 위까지 걷어올려 뒤집어써서 저고리가 더러워지지 않게 한다.
원을 이루어 구부린 사람은 주로 아랫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원형을 둘러싸고 서서 놋다리 노래 를 부른다. 패를 둘로 갈라서 교환 창을 하는데 한쪽에서 어느 윤의 놋다리야 하면 다른 쪽에서 청계산의 놋다릴세 하는 식으로 문창과 답창이 이어진다. 구부린 사람들은 물론 공주와 시녀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4) 줄놋다리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두 바퀴 걸어 돌고 나면 놋다리의 선두는 원형에서 벗어나 시가지 대로를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하는데, 공주가 등을 밟고 지나가면 다시 앞으로 나가 열을 짓는다. 이때에 허리를 펴거나 고개를 들지 않고 다소곳한 자세에서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옮긴다.
공주의 뒤쪽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대열을 따라가며 노래를 부른다.
성 안의 놋다리밟기에서는 줄놋다리를 성 밖과는 다르게 대형을 만든다. 즉 앞사람의 허리를 안고 머리를 앞사람의 오른쪽으로 돌려 붙여 길게 대형을 만든다. 공주가 밟고 지나가면 일어서서 다시 앞에 가서 다리를 만드는 것은 성 밖의 줄놋다리와 같다.


5) 고깨싸움
줄놋다리가 진행되다가 동부·서부 양대의 놋다리가 서문 둑 다리를 향해 행진하여 마침내 거기서 부딪치게 된다. 이때 마찰 없이 서로 비켜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데, 이를 고깨싸움이라 한다. 성 안의 놋다리밟기에서도 고깨싸움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을 어깨 위에 올리는 것을 이 고장에서는 고깨 라고 하기 때문에 고깨싸움 이라고 하는데 무동싸움 이라고 하면 쉽다.
몸집이 크고 힘센 부녀자가 가벼운 처녀를 어깨에 올리고 뒤에는 물받이 셋이 처녀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받치며 앞에는 물부리 넷을 세워서 상대편의 공격을 막는 구실을 한다.
동서부가 서로 겨루어 고깨 위에 탄 처녀를 먼저 끌어내리는 쪽이 이긴다. 따라서 고깨꾼은 키가 크고 억세야 하며 고깨를 타는 무동은 강단지고 영악해서 약빨라야 한다.
동채싸움 처럼 앞머리꾼들이 고깨꾼의 앞쪽에서 고깨를 주로 보호하며 상대 고깨를 공격한다. 한편 다른 부녀자들은 고깨 둘레를 겹겹이 둘러싸서 바람들어갈 틈도 없는 사람의 장막을 만들어 상대편의 공격을 차단한다. 앞머리꾼의 밀백이가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힘싸움인데 힘에 밀려 앞머리가 터지면 승부가 난다. 동부 고깨가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7) 청어장사
사람들을 기다릴 때나 놀이 중간에 간간히 하는 놀이이다. 부녀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한 편은 장사꾼 노릇을 하고 한 편은 손님 노릇을 하는데, 옆에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마주서서 노래를 주고받으며 앞뒤로 나아갔다 물러섰다 한다.
먼저 장사꾼이 청어 사소, 청어 사소. 하고 나아가면 손님들이 뒤로 물러선다. 이번엔 손님들이 나아가면서 청어 값이 몇 냥이로· 하면 장사꾼이 물러서서 은도 닷 냥, 돈도 닷 냥. 하고 응답한다. 다시 손님들이 연에 닷 냥 제값일세. 하며 나서면, 이어 장사꾼들은 청어 사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같은 방식의 놀이를 거듭한다.


8) 콩심기
청어장사 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기다릴 때나 놀이 중간 또는 끝에 하는 놀이이다.
먼저 두 편으로 나뉘어 앉아서 각 편에 한 사람씩 술래를 뽑는다.
두 술래는 먼저 가위바위보로 차례를 정한 다음, 마당의 작은 돌멩이를 콩으로 삼아 상대편 몰래 콩을 심는 흉내를 내며 돌을 자기편 사람들의 치마폭에 숨긴다. 이때 콩밭 노릇을 하는 다른 부녀자들은 손뼉을 치면서 한오래 한오래, 두오래 두오래 하며 노래를 부른다.
콩을 심고 나면 상대편 술래가 어디에 숨겼는지 찾아내기 시작한다. 찾는 사람은 앉아 있는 사람 눈앞에 대고 손뼉을 쳐 보이거나 상대방의 코를 간질여 보며, 그 표정의 변화를 관찰하여 치마폭의 콩을 찾아낸다. 찾아내면 찾았다, 찾았다. 하면서 이긴 편으로 나서서 춤을 춘다. 찾으면 심고 찾는 역할을 바꾸어 계속한다.

 

9. 고싸움

시대: (조선이전)

고싸움 유래

이 놀이는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다. 다만 옻돌마을에 다음과 같은 속설이 전하고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옻돌마을은 와우상, 즉 황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그 터가 무척 세다고 한다. 이같이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소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구유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놓고, 또 황소가 일어서면 마을에 피해를 끼친다고 하여 소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소의 고삐를 할머니당인 은행나무에 묶어놓고 꼬리는 7개의 돌로 눌러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터가 거세기 때문에 개가 자라지 않아 개 대신 거위를 기르고 있다고 한다.
고싸움은 이같이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속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마다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이다. 옛날의 고싸움은 남평지방에서 성행했고 장흥·강진지방에서도 줄다리기의 앞놀이로서 고싸움이 행해졌던 것을 미루어볼 때, 그리 믿을 만한 이야기는 못 된다.
왜냐하면 이 놀이는 본래 쌍줄다리기의 앞놀이로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놀이라는 점에서, 그 유래가 줄다리기의 유래와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싸움 방법

1) 고 만들기

고머리는 지름 34cm 정도의 통대나무 20~30개를 휘어 타원형으로 만들어, 어른의 팔뚝만큼 굵은 동아줄로 감는다. 몸체는 줄끝을 다른 줄에 대고 두 줄을 묶고 그 속에 굵은 통나무를 넣어 만든다. 그리고 고와 고가 부딪쳐도 망가지지 않게 와이자 모양의 받침대를 만든다. 그런 후 몸체에 810개의 통나무를 가로로 묶어 멜 수 있게 한다.


2) 놀이방법
고싸움으로 잘 알려진 옻돌마을의 놀이방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고싸움은 동부와 서부의 두 패로 나누어 한다. 동부는 상촌이라 부르고 서부는 하촌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을 가운데로 난 골목길이 경계선이 된다. 고싸움을 할 때는 상촌인 동부는 남성을 상징하고, 하촌인 서부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지만, 일단 싸움이 붙으면 이런 속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이겨야만 한다는 승부욕으로 가득 차 있다.


각 편은 줄패장 을 두는데, 이는 줄을 갖고 싸우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줄패장의 지휘에 따라 싸움을 전개한다. 줄패장은 고의 제일 앞에 타서 싸움을 지휘하고, 그 뒤에 3~4명의 힘세고 날쌘 장년들이 탄다. 한편 고를 메고 싸우는 놀이꾼을 멜꾼 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중심 놀이꾼이기 때문에 힘이 세고 누구보다도 투지와 승부욕이 강한 장년들이 맡는다.
고싸움은 음력 초열흘 경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10여 세 가량의 아이들이 길이 5~6미터 정도의 자그만 고삿고 를 만들어 어깨에 메고 상대방의 마을 앞을 돌며 승전가를 불러 약을 올리면, 상대방 쪽도 질세라 그보다 더 큰 고를 만들어 시위한다. 이어 15~16세 정도의 큰 아이들이 합세하게 되고 그 이튿날은 20세 가량의 청년들까지 참여하여 소규모 고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면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 고싸움을 하기로 합의하고, 마을 청년들이 나서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볏짚을 모아서 고 만들 준비를 한다.


14일 오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고를 만들고 상·하 마을이 합동으로 11시경 마을 뒤쪽 산언덕에 있는 할아버지 당에서 제사를 모시고 마을 앞 은행나무로 된 할머니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화주 집으로 가서 매귀굿을 쳐주고 음복을 하면서 밤새 논다.
16일경 해거름이 되면 이미 만들어 놓은 고를 메고 풍물패를 앞세운 채 마을 앞을 돌아다니며 전의를 다진 다음, 분위기가 고조되면 싸움판이 벌어질 마을 앞 논으로 향한다. 이때 상대방의 고가 보이면 의기충천하여 노래도 빠른 가락으로 바뀐다.


고와 고가 서서히 마주보면서 접근하기 시작한다. 고 머리를 서로 마주 대었다 떼었다를 몇 번 되풀이하다가 밀어라 하는 줄패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풍물패는 옆으로 빠지고 멜꾼들은 두 손으로 가랫장을 치켜들면서 함성과 함께 돌진한다. 고가 상대방의 고에 부딪치려 할 때 줄패장은 빼라 하는 명령을 내리고, 놀이꾼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함성을 지른다. 다시 줄패장이 밀어라 하는 명령을 내리면 정면으로 부딪치는데, 그러면 고는 부딪쳐 미는 힘에 의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첫 번째와 두 번째 가랫장은 놀이꾼들의 손에서 벗어난다.

