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입시(사탐 세특)

전통 놀이문화(조선시대)

kjk쌤 2024. 9. 2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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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져 가는 우리전통 놀이문화

 

1. 서론

조사동기 및 목적

현대 사회에서는 컴퓨터오락게임이나 지능개발놀이 등이 아이들의 놀거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오락게임의 경우 대부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정서는 더욱 메말라가고 있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개인과 전체의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 놀이는 어린이의 생존방식에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놀이에서는 그러한 조화와 협동의 부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저희 동아리에서는 우리나라 전통놀이 문화를 찾아보고 배워 보고자 조사를 하게 되었다.

 

연구방법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배웠던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필요한 자료는 인터넷을 참고하였다. 더 많은 자료를 얻기 위하여 국회 도서관의 자료도 열람해 참고자료로 삼았다.

 

. 본론

1. 전통놀이의 개념

전통놀이는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놀이 형식에 담아 후세에 전하는 일종의 문화프로그램으로서 교육활동의 역할을 한다. 전통놀이를 통해 후손들은 민족 고유의 정서를 경험하고 전통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학습하여 자신들의 사고와 행동에 이를 반영하여 새로운 놀이문화를 창출해 나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통놀이는 세계, 인간, 문화를 연결짓는 고리로 평가된다. 전통놀이란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여러 가지 놀이로서 황토색을 지니고 전통적으로 늘 행하여 오는 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대로부터 고유성, 지속성을 지니는 놀이이다. 이러한 전통놀이의 유래나 생성동기를 살펴보면 단지 재미와 즐거움을 찾기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사회의 신앙과 가치관이 효율적이고도 새로운 생산을 위한 준비와 개념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2. 전통놀이의 유형

전통놀이의 유형은 유아, 청소년,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놀이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또한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있는가 하면, 어른들만이 하는 놀이, 소년, 소녀들끼리 하는 놀이, 여자들 간에 혹은 남자들 간에만 하는 놀이가 있다.

 

3. 전통놀이의 유형 과 유래 및 시대별 분석

시대별 분석

조선시대

1. 진놀이

시대: (조선시대)

진놀이 유래

진놀이는 옛날에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이것이 재미있어서 훈련할 때 외에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하면서 놀이가 되었다. 그래서 놀이이름도 군사용어인 진이 그대로 남아 진놀이라고 한다.
견첩록 에는 조선 중종 때 어떤 사람들이 제자들을 데리고 음모를 꾸민다고 하여 왕명으로 아이들을 체포하였는데, 판명된 바에 의하면 남산에서 진을 정하고 편을 갈라 진놀이를 하고 있었다.

 

고 소개되어 있다. 그 이전 기록은 없기 때문에 언제부터 이 놀이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고, 그 이전부터 시작된 놀이로 판단된다.
근세 자료로 무라야마 지준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에 따르면, 전국 각 지방에서 이 놀이가 조사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까지 가장 성행하던 놀이로 판단된다.

 

진놀이 방법

1) 진놀이

놀이하는 사람 모두를 두 편으로 나누고 각 편에서는 눈에 띄는 기둥, 즉 나무,전신주, 철봉, 농구대 등을 진으로 정한다. 자기편 진과 상대편 진과의 거리는 놀이하는 사람의 수와 관계 있다. 만약 사람이 10명을 넘을 정도로 많다면 약 20~30m가 적당하고, 인원이 적다면 10~20m 정도가 적당하다.
진이 정해지면 양쪽에서 시작한다. 라고 외친 다음 놀이가 시작된다.
가장 중심 규칙은 진으로부터 늦게 나온 사람이 먼저 나온 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잡는다는 것은 상대의 몸 아무 곳이나 치는 것을 말한다.


먼저 나온 상대방 사람을 잡아 자기편 진에다 가두어놓는 것을 포로 만들기라고 한다.
포로가 된 같은 편 사람을 손으로 쳐주면 그 사람은 살아나 다시 자기 진지로 돌아올 수 있다. 단 상대방보다 먼저 나왔어도 포로를 잡아가는 동안이나 자기편을 구해내는 동안에는 쳐도 잡히지 않고 보호받는다. 이런 규칙을 보호라고 한다.
상대편 사람을 모두 포로로 만들거나, 상대방이 한눈을 팔 때 상대방 진지를 손이나 발로 짚으면 이기게 된다.