 

이때 줄패장들은 고 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고 밑으로 떨어뜨리려고 일대 접전을 벌인다. 세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줄패장은 재빨리 빼라 는 소리를 지른다. 꼬리잡이들은 줄을 당겨 뒤로 뺀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다시 겨루다보면 부상자가 속출하고, 결국 상대방의 힘이 빠지면 상대편 고 위에 자기편 고를 얹어 짓눌러 땅에 닿게 하면 승패가 결정 난다. 그러나 승부가 쉽게 나지 않기 때문에 밤새도록 하기도 하고, 이튿날까지 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패했다고 해도 이튿날 다시 도전하기 때문에 20일까지 매일 밤 계속된다고 한다.
승패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두 마을 줄패장이 합의하여 2월 초하룻날 고를 풀어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로 최후 승부를 가린다.
이긴 마을은 승전가 를 부르면서 자기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부농 집으로 들어가면, 주인은 주연을 베풀어 노고를 치하하고 놀이꾼들은 풍물을 치면서 저녁 내내 논다. 이렇게 해서 음력 정월 초열흘 경부터 시작한 고싸움은 끝이 난다.

 

10. 차전놀이

시대: (조선이전)

차전놀이 유래

차전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대동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기원전설이 전승되고 있는데, 이 기원전설과 연관된 기록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에 고려 태조 왕건은 930년 고창군 병산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고을 사람 권행, 김선평, 장길 등은 여러 개의 수레를 만들어 타고 싸워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병산전투가 끝난 후 이 지방 주민들은 용감한 세 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해를 맞으면서 동채싸움을 즐기기 시작한 데서, 차전놀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전놀이가 단지 위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첫 번째는 전설의 내용대로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원래 지게를 포함하여 수레·가마 등의 나무기구를 이용하는 놀이가 전승되던 중,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행해짐으로써 보다 강한 전승력을 갖고 세시행사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병산전투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행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병산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가능성이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에 고려 태조 왕건은 930년 고창군 병산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고을 사람 권행· 김선평· 장길 등은 여러 개의 수레를 만들어 타고 싸워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병산전투가 끝난 후 이 지방 주민들은 용감한 세 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해를 맞으면서 동채싸움을 즐기기 시작한 데서, 차전놀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전놀이가 단지 위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첫 번째는 전설의 내용대로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원래 지게를 포함하여 수레·가마 등의 나무기구를 이용하는 놀이가 전승되던 중,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행해짐으로써 보다 강한 전승력을 갖고 세시행사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병산전투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행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병산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가능성이다. 지금은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차전놀이 방법

정월 대보름에 주로 하는 이 놀이는, 놀이방법과 놀이도구가 지역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춘천의 외바퀴 수레싸움
춘천에서는 수레싸움을 했다. 물론 마을 대항의 집단 대동놀이였는데, 먼저 두 마을의 원로들이 만나 놀이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한 다음 놀이가 시작되었다. 놀이에는 마을의 청장년들이 모두 참가하였고, 마을사람이 모두 나와 응원도 하고 거들기도 하였다.
각 마을에서는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그것을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상대편의 수레를 밀어낸다. 힘이 모자라 수레가 밀리는 편이 지게 되고, 이긴 쪽에서는 상대편 수레를 부숴버림으로써 승부가 나게 된다. 지게 되면 그해에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밖에 춘천에서는 초헌 태우기 놀이도 하였다.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청년들이 초헌을 만들어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을 한참 끌고 다니다가, 그 사람의 절을 받은 다음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차전을 할 때에 적을 포로로 잡아 항복을 받던 것이 놀이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2) 안동의 동채싸움
추수가 끝나고 동·서부 유지들이 만나 새해 차전을 할 것을 결정하면, 각 마을에선 준비위원을 구성한다. 먼저 차전에 사용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은 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에 표시를 해두고 온다. 음력 정월 초순에 다시 목수와 인부가 함께 가서 표시한 나무를 베어오는데, 베기 전에 반드시 산신께 고사를 지내고 벤다.
베어온 나무로 동채를 만드는데, 원로의 지휘를 받아 목수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긴 나무의 윗머리를 엇갈리게 하여 여러 겹 밧줄로 든든하게 비끄러매서 만든다. 그 다음 비끄러맨 부분 밑의 중간에 1미터 정도 너비의 판자를 건너대고 그 위에 볏짚으로 짠 멍석 깔개를 깔았다. 이것은 편싸움을 지휘할 대장이 올라설 자리가 된다. 동채의 크기는 상황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그림과 같다.


놀이는 보통 오후 1시경에 시작하는데, 정한 시간이 되면 가장 혈기왕성한 청장년들이 동채를 메고 미리 정해놓은 넓은 들판으로 나아간다. 이때 싸움 장소 주위에는 동부·서부 양부의 수만 군중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열의 앞장에는 힘이 센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대형을 지어 전진하였는데, 이들을 머리꾼 이라고 한다. 머리꾼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면서 자기편의 동채와 대장을 상대편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동채를 멘 사람들을 수레꾼 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채꾼 과 뒤채꾼이 있었다. 수레꾼들은 앞뒤에서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물러서기를 되풀이한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서서 왼손에는 동채머리에 맨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하면서 상대편을 공격하였다. 지휘할 때 구령을 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보통 앞으로 하면 전진이고, 뒤로 하면 후진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가 된다.


머리꾼과 수레꾼들은 상대편을 정면 또는 측면으로 밀거나 뒤로 물러서기를 하는데, 이들 옆에 놀이꾼도 가담한다. 이들은 형세를 보아 머리꾼이나 동채꾼으로 가담한다. 이때 동채 앞머리에 선 머리꾼들은 상대편 진지를 뚫고 들어가 상대편의 지휘자를 끌어내리든가 상대편의 동채를 눕히는 돌격대의 역할을 한다.
이 놀이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대장은 손으로 대오를 지휘할 뿐 상대편의 동채머리를 붙잡지 못한다.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상대편을 밀고 나갈 수 있으나, 상대편 머리꾼이나 동채꾼에게 손질, 발질을 못한다. 그러므로 머리꾼들은 절대로 팔짱을 풀면 안 된다. 그러나 실제 놀이상황이 되면 이와 같은 규제는 지켜지지 않고, 격투가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데, 일제는 이를 빌미로 놀이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겼을 때는 지게 되는데, 옛날에는 상대편 동채를 부숴야 이기도록 했다고도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여겨 모두 최선을 다했고, 응원하는 사람도 서로 동부 이겨라 서부 이겨라 를 목청을 외쳤다. 이때 시집은 서부이고 친정은 동부인 부인의 경우, 동부를 응원하는 관습이 있어 차전의 승부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긴 편은 머릿수건과 신발을 하늘 높이 던지면서 환호를 했고, 하루 종일 노래와 춤을 즐기며 놀았다고 한다.

 

11. 공기

시대: (조선이전)

공기 유래

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수산리벽화고분의 서쪽 벽에 다섯 개의 공기를 가지고 올려 던지면서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또한 5세기 중엽에 조성된 장천1호고분 벽화에도 일곱 개의 동그란 공기를 차례차례 공중에 올려 던져놓고 내려오는 것을 날랜 동작으로 잡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두 벽화가 조성된 시기가 고구려 때이므로, 이 놀이는 최소한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축의 뼈로 만든 둥근 알로 미래를 점쳤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보아 오른쪽 벽화에 그려진 그림도 주술적인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는 점치는 도구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놀이로 변한 것은 주사위와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우리나라에 공기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초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둥근 돌알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어 공기라고 한다. 둥근 돌알을 공중에 던져 손바닥으로 받고 이미 받은 것을 솥발 형태로 만드는 것을 솥발공기라고 한다. 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작은 돌 다섯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노는 것을 보고 해동죽지를 지은 최영년은 조자룡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밖에 조선시대의 여러 풍속화에 공기하는 모습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 놀이는 조선시대에 흔히 하던 놀이로 보인다. 그리고 공기는 아직까지도 가장 많이 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공기 방법

1) 놀이의 기본방법
네 알 또는 다섯 알의 공기를 가지고 혼자서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2명이 할 수 있고, 많으면 편을 나누어 하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 방법과 형식이 다르지만, 한 알의 공기를 높이 올리고 바닥에 놓인 공기를 주우면서 다시 내려오는 공기를 실수 없이 받아내는 것은 공통적이다.

 

한 알 집기: 다섯 알을 던져서 흩어놓고, 그 중에 한 알을 집은 다음 던져 올리고 바닥에 있는 한 알을 집은 다음 내려오는 한 알을 받는다. 같은 방법으로 바닥에 있는 것을 하나씩 차례로 받으면 한 알 집기가 끝난다.
두 알 집기: 한 알 집기와 같은데 바닥에 있는 돌을 두 알씩 두 번 집어 받는다.
세 알 집기: 한 알 집기와 같은데 먼저 바닥에 있는 돌 세 알을 집어 받고, 다음 번에 남은 한 알을 집어 받는다.
네 알 집기: 공기를 손안에 모두 쥐고 한 알을 위로 올린 뒤 네 알을 땅에 놓는다. 그리고 한 알을 받은 뒤 다시 위로 한 알을 올리고 네 알을 집어 받아낸다.

 

공기: 각각의 집기가 끝나면 공기를 해야 한다. 즉 한 알 집기가 끝나면 공기를 해야 하고, 두 알 집기, 세 알 집기, 네 알 집기가 끝나도 해야 한다. 한 손에 다섯 알을 쥐고 그 가운데서 한 알을 조금 올렸다가 받는 것을 말한다. 지방에 따라서 한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찍으면서 고추장 하기도 한다.
강가부리: 각 단계가 모두 끝나면 마지막에 한다. 즉 집기에서는 네 알 집기까지 마치면 마지막에 한다. 오른손에 다섯 알을 쥐고 그것을 모두 위로 올렸다가 다시 받는다. 지방에 따라서 공기를 위로 올린 다음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면서 "된장"하고 내려오는 돌을 받기도 한다.


여러 가지 단계: 살기, 알낳기, 알품기, 방충이, 솥걸기, 불때기 등의 단계가 있는데, 지방에 따라 다르다. 각 단계의 중간에는 공기를 해야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강가부리를 해야 한다.
꺾기: 다섯 알을 모두 위로 던져 손등으로 받고, 다시 위로 올린 뒤 공중에서 잡아챈다.
약 네 알만 올라가고 한 알이 바닥에 떨어졌다면, 네 알을 받은 다음 바닥에 있는 한 알을 한 알 집기처럼 집는다. 이 때 손등에 세 알 이상 올리지 못하면 안 되는 규칙을 두기도 한다.

끝내기1: 한 알 집기공기두 알 집기공기세 알 집기공기네 알 집기강가부리다양한 여러 단계꺾기까지 먼저 하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끝내기2: 중간에 하던 공기·강가부리·여러 가지 단계를 모두 생략한 형태로 요즘에 흔히 하는 끝내기 방법이다. 한 알 집기두 알 집기세 알 집기네 알 집기꺾기를 반복한다. 꺾기에서 받은 돌의 수를 동 이라고 하는데, 먼저 50동 또는 100동을 내기로 정한다. 동을 계속 더해서 정한 동 까지 먼저 내면 이기게 된다.


2) 죽는 경우
공기를 하다가 아래와 같은 경우에는 죽게 된다. 죽으면 다음 사람에게 차례가 넘어간다.
떨어지는 공기를 받지 못하면 죽는다.
바닥에 있는 공기를 집지 못할 경우: 예를 들어 두 알 집기이면 바닥에 있는 두 알을 집어야 하는데 한 알 또는 세 알을 집으면 죽는다.
다른 공기를 건드렸을 경우: 한 알 집기인데 한 알을 집다가 옆에 있는 공기를 건드리면 죽는다.
꺽기할 때 손등에 올라간 공기를 모두 잡지 못하면 죽는다.

 

12. 석전

시대: (조선이전)

석전 유래

이 놀이는 아주 오래 전, 원시공동체 이전의 수렵시대에 생긴 놀이로 판단된다. 동이나 철 등의 쇠붙이를 이용할 줄 몰랐던 때에 돌이나 나무는 생활도구이면서 무기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즉 짐승을 잡거나 적과 싸울 때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싸웠을 것이다. 이 놀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놀이로 추정된다.


석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에서 씌어진 수서 동이전 고구려조의 기록이다. 매년 초 패수에 모여서 놀 때, 왕은 가마를 타고 의장을 벌려 세우고 놀이를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은 옷을 입은 채로 강물 속에 들어가 신하들을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물을 끼얹고 돌을 던져가며 소리 지르고 달리고 쫓고 하는 놀이를 두세 번 하고 그친다.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구려 때의 편싸움은 국가적 행사의 하나로 파악된다. 그런데 구경을 하던 왕이 왜 물 속에 들어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한양명 교수는, 종교적 제의로 파악하여 신성한 물로 몸을 씻음으로써 그 자신과 국토 및 국민에게 새로운 시작, 새로운 생명의 운을 보장하여, 고구려에 찾아드는 새로운 해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풍요, 새로운 생산력의 초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단순한 생존 본능에서 시작된 놀이가 국가가 형성되면서 종교적 제의로써의 기능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과 세종 11, 예종 원년 등에도 팔매싸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예종 때의 기록은 부상자가 속출하여 중단되었던 편싸움이 정식으로 부활됨을 알려주고 있다. 5일 성 안의 사람들이 훈련원의 사장에 모여 두 편으로 나뉘어 척석희를 하며 싸우니 사상자가 생기었다. 국초부터 이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을 걱정하여 통금한 것이 이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강제로 못하게 함으로써 중단된 이후 오늘날까지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석전 방법

별다른 놀이방법은 없고 두 패로 나뉘어 돌로 상대를 공격하다가, 격렬해지면 접근전을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시의 놀이 상황을 기록한 몇 가지 문헌으로 놀이방법을 대신한다.


1) 홍석모의 동국세기시 정월 상원조의 기록
유득공의 경도잡지를 부분 인용하였다.

삼문 밖 아현 사람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고, 혹은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접전하는 모양을 만리현 위에서 행한다. 이것을 변전이라 한다. 그리하여 패주하는 편이 지는 것이다. 속담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기내가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다른 도들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에 용산과 마포의 불량 소년들은 작당하여 아현 쪽을 돕는다. 그것이 매우 심한 싸움일 때에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고 하여 피를 보고서도 그치지 않는다. 비록 사상에 이르러도 후회하지 않고 또 생명에 대한 보상법도 없다. 이를 금지시켜야 하는 관청이 이런 싸움을 못하도록 금지해도, 고질이 된 악습이 온전히 고쳐지지 않는다. 그후 성 안의 아이들도 이를 모방하여 종가와 비파정 등에서 편싸움을 했으며, 성 밖에서는 만리현과 우수현이 편싸움의 장소가 되었다.


안동 풍속에, 매년 정월 16일이 되면 부내 주민들이 중계천을 경계로 삼아 좌우 양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을 던져 싸웠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풍속에도 정월 보름날 돌을 던져 싸우는 놀이가 있다. 생각건대 수서 고구려전 에 매년 초에 군중들이 패수가로 모여 노는데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져 밀리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풍속 석전의 시초이다.

 

2) 안동부의 팔매싸움

매년 정월 열엿샛날 부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의 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나뉘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돌을 던져 서로 승부를 결정하는데, 한 해의 풍년을 점친다. 경오년 적을 토벌할 때에 모집하여 선봉에 삼았더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3) 김해부의 팔매싸움

팔매싸움을 좋아하여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동들이 모여 성남에서 팔매싸움을 익혔다. 단오에 이르면 장정들이 모여 좌우로 편을 나누고 깃발을 꽂고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날뛰면서 돌을 던지는 것이 비가 퍼붓는 것 같았다. 승부를 겨루었을 따름이니 비록 죽거나 다쳐도 후회하지 않았다. 수령이 금할 수 없었으며, 경오년 왜적을 정벌할 때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으니 적병이 나오지 못하였다.

 

13. 거북놀이

시대: (조선이전)

거북놀이 유래

거북놀이의 유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설고총서 라는 문헌에 신라 문무왕 때 15세의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영추대사가 15세 소년들로 하여금 수숫 잎으로 거북의 탈을 만들어 쓰게 하고 유희하며 집 안팎을 깨끗이 쓸게 하였더니, 공주의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거북놀이의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충남 천원지방에서는 고려 8대 현종때, 나라에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어 곳곳에 도둑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현종이 직접 민정을 살피기 위해 각 고을을 순회하였다. 그러던 중 직산현에서 하루를 기거하는데 꿈속에서 신라의 문무왕이 나타나, 8월 한가위에 거북을 보낼테니 거북과 더불어 뛰어놀고 민습을 수습하라고 현몽했다. 현종은 이튿날 지형을 두루 살펴보고 입장면 구덕리가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이 마을 사람들과 거북놀이를 하였더니 이듬해 볍씨가 수수알처럼 풍성하게 여물어 대풍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이 마을에서 매년 추석을 맞이하여 거북놀이를 하였다고 하여 이곳이 거북놀이의 발생지이며, 이 거북놀이는 안과태평을 바라는 의미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최근 자료로 1941년 무라야마 지준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거북놀이에 관한 조사 보고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기본 방식은 짚으로 만든 거북모양을 뒤집어 쓴 사람과 거북을 끄는 사람이 있어서 이들이 각 집 문전을 방문한다. 방문한 집에 들어가서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 그러다가 거북이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으면 집주인이 그 까닭을 묻는다. 배가 고픈데 떡을 먹고 싶다고 하면 주인은 떡과 음식을 내어 대접한다. 는 것이다. 거북놀이가 행해진 지방에 대한 기록도 나오는데, 경기도 6, 충북 3, 충남 5, 전남 1, 강원도 1곳 등 총 16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중부지방에서 많이 했으며 당시에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거북놀이 방법

거북은 수숫대, 옥수숫대, 왕골,덩 굴, 볏짚, 대나무 가지 등을 이용하여 만든다. 거북이 다녀간 집은 재앙이 달아나고 복이 온다고 하여 다투어 거북을 맞이하는데, 그 형식이 각 지역마다 비슷하나 몇 지역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1) 경기도 광주지방 거북놀이
거북이 자기 집 문 앞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자, 이것을 본 집주인이 거북몰이에게 그 까닭을 묻는다. 그러면 거북몰이가 배가 고파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집주인이 음식을 많이 차려놓는다. 이 거북놀이는 밤늦게까지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논다. 때로는 음식 대접 외에 쌀, 보리 등 곡물을 약간 내놓기도 하는데, 이때 거둬들인 곡물은 모아 두었다가 마을을 위한 공공사업에 사용한다.