이 놀이에서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진에서 나왔다고 해도 상대편에서 1명이라도 늦게 나오면, 모두 그 사람에게 채이게 된다. 따라서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나와야 유리하다. 때문에 각 편에서는 대장을 두어 대장이 지시를 하거나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상대편 포로가 많으면 수적 열세인 상대편의 진을 치러 나간다. 여럿이 진을 향해 공격하고 수비하는 사람은 진을 잡고 방어하지만 대부분 진을 점령당해서 지게 된다.
서산지방에서는 겨울철에 얼음판에 진을 그려놓고 위와 같은 방법으로 썰매를 타면서 하기도 한다.


2) 나이먹기

진놀이에서 발전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놀이로, 나이라는 요소가 결합된 놀이다. 즉 진놀이에서 누가 먼저 나왔는가에 대한 혼란을 나이라는 요소로 극복하였는데, 기본적인 원리는 진놀이와 같다.
편을 나누거나 진을 정하는 것은 진놀이와 같다. 또한 같은 나이일 경우에는 진놀이처럼 늦게 나온 사람이 먼저 나온 사람을 칠 수 있고, 만약 치게 되면 나이를 1살 먹는다.


나이를 먹는 방법은 위와 같이 상대를 치면 1, 상대편 진을 치면 2살을 먹게 된다. 또한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을 치면 나이를 1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이가 적은 사람은 도망 다녀야 한다. 단 나이가 적은 사람도 같은 편 사람과 손을 잡으면 나이가 많아진다. 즉 한 사람은 3살이고 또 한 사람은 2살이면 5살이 되어 4살까지 칠 수 있다.
진을 잡고 있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상대편을 치면 나이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이가 적은 사람은 진을 치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나이가 적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많아져 30, 심지어 70살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나이가 많으면 칠 수 없기 때문에 진을 잡고 길게 팔을 늘려 공격하기도 한다.
놀이의 승부는 자기편의 나이를 합해서 많은 편이 승리하거나,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200살이든 300살이든 내기를 해서 먼저 그 나이에 도달한 편이 이긴다.

 

2. 가마싸움

시대: (조선시대)

가마싸움 유래

옛날 의성의 남부에는 봉강, 재정, 성무청, 삼일제 등 네 서당이 있었고, 북부에는 덕록 서당 한 곳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추석 때가 되면 훈장으로부터 말미를 받아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를 기해 각기 가마를 만들어 남부와 북부가 겨루었다고 한다. 어리게는 7~8세부터 위로는 20세 청년까지 60~70여 명의 학동들이 가마싸움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때 사용하는 가마는 실제 가마가 아닌 모형 가마로, 그 주위에 깃발을 세워 상대의 가마를 부수는 싸움이었다. 이런 가마싸움은 아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하던 가마싸움 가마타기는 다른 형태로, 차전놀이나 고싸움과 같은 집단놀이였다.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놀이의 기원 및 유래에 대해서는 별로 밝혀진 것이 없고, 다만 놀이방법과 내용을 조사한 기록은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경북편 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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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싸움 방법

훈장을 대신한 접장을 대표자로 삼아 가마싸움을 준비한다.
먼저 가마와 기를 만드는데 가마는 나무로 높이 1m, 길이 1m 70cm, 가로 1m 20cm 정도로 하고, 밑에는 직경 50cm쯤 되는 바퀴를 네 개 단다. 그리고 가마에 끈을 달아 앞에 두 줄, 뒤에 두 줄로 잡아끌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가마 속에는 애호박을 따서 먹으로 사람 얼굴을 그려, 이것을 가마 속에 넣어놓고 이를 '원님'이라고 부른다.

 

깃발은 여러 가지를 만드는데 사령관기 1, 부사령관기 2개와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청룡기, 백호기, 주작기, 현무기 각 2, 청도기와 영기 각 2개를 만들어 대나무로 만든 대에 걸고, 사령관기에는 꿩 깃을 달아 구분한다.
추석이 되어 가마를 끌고 마을을 누비고 다니며 기세를 올리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응원을 하고 박수를 치며 격려한다. 이때 행렬의 순서는 영기청도기청룡기백호기주작기현무기총사령관기공격학동대가마호위군학동대가 된다.