2) 경기도 여주지방 거북놀이

여주군 전역에서 행해졌던 놀이로 추석날에 청소년들이 수숫잎을 따서 마치 지네 발과 같이 길게 엮는다. 이것을 몇 개 이어서 멍석처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까불거리며 걸어간다. 그러면 마치 거북이 걸어가는 것 같다. 그러다가 동네 부잣집 마당에 가서 거북의 임자가 뒤에 서서 거북아 거북아 만세 거북아 잘도 먹고 잘도 놀아라. 하고 외치며 풍물을 치면 여기에 맞추어 거북춤을 추며 논다. 그러다가 거북이 쓰러지면, 거북이 배가 고파 쓰러졌으니 먹을 것을 갖고 오라고 소리친다. 이것을 신호로 그 집에서 미리 준비했던 술, , 과일을 내온다. 그러면 그곳에서 배부르게 먹고 즐기다가 또 다른 집으로 간다. 이렇게 하여 온 동네가 술 풍년, 떡 풍년, 노래 풍년이 든 듯하다.


3) 충북 음성지방의 거북놀이

거북의 등은 수숫잎을 엮어 만들기도 하고, 맷방석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머리는 작대기 끝에 박을 매달아 거북의 얼굴을 만들고, 두 개의 귀는 꽃송이를 장식하고 위엄을 주기 위해서 밤송이를 섞어서 만든다. 꼬리는 막대기 끝에 수숫잎을 한 묶음 달아서 만든다. 이렇게 준비가 되면 맷방석 밑으로 청년 두 사람이 들어가 앞사람은 거북의 머리를 들고, 뒷사람은 꼬리를 들고 거북 걸음으로 걸어간다.


용기수를 선두로 하고 질라재비가 거북을 이끈다. 그 뒤에 시종이 둘이 따르며, 그 뒤를 어릿광대와 농악대가 따른다. 이 대열은 집 대문 앞에 서서 천석 거북 들어갑니다. 만석 거북 들어갑니다.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오고, 땅을 쓸면 황금이 쏟아져 나오니 이 댁의 문을 활짝 열어주소서. 하며 수문장굿을 하면, 주인은 문을 활짝 열어준다. 이어 마당에 들어서서 용왕굿과 샘굿을 한다. 이어 마당을 돌며 놀다가 거북이 쓰러진다. 이때 질라재비는 이 거북이 동해바다를 건너 이 산골짜기까지 오느라고 과로해서 뱅이 난나보오. 운운하고, 종을 시켜 의사를 불러오게 한다.

 

의사는 병이 너무 중태라며 손을 떼려고 할 때, 질라재비와의 해학적인 문답이 오고 간다. 결국 많은 음식이 나오도록 유도해서 접대를 받은 다음 다시 덕담을 늘어놓으며 거북놀이를 계속한다. 그러다가 마당을 한바퀴 돌아 문턱에서 큰절을 하고 조왕굿을 하는데, 보통 검은 솥에 화식을 익혀 먹을 때 아무 거침없이 수복다남 부귀영화 내려주소서. 라는 덕담을 하고, 이어 텃굿을 하는데, 이때는 컹컹 짓는 소리 이 근방 만전복록 이 댁으로 무럭무럭 들어오게 하여 주소서. 라는 덕담을 늘어놓는다.

 

14. 고누

시대: (조선이전)

고누 유래

고누는 천한 사람들이 노는 놀이로 여겼기 때문에 기록하는데 소홀히 해서, 자세한 놀이 방법이 소개된 책은 없다. 재물보 의 박희편에 우물고노 라는 기록이 보이고, 속담에 우물고누 첫 수 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널리 행해지던 놀이로 보인다. 그밖에 100여 년 전에 지은 소쇄원 이란 옛 건물 마루에 고누가 그려져 있고,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 가마터에서 참꼬누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놀이로 파악된다.


놀이 방법의 측면에서 보면 고누는 바둑의 원시적인 형태로 보인다. 따라서 바둑이 삼국시대의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점을 보면, 고누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하던 놀이로 발생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
김홍도가 그린 꼬니 라는 풍속화가 있는데,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누를 두는 것이 아니라 밤윷을 두는 그림이다. 그런데 많은 자료에서 고누를 설명할 때 이 그림을 인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이는 밤윷을 두는 그림이다.

 

고누 방법

고누는 그 형태와 방법이 다양한데, 이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우물고누와 호박고누와 같이 상대방의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가두면 이길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줄고누와 꽃고누와 같이 상대방의 말을 다 따면 이길 수 있다. 많은 놀이 가운데 몇 가지만 자세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 우물고누

말을 움직여 상대방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가두면 이기는 놀이로, 고누의 기본다.

 

2) 호박고누

우물고누와 마찬가지로 번갈아 말을 두다가 상대방의 말을 모두 가두어 더 이상 말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면 이기는 놀이이다. 우물고누보다 방법이 다양하다.

 

3) 넉줄고누

놀이판을 그리고 말을 각자 6개씩 놓는다.
말들은 서로 한 발씩 움직여 나가는데, 자기 말 2개가 나란히 놓이고 상대편의 말이 바로 옆에 있게 되면 따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모두 따면 이긴다.

 

4) 바퀴고누

말을 각자 4개씩 놓고 시작한다. 말을 움직이는 방법은 한 칸씩 앞뒤 좌우로 갈 수 있지만, 대각선으로는 가지 못한다.
네 개의 원이 자동차의 바퀴인데, 놀이 진행중 말이 바퀴가 시작하는 곳에 닿으면 여러 칸 갈 수 있다.
바퀴를 돌았어도 직선으로만 가야 하고, 자기 말이 앞에서 막고 있으면, 바로 그 앞자리나 그 길 아무 곳에나 세워놓는다.
따먹는 방법은 바로 앞에 상대 말이 있다고 따먹는 것은 아니라, 반드시 바퀴를 돌아야 따먹을 수 있다. 즉 바퀴를 돌아서 가다가 상대편 말이 있으면 따먹고 자기 말은 상대 말 자리에 놓는다. 상대방 말을 모두 따먹으면 이긴다.

 

5) 팔팔고누

그림처럼 각자 8개의 말을 놓고 시작한다.
말은 한 칸씩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직선으로 전후 좌우 어느 방향이든지 여러 칸 갈 수 있다. 단 대각선으로는 가지 못한다.
말을 움직이다가 자기 말 사이에 상대 말이 끼면 따먹는다. 더 이상 따낼 말이 없으면 이긴다.

 

15. 고백신

시대: (조선이전)

고백신 유래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서동요가 나온다. 선화 공주님은 남 그으기 얼어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라는 내용으로, 결국 서동은 동요의 내용처럼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게 된다. 동국통감 권25 의종에 보현사가 어디인가 여기서 모두 죽네.란 동요가 있었는데, 그 내용처럼 결국 무신의 난으로 정중부에 의해 왕과 문신들이 모두 보현사에서 죽었다.


그밖에 나무아들 나라 얻네 란 이씨 개국의 노래를 비롯하여, 연산군의 학정을 표현한 노래인 노고요와 중종반정을 예언한 충성사모요 등 아이들의 노래에는 시대를 반영하거나 예언하는 많은 동요가 있었다. 근래에는 동학혁명을 예언하고 마침내 녹두장군이 실패할 것을 암시한, 아랫녘 새야, 윗녘 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두류박 딱딱 우여 란 녹두새 노래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사회상을 표현하거나 예언한 동요는 놀이로도 이어져,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모를 고백신놀이 가 전라도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놀이내용에서도 고구려 땅이 제일 크고 두 나라가 합쳐서 한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합치는 과정도 당나라조약 이라 하여,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두 나라가 합쳐서 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함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6·25 전쟁을 치르면서 공군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아이들은 육해공이란 놀이를 통해 하늘을 마음대로 누비는 공군을 표현했다. 또 그 전쟁으로 생긴 38도선을 놀이에 그대로 적용하여, 삼팔선 이란 놀이를 만들어 즐겨 했다.
따라서 고백신놀이는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육해공놀이는 6·25 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어리지만 놀이를 통해 사회, 미래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과 표현이 보여진다.

 

고백신 방법

1) 고백신놀이

너른 공터에 놀이판을 그리고 놀이하는 사람을 세 편으로 나눈다. 각 편의 대장격인 사람이 나와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순서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땅에 소속된다.
각 편은 각자 나무막대나 돌멩이 등의 보물을 한 개씩 준비하여, 자기 땅 제일 안쪽에 보관한다.
상대국 영토와 놀이판 밖에서는 깨금발로 서야 하며, 발을 걸거나 밀쳐 상대국 군사를 죽일 수 있는데 이때 선을 밟으면 죽는다. 또한 상대방 영토에 들어가 싸울 때는 공격하는 사람의 든 발이 땅에 닿으면 죽게 되고, 수비하는 사람은 넘어져도 괜찮지만 금을 밟거나 금 밖으로 밀려나가면 죽게 된다.


자기 영토이건 남의 영토이건 드나들 때는 반드시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며, 다른 나라의 보물을 빼앗아오면 빼앗긴 나라는 멸망하고 빼앗은 나라의 영토는 넓어지게 된다.
쉼터에서는 쉴 수 있으며, 쉬는 사람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두 나라가 연합해 협공할 수 있고, 그 연합을 당나라조약 이라고 하는데, 3개국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를 제외한 약한 두 나라가 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조약을 맺지 않았던 한 나라가 망하면, 조약을 맺었던 두 나라는 다시 적이 되어 싸움을 한다. 결국 보물을 3개 가지고 있는 나라가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승리한 순서대로 큰 영토를 차지하고 다시 놀이를 시작한다.


2) 육해공놀이

놀이하는 사람 가운데 힘과 체격 조건이 비슷한 사람 3명이 나와서 가위바위보를 한다. 여기에서 이긴 사람부터 순서대로 한 명씩 자기편을 뽑아가는 형식으로 3편으로 나눈다. 서로 자기편에 잘하는 사람을 뽑아가려고 노력한다.
놀이판을 그리고 대표격인 사람이 나와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순서대로 공군, 해군, 육군이 된다.


공군은 그려진 놀이판 밖의 모든 영역이 모두 공군의 땅이며, 육군은 중앙 원과 통로이고, 이를 제외한 지역이 해군의 땅이 된다. 해군 땅에는 문을 만드는데 이는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활동하기 가장 불편하고 항상 적의 침입을 당하기 쉬운 육군이 제일 불리한 조건에서 놀이가 시작된다.
모두 자기 땅에서는 두 발로 다닐 수 있지만, 남의 땅에 갈 때는 깨금발로 다녀야 한다. 즉 공군이 해군이나 육군 땅에 들어갈 경우 깨금발로 들어가야 하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금을 밟거나 싸우다가 외발이 땅에 닿으면 죽는다. 또 상대편이 밀거나 당겨 문이 아닌 곳으로 상대편 영역에 넘어가면 죽게 된다.


이와 같은 규칙에 의해 놀이가 시작되면 육군과 해군은 방어에 전념하고, 공군은 양진영을 넘나들며 공세적으로 놀이를 이끈다. 이 놀이는 다른 놀이와 달리 세 편으로 나뉘어 하기 때문에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다.
이 놀이에서도 동맹을 맺어 강한 상대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백신놀이와 닮은꼴이다. 즉 공군에 비해 육군과 해군이 약하기 때문에 두 편이 동맹을 맺는다. 동맹을 맺을 때는 한쪽 편에서 편 걸자. 라고 말해서, 상대편에서 수락하면 편을 맺어 서로 공격하지 않고, 만약 동맹을 맺지 않은 다른 편이 모두 죽거나 세력이 약해지면 편 떼자. 라고 해서 수락하면 동맹이 파기되어 서로 공격한다.
세 편이 전투를 벌여 어느 한 편이 두 편을 모두 탈락시키면 그 편이 공군이 되고, 가장 먼저 전멸한 편은 육군, 그 다음은 해군이 되어 놀이를 계속한다.

 

16. 골패

시대: (조선이전)

골패 유래

이규경의 오주연 문장전산 고 에는 우리나라의 골패에 소골, 미골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약용의 목민심서 에도 골패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놀이는 중국 송나라 때 생긴 놀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으나, 청나라 때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행해지던 이 놀이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한 까닭은, 놀이가 비교적 간단한 탓에 사행적 요소인 내기가 강조되면서 도박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는 놀이도구는 간단하지만 다양한 놀이방법이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이를 활용하여 일상 놀이로 발전시켰다.
골패는 점복도구로도 쓰였는데, 천패이선 24점은 24기를, 지패이선 4점은 사방을, 인패이선 16점은 사단을, 화패이선 8점은 대화원기유행팔절지간을 상징한 것으로 성수의 배열을 비유한 것이다.

 

골패 방법

1) 놀이도구
모두 32쪽인데 서양에서는 28쪽을 사용한다. 크기는 가로 1.2~1.4cm, 세로 1.8~2cm, 두께 0.4~0.5cm 정도로 작다. 모양은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 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효를 나타내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겼다.
1을 새긴 구멍은 가장 크고 14는 붉은색을 넣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검정색으로 칠했다. 32개 가운데 짝패가 22개이고, 홀패가 10개이다.

 

2) 놀이방법
놀이방법은 79가지이다. 그 중에서 꼬리 붙이기, , 여시, 골여시, 쩍쩍이, 톡 등이 주로 사용되는 놀이이고, 탑 쌓기나 거북패, 오관 등은 혼자 운수를 점치는 방법인데 놀이방법이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1)

이 놀이에는 놀이를 진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물주라고 한다.
5명이 놀이를 하는데 1인당 6개의 골패를 나누어주고 나머지 2개는 물주가 가지고 있는다. 이 놀이에는 마지막 장 또는 마지막 개수라는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처음 골패를 나누어 받을 때 놀이가 바로 끝날 수도 있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놀이가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주는 처음 시작할 때 남은 2개 가운데 골패 한 개를 갑 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갑으로부터 골패 한 개를 가져온다.
을 도 마찬가지로 골패 한 개를 내놓으면 물주는 갑이 내놓은 골패가 아닌 다른 골패를 을에게 건네준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골패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이 6개가 모두 짝이 맞으면 이겼다. 고 외친다. 과연 3쌍이 되었는가를 확인한 후 놀이가 끝난다.
다시 새로운 골패를 받아서 놀이를 계속 진행한다.


2) 꼬리 붙이기
두 사람이 노는 방법으로, 앞사람이 낸 숫자에 맞추어 패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먼저 선을 정하는데 정하는 방법은, 자기 골패 가운데 2 , 5가 있거나, 만약 둘 다 없으면 6 , 6이 있는 사람이 선이 된다.
선이 임의로 패 한 쪽을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은 그 끗수에 맞는 것을 이어서 내야 한다.
다음은 다시 선이 앞사람의 끗수에 맞는 것을 이어서 낸다.
상대편 숫자에 해당하는 것을 잇지 못하면 지게 된다.


3) 짝맞추기

2~4명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골패를 뒤집어 놓고 하나씩 들어 제일 높은 수를 든 사람이 선이 된다. 선은 6, 나머지 사람은 5쪽의 골패를 갖고 시작하며 남는 골패는 모아둔다.
선은 먼저 자신의 골패 중 짝패가 있으면 둘 다 내려놓고, 또 다른 패 하나를 더 내려놓을 수 있다. 짝패가 없으면 그냥 하나의 패만 내려놓는다.


다음 사람은 선이 내려놓은 하나의 패와 짝을 이루는 패를 가지고 있으면, 그 패를 집어와 짝이 있으면 2쪽을 내려놓는다. 짝이 맞는 패가 없으면 모아둔 골패 중 하나를 집어와 짝이 있으면 내려놓고 없으면 아무 패나 하나를 내린다.
다음 사람도 계속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다가 짝맞추기를 세 번 먼저 해서 내려놓으면 이기게 된다.


4) 골패의 용어
조사내려놓은 골패의 구멍수가 가장 많은 사람, 즉 꼴찌를 말한다.
삼시 : 등위와 관계없이 꿇어놓은 골패의 총 구멍수가 30이 넘는 사람을 말한다.
여덟 장을 모두 이어가서 한 개도 꿇어놓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데, 네 명 중에서 한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사람은 벌칙을 받거나 돈내기의 경우 돈을 내야 한다.


5) 골패의 세부규칙
첫판을 제외하고는 꼴찌를 한 사람이 선이 된다.
장원이 셋이고 조사가 한 명이면 돈을 내지 않는다.
돈을 낸 사람, 즉 조사가 둘일 경우 가운데 사람이 선을 잡는다.
구멍수가 가장 적은 사람이 동수인 경우 함께 돈을 나누어 갖는다.
한 명이 통을 해서 세 명 모두 돈을 물으면 일등이 다시 선이 된다.
5~6명이 할 때는 장원인 사람이 쉬고, 대기 중인 사람이 들어온다.
패를 나눌 때는 잘 섞어서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은 다음, 선이 2장을 먼저 가져가면 그곳에서부터 반 시계방향으로 2장씩 가져간다.

 

17. 공놀이(축국)

시대: (조선이전)

공놀이 유래

풀이나 짐승의 털, 가죽, 오줌보 등을 묶어서 둥글게 만들어 발로 차고 노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일로, 중국의 옛 문헌인 구당서 동이전에 고구려에는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공차기와 같은 공놀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삼국유사 권1 기이편과 삼국사기에 있다. 내용은 김춘추가 김유신의 집 마당에서 공차기를 하다 옷자락을 밟아 옷끈이 떨어졌는데, 김유신의 동생이 이를 꿰매주어 결국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도 공놀이가 이어져 무예도보통지 권4 격구에 보면 초학기에 말하기를 국은 곧 구라는 글자이므로 지금의 축국은 공놀이인 것이다. 옛날에는 털을 모아 묶어서 만든 공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뱃속의 어린애를 싸고 있는 태 같은 것을 사용한다. 생각건대 이것은 소의 오줌통으로 만든 공일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근래에 이르기까지 공을이용한 다양한 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공놀이 방법

1) 공차기

오늘날 축구처럼 정비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고 구문이 없어도 넓은 운동장이나 평평한 잔디밭이나 추수를 마친 논밭 같은 곳에서 하였다. 보통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공을 빼앗아 자기편끼리 가지고 놀거나, 마당 양끝에 종심선을 그어놓고 공을 몰아가다가 그 선 밖으로 차 넘기기 내기를 하였다.