뒤에 따르는 호위군학동들이 앞에 가는 마부 하고 외치면 공격군 학동들이 어이야 하고 답을 하고, 이어 앞에 가는 학동들이 뒤에 가는 마부 하고 외치면 마찬가지로 어이야 하면서 응답한다. 다시 후속하는 학동들이 니 말 좋다 자랑 마라 하고 외치면 앞에 가는 학동들도 받아서 니 말 좋다 자랑 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이렇게 주고받으며 사기를 높이면서 마을을 누비고 다니다가 시장 넓은 마당에 모인다.
시장에서 서로 각 편이 대치하여 한참 서로를 헐뜯는 입씨름을 하다가, 총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접전이 벌어진다. 앞에 있는 공격군에 해당하는 학동들은 동태머리꾼이라고 하는데, 이 동태머리꾼은 학동들 중에 힘이 센 사람이 맡는다. 뒤에 호위군학동들은 가마를 둘러싸고 적군들이 가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총사령관의 지휘에 의해서 동태머리꾼은 적군을 떠다밀고 젖히고 적의 가마에 접근하려고 애쓰는데, 이때에 공방전이 벌어지고 부상당하는 사람이 많이 생긴다. 전진하고 후퇴하고 좌우로 빙빙 돌다가 틈만 있으면 뚫고 들어가 가마와 가마를 부딪치게 하거나 발로 상대편 가마를 차고 부순다. 또 적군의 기를 많이 빼앗으려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정신없이 밀고 당기고 싸우다보면 가마는 부서지고 기를 뺏고 빼앗기면서 승부가 결정된다. 승자는 빼앗은 기를 높이 들고 기세 당당하게 마을을 누비고, 마을 사람들은 승리를 축하해준다. 마을 청장년들이 풍물을 치며 환영하는 경우도 있다. 가마싸움에 이긴 쪽의 서당에서는 그해 과거에 많이 합격한다고 해서, 학동뿐 아니라학부형들도 기뻐했다고 한다.

 

3. 가마타기

시대: (조선시대)

가마타기 유래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당시에 가마를 탄다는 것은 주로 양반이요 시집을 가는 날과 같이 특정한 날의 주인공이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은 이를 모방하여 자기들끼리 가마의 모형을 만들어 놀게 되면서 생겨난 놀이로 여겨진다.
가마에 탄 아이를 앉히고 부르던 노래는 권이 권이 되었는가, 장닭 국권이 되었네 라고 하면서 분위기를 돋우웠다고 하고 이 놀이가 일본에 전래되어 우차라는 놀이로 불리운다. 우차놀이는 와싸와싸라는 소리를 지르며 하는데 일본에서는 가마 탄 사람을 신으로 여기는 것이 다르다.


두 사람이 손을 서로 엇걸어 잡아 가마로 삼고, 그 위에 다른 한 사람을 태워서 일정한 거리까지 실어다 준 다음에 차례를 바꾼다 일제시대에 놀이방법이 소개되어 있다고 해서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 보다 가마라는 운송 도구를 활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증거로 아이들의 노래 내용이 일제 시대의 내용을 담기 보다 훨씬 이전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마가 운송수단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시기인 1960년대에도 이 놀이가 조사되고 있음을 보면 사람들 사이에 가마의 존재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문화재관리국 에 의해 19691982년까지 조사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에는 전북, 경기, 충남 등지에서 행해지는 가마타기 놀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중 전북지방의 놀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남녀의 구별 없이 주로 어린이들의 놀이로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자기의 바른 손으로 자기 왼팔목을 잡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바른 팔목을 서로 쥐어 네모진 앉을 자리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을 태우고 ~시집간다, ~장가간다. 를 마탄 시늉을 하는 놀이이다. 전라북도 전역에 걸쳐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어린이 놀이 중의 하나이다. 이 놀이는 북한의 놀이 소개서인 민속놀이와 명절 하권에도 소개되고 있고 금산 지방의 민속놀이를 소개한 금산의 민속놀이에도 그 지방의 놀이로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남한과 북한 전 지역에서 고르게 소개되고 있음은 그 만큼 널리 많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마타기 방법

1) 목표물 돌아오기
20~30명이 편을 나누어 놀이를 하는데, 두 사람이 마주서서 오른손으로 자기의 왼 팔목을, 왼손으로 자기편의 오른 팔목을 꽉 잡아 우물 정자 모양의 네모진 가마를 만든다.
그 위에 자기편 한 사람을 태우고 시작 신호와 함께 말을 달려 목표물을 향해 뛰어 돌아온다. 그 다음 자기편 사람에게 이어달리기 식으로 연결한다.
이같이 달리기를 되풀이하여 먼저 돌아온 편이 이기게 된다. 말이 달릴 때 장가간다. 라고 외치면 상대편에서 시집간다. 라고 답하여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밖에 세 명이 하는 방법이 있는데, 가위바위보를 하여 1등한 사람을 가마 위에 태워주는 방법이다. 즉 진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서서 우물 정자형의 가마를 만들고, 이긴 사람이 그 위에 앉아 두 팔로 좌우의 아이 어깨를 잡고 미리 정한 거리를 갔다가 되돌아오는 방식이다. 돌아와서는 다시 가위바위보로 가마 태울 사람을 정하고 계속 한다.