 

한편으로는 구문을 설치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운동장 양끝에 구문을 하나씩 세우고 양편에서 각각 한 문씩 맡아 공을 먼저 구문으로 몰아넣기를 하는 것으로, 오늘날 축구와 비슷한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운동장의 중간에 구문을 세우고 그 양쪽에 두 편이 갈라서서 공을 차 넘기는 방법이다. 구문의 아래 부분에는 그물을 쳐서 공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족구와 같은 형태로 여겨진다.
그밖에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서로 주고 받거나 오래 차는 방식도 행해졌다.


2) 공 던지기 놀이
고려사 권41에 공민왕이 보았다는 척초희가 공 던지기 놀이로 여겨진다. 즉 단순히 풀 던지기가 아니라 작은 공 모양으로 풀을 둥글게 뭉치고 새끼로 엮어 만든 공을 던지고 잡는 송구와 같은 놀이로 보여진다. 풀뭉치공은 비록 공기를 넣은 고무공처럼 탄력은 없었으나 던지며 받는 놀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송구와 같은 공 던지기 놀이가 이미 고려 때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놀이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 수구

여성들의 놀이로서 손으로 공을 치며 노는 것이다. 구체적인 자료는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근대에 여성들 사이에서 놀았던 놀이라는 것만 전해진다. 후에 고무공이 나오면서 공을 땅바닥에 던져 튀어 올라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내리쳐서 다시 튀어오르게 하는 놀이가 이 놀이로 여겨진다.


4) 공 던져넣기
고려사와 악학궤 에 별도의 항목으로 포구락이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놀이가 당시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공 던져넣기는 놀이에서 발전하여 가무로 형상화되었다. 특히 오늘날의 농구와 같이 서로 공을 주고받아 던져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사람들을 웃기느라 진 편의 이마에 먹점을 찍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양반들의 오락으로 성행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8. 구슬치기

시대: (조선이전)

구슬치기 유래

구슬은 처음에 고운 흙으로 빚어 그늘에 말렸다가 이용하거나 시냇가에서 동그란 돌을 주워서 가지고 놀았다. 또는 단단하고 무거운 나무를 둥그렇게 깎아서 놀았거나 도토리·상수리 등의 열매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도자기를 구울 때 흙으로 빚은 구슬을 함께 구우면서 사기구슬이 등장하게 되고, 그후 일제강점기에 유리 사용이 많아지면서 그 부산물로 유리구슬이 등장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리구슬이 놀잇감으로 쓰이게 되었다. 6·25 전쟁 때 망가진 자동차나 탱크 등에서 쇠구슬이 나와 잠깐 가지고 놀기도 하였는데 보편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잠깐 가지고 놀기도 하였는데 보편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구슬치기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성행했던 겨울철 놀이였는데 요즘은 많이 하지 않는다. 이 놀이는 돈치기라는 엽전을 가지고 하던 놀이와 유사하다. 이 돈치기의 놀이규칙이 구슬치기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놀이방법이 많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 상원조에 땅에 구멍을 만들고 어른과 아이들이 편을 갈라 돈을 구멍에 넣고 구멍을 채운다. 맞추지 못하거나 또 잘못 맞춘 자는 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금파리를 돈으로 삼아 던지는 예도 있다. 라고 돈치기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구슬치기의 방법과도 유사하다. 따라서 돈치기에서 놀이도구가 구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돈치기 방법과 구슬치기의 방법이 많이 흡사한 것이다.

 

구슬치기 방법

1) 구멍에 넣기
인원은 2~4명 정도가 적당한데, 구슬이 많지 않을 경우 주로 하는 방법이다.
보통 마당이나 공터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판 다음, 순서대로 구멍에 구슬을 넣어서 모두 통과하면 상대에게 구슬을 한 개씩 받는 놀이이다.
먼저 일정한 간격으로 6개의 구멍을 파는데, 뾰쪽한 돌이나 꼬챙이로 땅을 조금 판 다음 발뒤꿈치로 몇 바퀴 돌리면 지름이 20cm 정도 되는 구멍이 된다. 구멍간의 간격은 1.5~2m 정도 되는데 더 멀게 하기도 한다.
누가 먼저 할 것인지 순서를 정하는데, 구슬을 던져 구멍에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들어가면 1등이 된다. 만약 두 명이 들어가면 두 명만 따로 다시 던져 순서를 정한다.


던진 구슬이 구멍에 들어가면 들었다 고 하고, 한 번에 성공하면 계속해서 다음 구멍으로 들 수 있다. 만약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실패한 구멍에서 출발한다.
구멍에 넣지 않고도 구멍에 넣는 것과 같은 효력이 발생하는 것을 맞추기 라고 하는데,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의 구슬을 자기 구슬로 맞추면 다음 구멍에 넣지 않아도 구멍에 넣은 것과 같은 효력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구슬을 자기가 원하는 구멍 앞으로 몰고 다니거나 상대방 구슬을 구멍 앞에다 하나씩 몰아 놓고 쉽게 한바퀴를 돌기도 한다.
이 놀이는 상대방의 구슬을 따먹기보다 구슬을 구멍에 넣는 재미로 하며, 한 명이라도 모두 통과하면 다시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2) 알까기

가장 단순하면서 쉬운 방법으로 서너 명이 할 수 있는 놀이이다.
먼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여, 1등부터 차례로 바닥에 구슬을 내려놓는다. 모두 내려놓으면 1등이 바닥에 있는 자기의 구슬을 주워 던져서 다른 사람의 구슬을 맞힌다. 만약 맞히면 그 구슬을 따게 되고, 맞히지 못하면 구슬이 멈춘 자리에 그대로 놓아둔다. 따게 되면 따낸 자리를 기점으로 한 번 더 할 기회를 갖는다. 맞히지 못하면 다음 번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데 방법은 위와 같이 한다.
다른 구슬이 너무 멀리 있거나 장애물 밑에 있어서 맞히기가 어려우면 맞히기를 포기하고, 자기 구슬을 아무 곳에나 옮겨놓을 수 있다. 옮겨놓을 때 상대방을 유인하기 위해 아주 가까이 또는 멀리 놓거나, 뒤에 장애물이 있는 곳에 놓는다.


3) 삼각형치기

여러 명이 놀이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놀이이다. 구슬을 정해진 개수만큼 삼각형 안에 넣고 순서대로 구슬을 맞혀 삼각형 밖으로 나온 구슬을 따먹는 방법으로, 세모치기 라고도 한다.
먼저 땅바닥에 한 변이 25cm 정도 되는 정삼각형을 그린 다음, 4~5m 거리 떨어진 앞쪽에 구슬을 던지는 선을 그린다. 그 다음 2~3개씩 자기 몫의 구슬을 삼각형 안에 넣는다.
구슬을 삼각형 안에 넣었다는 것은 놀이할 의사가 있음을 나타낸다. 구슬을 안에 넣은 사람은 누가 먼저 할 것인지 순서를 정하는데, 가위바위보로 하지 않고 삼각형에서 선 쪽으로 구슬을 던져 선으로부터 가까운 사람이 먼저한다. 만약 구슬이 선에 닿으면 1등이 된다. 구슬이 선 바깥쪽으로 나간 사람은 꼴찌가 되는데, 여러 명이 밖으로 나가면 선으로부터 가까운 쪽부터 앞 순서가 된다.


순서가 결정되면 차례로 굴리거나 던져 삼각형 안에 있는 구슬을 삼각형 밖으로 내보낸다. 구슬이 한 개라도 삼각형 밖으로 나오면 또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구슬이 멈춘 자리에 자기의 구슬을 놓아두고 다음 사람에게 차례를 물려준다.
다른 사람이 엄지구슬을 맞히면 지금까지 딴 구슬을 맞힌 사람에게 다 주고 그 사람은 죽게 된다. 죽는다는 것은 그 판에서 더 이상 구슬치기 할 기회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만약 삼각형의 구슬을 빼내려다가 엄지구슬이 삼각형 안에 들어가거나 삼각형 선에 닿으면 지금까지 딴 구슬을 삼각형 안에 다 내놓고 죽는데 이를 토하기라고 한다.
삼각형 안에 구슬이 하나도 남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다 죽으면 그 판이 끝나고 다시 자기 몫을 넣고 시작한다.


4) 벽치기

서너 명이 구슬치기를 할 때 하는 방법으로 벽을 이용한다고 해서 벽치기라고 한다. 벽을 이용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벽에 구슬을 대고 차례로 벽을 타고 떨어뜨려 다른 사람의 구슬을 맞히면 그 구슬을 갖는 방법도 있고, 가장 멀리 가서 멈춘 사람이 나머지 구슬을 모두 갖는 방법도 있다. 그밖에 자치기의 원리와 만난 오부십부 가 있는데, 이는 벽에서 멀리 간사람 순서로 다른 사람의 구슬을 쳐 멀리 보낸 거리만큼 구슬을 따는 방법이다.

 

즉 가장 멀리 간 구슬이 1등이 되는데, 구슬과 구슬 간격이 손으로 한 뼘이 되면 임의의 동작으로 쳐서 멀리 보낼 수 있고 한 뼘이 더 되면 자기 구슬의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의 구슬을 친다. 다른 사람의 구슬을 맞히지 못하면 허탕이 되고, 만약 맞히고 멀리 가면 상대의 구슬을 거리에 따라 5보에 1개씩 계산해서 따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보면 4개의 구슬을 따게 된다.