 

2) 가마싸움
편을 나누어 우물 정자 형 가마를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태운다.
양 팀이 서로 가마에 탄 상대편 사람을 쓰러뜨리고, 쓰러뜨린 사람의 수에 따라 승부를 정하는 방법이다.
가마를 만든 사람은 가마의 역할만 하고 위에 탄 사람끼리 격돌하는데, 잘못하여 뒤로 넘어져 다치기 때문에 근래에는 잘 하지 않는 방법이다.

 

4. 고을모둠

시대: (조선시대)

고을모둠 유래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각 고을의 명칭과 위치를 가르쳐주기 위해 만들어진 놀이로 여겨진다. 서당에서 한자를 익혀 글을 아는 아이들이나 할 수 있는 놀이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와 서당이 마을마다 생긴 이후에 생긴 놀이로 보인다.
또한 일반 아이들이 흔히 하는 놀이가 아니라 주로 양반 자제들이 서당이나 공부하는 곳에서 한하여 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고, 한자보다 한글이 주로 사용되면서 함께 사라진 놀이이다.
그러나 경기도 수원지방에 이 놀이의 흔적으로 보이는 고을이름 부르기 라는 놀이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놀이는 책을 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어떤 글자를 뽑아서 부르면 상대편에서 그 자로 시작하는 고을 이름을 부르는 식이다. 예를 들어 영자라고 말하면 상대편에서 영자로 시작하는 영동 , 영천 , 영흥 등을 대고 한 곳당 1점씩 계산하는 식으로 승패를 정한다.

 

고을모둠 방법

편을 나누어서 할 수도 있고 개인별로 할 수도 있다. 먼저 약속에 따라 똑 같은 책의 같은 쪽수를 펼친다. 그러면 놀이하는 사람은 종이 한 장씩을 가지고 펼친 책의 글을 읽으면서 해당 장에 나오는 단어의 글자를 따서 고을 이름을 만들어 적는다.
우리나라 고을 이름은 대체로 두자 혹은 석자로 되어 있으므로 고을 이름을 찾으려면 두자 또는 석 자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4학년 1학기 국어 말하기, 듣기, 쓰기 책 80쪽에 씨름은 먼 옛날부터 행하여 온 우리 겨레의 고유한 민속놀이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는 씨름하는 모습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씨름은 고구려 때나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에서 부족간의 경기 종목의 하나로 성행했던 씨름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져 발전하였으며 세종대왕도 군사들의 씨름경기를 보며 즐겼다고 한다. 라고 씌어 있다. 여기에서 겨레의 의 의 자와 성행하였던 에서 성 자를 따서 의성 , 성행하였던 에서 성 자를 따고 고유한 의 유 자와 한 자를 따서 유성 , 한성 , 시대로 의 대 와 부족 의 부와 대왕도의 도를 따서 대부도 등의 고을 명칭을 찾을 수 있다. 그밖에 고성 , 경기도, 보성 등의 지명도 찾을 수 있는데 약속한 시간에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으면 자기가 찾은 것을 서로 내놓고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승부를 결정한다.


놀이가 여기에서 끝나기도 하고 서로 질문을 통해서 확인하는 식으로 심화시켜 놀기도 하였다. 즉 보성을 찾았다면 상대편에서 보성이 어느 도에 있느냐· 고 묻고 이에 전라도 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감점되는 식이다. 상대편도 마찬가지로 대부도가 무슨 도에 속하느냐· 고 묻는 식이다.
이런 놀이는 우리나라의 지명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10세 이후에나 할 수 있는 놀이이다.