5) 홀짝과 쌈치기
홀짝은 두 명이 주로 하는데, 두 명 중에 한 명이 구슬을 잡고 다른 한 명은 그 손에 쥔 구슬이 홀수인가 짝수인가 알아맞히는 놀이이다. 손에 구슬을 잡고 있는 사람이 홀짝 하고 외치면 상대는 홀수인지 짝수인지 대답하고, 그에 대한 구슬을 건다. 예를 들어 구슬을 잡은 사람이 8개를 쥐고 있는데 상대방이 짝 하고 대답하면 맞힌 것이다. 그리고 구슬을 5개 걸었으면, 구슬을 쥐고 있는 사람은 5개를 물어줘야 한다. 그러나 만약 상대방이 홀 하고 대답하면 구슬을 잡은 사람이 따는 것이다.

 

19. 기세배

시대: (조선이전)

기세배 유래

기세배와 기싸움은 모두 농기를 도구로 하여 이루어진다. 농기가 신이 깃들인 대, 즉 신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농기의 깃대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나무로 만들어 수직으로 세운 것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들로 신단수 이래의 신목, 솟대, 서낭대, 농기 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솟대는 살아 있는 나무에서 잎과 가지를 제거한 나무, 즉 생명체로서는 수명을 다했지만 주술 종교적 생명을 새롭게 부여받은 나무이다. 솟대와 관련된 오랜 기록은 후한서 동이전 마한조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두레노동이 활성화하고 풍물이 군사적 성격을 수렴하면서, 깃발이 단순한 천에서 점차 농사를 상징하는 농자천하지대본으로 정형화된 것으로 보인다. 농기를 가지고 하는 놀이로는 기세배와 기싸움, 그리고 서낭대싸움이 있다. 서낭대를 서로 밀고 눌러 누가 더 센가를 겨루는 서낭대싸움은, 단지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닌 정초 풍년을 빌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싸움은 하지 않더라도 농기에 세배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서낭대싸움은 서낭대를 가지고 겨루는데 비해, 기싸움은 농기를 도구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농기를 앞세운 풍물패간의 싸움이다. 따라서 서낭대 싸움에서 발전하여 기싸움이 진행되다가, 기세배는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춰 나중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무라야마 지준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충북 제천의 기뺏기와 전북 부안의 기싸움이 소개되고 있다. 이 놀이들은 모두 한강 이남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진 놀이들이다.

 

기세배 방법

전북 익산 금마면에서 행해지는 기세배의 놀이과정을 간단하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인근 12개 마을에서는 부잣집이나 유지의 집을 돌아가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경비를 추렴한다. 이 경비로 기세배놀이 준비를 하는데, 준비가 끝나면 정월 대보름날 여러 마을의 농기들은 옥동마을의 사정거리에 모여 있다가 막내 신촌마을로 대열을 지어 들어간다.

 

각 마을의 농기를 맞이한 신촌마을은 다른 마을 기들을 형님 마을인 향교골로 인도한다. 그러면 향교골 풍물패는 신촌마을의 풍물패와 합세하여 다음 형님 마을인 누니를 찾아간다. 누니마을의 풍물패는 신촌, 교동 두 마을의 풍물패와 소동농기대를 맞이한 다음 이들과 함께 다음 형님인 서편마을로 향한다. 이어 구정리로 갔다가 그 위 형인 건지리와 합세하여 옥동으로 향한다.

 

옥동은 부선생 마을로 앞의 마을 수백 명 가까운 일행을 맞이하여 마을 구석구석을 누빈 다음 맏형 마을인 대장리로 향한다. 선생 마을인 대장리에 도착하면 기세배가 벌어지는 옥룡천으로 인도하여 잠시 쉬었다가 농기 아래 제상을 차려놓는다. 그런 다음 각 마을의 풍물들이 각기 기놀음과 묘기를 부리고, 잠시 후 선생 마을인 대장리 좌상이 기세배요. 라고 외치면 대장리 농기는 서편으로 이동하여 동편에 정렬한 각 마을기와 맞선다. 그러면 부선생 마을 옥동의 농기가 선생 마을 농기 앞에서 삼배를 한다.

 

보통 40~50도 정도 각도로 기를 굽히는데, 대장리 사람들이 더 굽히라고 소리치고 장내에 뛰어들어 옥동의 기를 누르려고 하면, 옥동마을 주민들은 이를 보고 달려나와 더 이상 굽히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리하여 여러 가지 가벼운 실랑이와 완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대장리 총각 좌상이 답례요. 하고 약 15도 정도 굽히면 옥동에서 더 굽히라고 소리치는 등의 소란이 일어난다. 같은 방법으로 차례로 형에게 세배를 하고 답례를 한 다음 마지막 신촌마을까지 세배를 마치면, 옥동의 총각 좌상이 기세배 끝이요. 또는 군례 끝이요. 라고 크게 세 번 외친다.

 

기세배 행사가 모두 끝나면 각 마을의 농기들이 풍악에 맞추어 대장리 기를 선두로 하여 원을 그리며 장내를 돌면서 차례로 자리로 돌아가고, 대장리에서 준비한 술과 안주를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잠시 후 한바탕 더 놀고 막내 신촌마을이 맨 처음 자기 마을로 떠나고 차례로 교종, 누니, 서계리, 구정리, 건지리, 옥동 대장리가 자기 마을로 간다. 이때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풍물을 치며 간다.

 

20. 꼭두각시놀이

시대: (조선이전)

꼭두각시놀이 유래

이수광 의 지봉유설 에는 중국문헌인 운회를 인용하여 괴뢰목우희 는 언사가 임금에게 바친 놀이로, 고구려에도 있었으며 대체로 오래된 놀이이다."라고 기록하면서, 그 시원을 삼국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에 관한 기록이 들어 있는 중국의 에는 두 개의 신이 있었는데 하나는 나무로 부인의 형상을 깎아 만든 그들의 시조인 부여신과, 다른 하나는 부여신의 아들 고등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일찍부터 나무로 깎은 인형이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시대의 동국세시기 에도 이런 나무인형 숭배전통이 기록되어 있고, 해동역사 권22에는 삼국시대에 인형을 만들어 즐기던 놀이가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당시 꼭두각시놀이의 주제가 어떤 것이었는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놀이의 시원이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고려시대 당시 인형은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게 만들었고, 얼굴도 감정을 나타내게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고려사절요 권11에도 이런 놀이가 소개된다. 혜민국 남쪽 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이 동서 두 패로 나뉘어서 각기 풀을 엮어, 여자아이를 비단옷을 해 입히고 또 하녀 하나를 단장시켜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앞에 사방 한 발되는 탁자를 놓고서 금옥으로 장식하고 음식을 차려놓았다. 구경꾼이 가득 모여들었다. 두 패가 아름다움과 교묘함을 다투면서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대엿새 동안 하다가 끝내고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고려시대까지의 인형놀이는 그 주제나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인형놀이는 주제가 전해지고 있다. 최영년 의해동죽지 홍동지 편에는 벌거숭이 홍동지를 희화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무라야마 지준 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이 놀이가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보통 꼭두각시놀음 홍동지놀이 박첨지놀이 란 명칭이 가장 많이 보인다. 이로 보아 일제강점기까지 이 놀이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꼭두각시놀이 방법

1) 인형

꼭두각시에 사용하는 인형은 막대기인형, 주머니인형, 신체부위에 줄을 매어놓고 잡아당겨 조종하는 인형, 몸통을 줄에 꿰어 그 줄을 잡아당겨 조종하는 인형 등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인형이다. 대부분이 막대기인형과 줄을 매 잡아당겨 조종하는 인형의 복합형이다. 보통 적당한 크기의 통나무로 얼굴과 몸통을 깎아 만들어, 아래 부분은 손잡이가 되게 하고 옷을 입혀서 사람의 형상과 닮은꼴을 이루게 하였다.

대부분의 인형은 두 팔을 움직여서 몸 동작을 나타내게 하였는데, 관절부분은 철사못을 꿰어 연결시키고 관절부분 안쪽에 끈을 매어 속으로 잡아당기면서 움직이게 하였다. 턱이 움직이는 인형에는 안에 고무줄과 끈을 매어 고무의 수축작용과 줄을 당기고 놓고 하는 힘을 이용하여 동작하게 하였다.

 

전해오는 꼭두각시놀이에 등장하는 인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박첨지, 꼭두각시, 홍동지, 덜머리집, 상좌, 홍백가, 표생원, 묵대사, 영노, 귀팔이, 평안감사, 작은 박첨지, 박첨지의 손자, 상주, 동방삭이, 잡탈, 관속, 상두꾼, 이시미, , , 청노새 등이며, 소도구로절, 부처, 상여, 명정, 만장, 영기, 방울, 부채 지팡이 등 40여 가지가 있다.

 

인형을 움직이는 부분은 그 인형의 동작하는 내용에 따라 다르다. 각 인형들이 움직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박첨지는 눈, , , 꼭두각시는 눈, , 홍동지는 팔, 승려는 목, , 허리, 동방삭이는 눈, , 팔 이무기는 입과 전신이 움직이고 새는 공중을 날 수 있도록 하였다.

 

2)놀이의 내용

놀이의 내용은 주제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은 박첨지와 관련된 내용이고, 둘째 부분은 평안감사 와 관련된 내용이다.

첫 부분은 박첨지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돌아다니는 장면, 파계승의 타락한 생활 장면, 박첨지의 본처와 첩 사이의 싸움 장면, 독사에 물려 죽을 뻔한 박첨지를 홍동지가 구원해주는 장면 등이고, 둘째 부분은 평안감사의 꿩사냥 장면, 개미에게 물려 죽은 평안감사의 상여 장면, 절을 짓고 허무는 장면으로 엮어져 있다.

꼭두각시놀이는 모두 8막으로 되어 있으나, 8막 전부가 연결된 것이 아니고, 일부 막을 예외로 하고는 각 막이 독립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악사들은 무대 앞에 늘어앉아 등장한 인물의 소리와 춤에 맞추어 음악을 연주하고, 또 무대를 쳐다보며 인형과 대담도 하였다.

 

3) 꼭두각시놀이의 순서와 줄거리

남사당 꼭두각시놀이

박첨지 유람막 상좌춤막 꼭두각시막 이시미막 평안감사 매사냥막 상여막절짓고 허는막

서산지방 박첨지놀이

등장인물 나오는 순서로 박첨지가 나오고 박첨지 동생, 박첨지 큰마누라, 영노, 홍동지 길 닦기, 평안감사 꿩사냥, 구렁이와 홍새, 평안감사 사망, 상여, 스님, 절 신축, 소경 눈뜨기 순이다.

장연지방 꼭두각시놀이

1막에는 박첨지가 허술한 도포를 입고 부채춤을 추면서 무대에 나타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는 본래 서울에서 살던 박첨지인데 팔도 강산 구경차 집을 떠나 각지를 유랑하다 여기에 왔다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산바지와 재담을 진행한다.

 

2막은 박첨지가 나와서 자기 딸이 나와 춤을 춘다고 소개하고 들어가면 박첨지 딸, 상좌중, 상전중, 목량청, 현묵대사 등이 나와 주로 춤동작으로 중들의 타락한 생활상을 폭로한다.

3막과 제4막에서는 삼천갑자, 장난활자, 목량청 등이 나와서 재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5막에서는 평안감사가 정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농삿일이 한참 바쁜 시절에 몰이꾼을 강제로 동원하여 꿩사냥에만 열중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6막에는 한량인 장안활자와 박첨지의 딸과 함께 나와서, 도라지 타령 을 부르며 노는 장면을 보여준다.

7막에는 박첨지의 딸이 조밭에 새를 쫓으러 갔다가 이무기한테 물려 죽는다. 박첨지가 그 뒤를 따라 새 쫓으러 나갔다가 이무기에게 물려 거의 죽게 된 것을 홍동지가 구원한다.

8막에서는 평안감사가 포수를 동원하여 꿩사냥에 몰두하다가, 꿩을 먹고 그 볏이 목구멍에 걸려 죽는다. 벌거숭이로 상여를 메고 가는 홍동지의 형상은 당시의 사회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마감장면에서는 인형 전부가 나와서 장단에 맞추어 각기 재간껏 춤추고 들어간 다음, 상좌중 둘이 나와서 금강산에 절간을 지었다가 헐어버린다.

 

21. 농주

시대: (조선이전)

농주 유래

어느 시기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행해지던 놀이로 보인다.

고구려 팔청리고분벽화 와 수산리고분벽화 에 왕이나 귀족의 행렬 앞에서 걸어가며 여러 개의 공을 던지고 받는 그림이 있다. 또 신라 후기에 최치원 이 지은 향악잡영 에는 농주하는 모습을 묘사되고 있다.

그밖에 조선시대 성현의 허백당집 에 공 놀리며 공교한 술법이 많고 라고 표현한 시가 있다. 이 시를 볼 때 농주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까지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놀이가 조선시대의 잡희 중에 빠지지 않고 국가의 큰 행사에서 연희되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이 놀이는 오늘날의 서커스에서 간혹 볼 수 있는데,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하던 놀이였다. 지금도 종종 노인들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근래에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던 놀이로 여겨진다.

 

농주 방법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어디서나 임의의 시간에 할 수 있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놀 수 있다.

 

1) 놀이 도구

농주는 주먹보다 작은 귤 정도 크기의 둥근 모양으로, 재료는 쇠붙이나 나무로 만든다. 위로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 겉에는 여러 가지 색을 칠한다. 근래에는 헝겊으로 작은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곡식을 넣은 '콩주머니'를 만들어 논다.

 

2) 놀이방법

혼자 하는 방법

한 손으로 두 개를 가지고 놀 때: 두 개를 손에 넣고 하나를 위로 올린 다음 떨어지기 전에, 손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고 내려오는 것을 받는다. 계속 이와 같이 한다.

두 손으로 세 개를 가지고 놀 때: 왼손과 오른손에 한 개씩을 쥐고 위로 한 개를 올린 다음, 한 번은 오른손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받고, 다음 번엔 왼손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받는 식으로 되풀이한다.

여러 개를 가지고 놀 때: 두 개, 세 개가 익숙해지면 여러 개를 가지고 노는데, 잘 하는 사람은 다섯 개 이상을 가지고 놀기도 한다. 중국 장자 의 서무귀편 에 시남의 의료가 환령을 잘 놀리므로 항상 여덟 개는 공중에 있고 한 개는 손에 있었다. 라는 기록에 보이듯이 아홉 개도 돌리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기술: 여러 개의 농주를 가지고 다리 밑으로 올려 던져 받는 방법, 다리 밑으로 뒤로 던져 앞으로 받는 방법, 옆으로 던져 위로 올리기 등의 다양한 기술이 있는데, 이는 아주 어렵기 때문에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둘이 하는 방법

두 명이 마주보고 여러 개의 농주를 주고받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한다. 만약 중간에 흐트러지면 모두 떨어지므로 두 사람 모두 일정한 숙련이 된 다음에야 능숙하게 할 수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국가행사에서 연희되던 방법은 둘이 하는 방법이 주종을 이루었다.

 

22. 달맞이

시대: (조선이전)

달맞이 유래

설 명절 다음에 오는 명절은 정월 15일인 대보름 또는 상원 이라는 명절이었다. 대보름 명절은 초하루부터 시작된 정초 명절이 끝나는 날이기도 하였다. 대보름을 명절로 맞았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권1 기이 편 사금갑조 에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대보름 명절이 9개 민속 명절의 하나로서 널리 일반화되었고, 그 전통은 그대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대보름은 달의 명절이다. 따라서 새해에 들어서 첫 보름달은 다양한 풍속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으뜸이 달맞이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 세시풍속기 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먼저 동국세시기 상원조 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달맞이하는 것을 영월이라고 한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 그리고 달빛으로 점을 친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들 징조이다. 또 달이 뜰 때의 형체, 대소, 심부, 고저로 점을 치기도 한다. 또 달의 윤곽과 사방의 후박으로 1년 동안의 농삿 일을 점친다.

 

달의 사방이 두꺼우면 풍년이 들 징조이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이며, 조금도 차이가 없으면 평년작이 될 징조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풍속을 적은 경도잡지 상원조 에도 당시 서울의 달맞이 풍속을 황혼이 되면 횃불을 올리고 높은 곳으로 오른다. 이것이 달맞이로서 달을 먼저 본 사람이 이 해에 길하다는 말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런 풍속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전국에 걸쳐 달맞이를 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달맞이 방법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가 달을 맞고 그 달에게 새해의 소망을 비는 것인데,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각 지방의 달맞이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충북 충주지방에서는 정월 14일에서 16일 사이에 만월이 되는 날 저녁에, 망월 이라고 하여 되도록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달뜨는 것을 보고 횃불을 흔들면서 정월 대보름날 망월이어 망월이어 하고 외친다. 달 떠오르는 것을 남보다 먼저 보면 운수가 좋아서 총각은 장가를 들고 새신랑은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한다.

 

또 솔가지로 만든 달집을 달이 뜰 때 태우기도 한다.

평안북도 구성지방에서는 여자들이 달을 맞으러 높은 곳에 올라 달이 뜨면 거울에 달의 모습을 비춰본다고 하고, 부산 동래에서는 만약 달을 맞으러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고 집안에 있으면 자리를 깔고 냉수를 올린 다음, 동쪽의 달을 향해 빈다. 이때 부인이 종이를 태워 올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달을 맞이하면서 신수안과태평 이라고 외치는 곳도 있고, 아이들은 따로 작은 횃불을 만들어 나이 수대로 끈을 묶어 달이 뜰 때 그 횃불을 들고 달에 절을 한다고 한다.

그밖에 전국적으로 달맞이와 달집태우기가 성행했는데, 대부분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을 보고 한 해 운수를 점쳤으며, 가장 먼저 달이 뜨는 것을 본 사람이 운수대통 한다고 한다.

 

 

참고자료

 

http://www.daum.net

http://www.naver.com

이상호, 전래놀이 101가지

이철수, 우리놀이 백가지

문화체육부, 전통놀이 모음집

정병호, 한국의 전통춤

조완묵,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

(문화원형백과 전통놀이),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상수, 한국의 씨름과 그네의 연구

김광언, 민속놀이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 연구

심우성, 우리나라 민속놀이

김종만, 아이들 민속놀이 백가지

이상호, 놀이연구회, 가슴 펴고 어깨 걸고

문화재연구회, 중요무형문화재 2-연극과 놀이

리재선, 우리나라의 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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