 

5. 통차기

시대: (조선시대)

통차기 유래

벽이나 기둥 대신 움직이는 집을 근거로 숨바꼭질이 행해진다면 더욱 박진감 있을 것이다. 숨바꼭질을 그대로 닮았지만 이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여겨진다.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향토오락 에 통차기 란 제목의 놀이소개에는 알루미늄 깡통 이전의 놀이 소재가 두레박 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술래 한 사람을 정하고, 빈 두레박을 한 개 준비한다. 두레박의 위치를 땅바닥에 표시하고 이긴 사람 중의 한 명이 그 두레박을 힘껏 차면, 술래가 두레박을 주어다 원래의 위치에 가져다 놓은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숨는다. 술래는 두레박을 원 위치에 놓고 숨은 사람들을 찾기 시작한다. 술래가 찾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은 실격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통조림이 대용식량으로 사용되면서 빈 두레박이 깡통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기존의 두레박이 서너 번 차면 깨진 다는 문제를 알루미늄 깡통이 해결해 주기 때문에 당연히 깡통이 선호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는 더 이상 두레박은 사용되지 않고 깡통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후대로 이어지게 된다.

지방에 따라 꽝차기 하고도 하는 이 놀이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영동편 영서 지방에도 소개되고 있는데 단순한 깡통에서 더욱 발전한 형태가 사용되고 있어 흥미롭다.

 

우리나라 민속놀이 에 깡통차기 를 소개하면서 이 놀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아이들 놀이의 형태를 고스란히 전승하였다는 점에서 깡통차기 역시 우리나라 민속놀이로 간주될 만 하다 라며 이 놀이가 전통놀이로 파악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통차기 방법

먼저 직경 30~40cm 정도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빈깡통을 놓고 시작한다. 깡통 속에 공기 만한 작은 돌을 2~3개 넣고 돌이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발로 밟아 찌그러뜨린다. 돌을 넣는 이유는 발로 차면 소리가 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준비가 되면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맨 끝까지 진 사람이 술래가 된다. 술래 아닌 사람은 누구나 깡통을 찰 수 있는데, 한 사람이 3번 찰 수도 있고 세 명이 1번씩 나누어 찰 수도 있다. 술래가 깡통을 주워 원 안에 넣는 사이에 모두 숨어야 한다.

 

술래는 깡통을 원 안에 넣고 숨은 사람을 찾으러 다닌다. 만약 숨은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 이름을 대고 깡통을 밟으며 어디 어디에 있는 00개 꽝 하면 그 사람은 잡히게 된다. 잡힌 사람은 나와야 하고 나와서 깡통 주위에 있어야 한다.

만약 발견되었더라도 술래보다 먼저 뛰어나와 깡통을 차면, 잡힌 사람 모두가 다시 도망쳐서 숨을 수 있다. 또한 술래 몰래 나와서 술래가 꽝 하기 전에 깡통을 차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도망가서 다시 숨을 수 있다. 따라서 잡힌 아이와 숨은 아이가 서로 들어가 또는 나와 하고 술래 몰래 신호를 보내면서 깡통을 찰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술래가 모두 찾으면 처음 발각된 아이가 술래가 되어 새로 시작 한다.

 

6. 다리밟기

시대: (조선시대)

다리밟기 유래

동국세시기 정월 상원조 에는 서울 풍속으로 다리밟기를 사하고 있다. 정월 보름에 사람들은 다리를 찾아가서 밤을 새워가며 산책을 하는데, 행렬이 끊어질 줄 모른다. 이것을 답교 즉 다리밟기라고 한다. 혹자가 말하기를 교를 우리말로 하면 다리로서, 다리를 밟음으로 다리 에 병이 일 년 동안 안 걸린다는 속담의 풍속이 있다. 다리를 밟을 때는 광통교와 작은 광통교 및 수표교에서 많이 성행한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은 북을 치고 퉁소를 불며 법석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에는 정월 보름에 달이 뜨면 그해의 풍년이 들 것인가를 점치며, 또 그날 밤 다리밟기를 한다. 이 놀이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평상시에 대단히 성행하였다. 남녀가 모여 들어차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심지어는 법관이 그것을 금지하고 체포하기까지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 풍속이 없어졌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졌던 풍속이 다시 되살아났다. 정종실록에 정월 보름 때 13일부터 사흘 동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고 숭례문과 홍인문을 잠그지 않고 시민이 성 밖으로 나가 다리밟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고 한 기록이 있고, 근년에 이르러서도 서울에는 서울 안에 있는 다리는 모조리 돌아다니며 밟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다리밟기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놀이로,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1년 동안의 액막이를 한다는 주술적 속신에 의해 행해졌다. 또한 밟는 다리와 사람 다리가 같이 발음되면서 다리의 병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해졌다고 보인다.

 

다리밟기 방법

지방마다 조금씩 특색이 있다. 몇몇 곳의 풍습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함경북도 회령지방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이면 다리밟기를 하는데, 자기의 나이만큼 왔다 갔다 하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는 저고리의 동정을 떼어 그 끝에 돈을 맨 다음 남이 보지 않는 사이에 그것을 다리 한 구석에 두고 갔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풍속이 전라북도 부안지방에도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는 오직 아이들만 다리밟기를 하였다. 다리를 오가는 횟수도 역시 그 아이의 나이만큼 하였고, 동정에 돈을 매는 대신에 짚으로 만든 자루 속에 명태나 돈을 넣어서 다리 끝에 버렸다고 한다.

함경남도 함흥지방에서는 만세교 라는 긴 다리가 있었는데,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다리밟기를 하였다. 아이들은 낮에 하는 다리밟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밤에는 만세교에 다리밟는 사람들로 빼곡이 차고,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읊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특이한 다리밟기로 강릉에서는 다리 위에서 청년들이 격전을 벌였다. 즉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 마을과 대치하였는데, 이때 힘이 센 사람을 앞에 세우고 서로 상대방을 밀고 잡아당겨 다리를 빼앗는다. 이 과정에서 상대편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이를 다리빼앗기 라고 하는데, 위험하기 때문에 중지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밖에 충남 청양지방에서는 징검다리의 돌인 노둣돌 을 밟는 놀이를 한다. 주로 부녀자들이 정월 14일에 노둣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를 여러 번 밟으며 오갔다. 이 놀이를 하면 무좀이 없어진다는 속설이 있어 서로 밟으러 갔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서울에서는 다리를 모조리 건너기도 하고, 열두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다리 셋을 건너는 지방도 있고 어떤 지방에서는 제일 큰 다리나 제일 오래 된 다리를 자기의 나이 수대로 왕복하는 곳도 있다. 이밖에 다리를 건너는 동안 횃불을 들고 다니다가 꺼지지 않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 지방도 있었다.

 

7. 돈치기

시대: (조선시대)

돈치기 유래

다른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자기도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규칙이나 법이 생기면서 이런 욕구는 억제되고 죄악시되었다. 그렇다고 본능적인 욕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장치, 특히 놀이를 통해서 이런 욕구가 우회적으로 표현되는데, 돈치기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놀이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국세시기 상원조 에 돈치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한자어로 척전 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돈치기하는 방식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땅에 구멍을 만들고 어른과 아이들이 편을 갈라 돈을 구멍에 넣고 구멍을 채운다. 그런 후에 큰 동전을 던져서 구멍 안에 있는 내기 물건을 맞춘다. 그것을 맞춘 자가 그 돈을 갖고 이기는 것이다. 맞히지 못하거나 또 잘못 맞춘 자는 진다. 정월 보름날에 이 놀이가 더욱 성행한다. 아이들은 사금파리를 돈으로 삼아 던지는 예도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놀이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지상에다 작은 구멍을 파고 5~6m 떨어진 곳에서 이 구멍을 향하여 놀이꾼들이 내놓은 돈을 던진다. 그 구멍에 들어간 것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구멍 밖에 있는 것은 큰돈이나 둥근 돌을 던져 상대가 지정한 것을 맞히고, 맞히면 맞힌 것은 차지하게 된다. 또 일정한 거리 위에 횡으로 선을 세 개 긋고, 놀이꾼들이 내놓은 돈들을 중앙선에 서서 맨 앞쪽 선 밖에 던져놓는다. 그리고 지름이 7~8cm 가량의 편편한 돌을 가지고 뒤쪽 선상에서 상대방이 지정하는 돈을 맞혀, 맞힌 돈만을 따먹게 된다. 못 맞혔을 경우에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이상의 문헌기록 외에 지방마다 다양한 놀이방법이 전해지는데, 촌로 들에 의하면 큰돈을 따기보다 놀이로 즐겼다고 한다.

 

돈치기 방법

마당이나 공터에 돈을 던지는 선을 횡 으로 그린 다음, 횡선으로부터 2~3m 떨어진 지점에 지름 20cm 가량 되는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지름이 8~10cm 되는 원을 다시 그려 넣는다.

놀이판이 완성되면 동전을 던져 순위를 가리는데, 순서를 결정하는 방법은 한 사람씩 작은 원을 향해 동전을 던진다. 순위는 원 안에 동전을 넣은 사람이 일등이 되고 나머지는 원에서 가까운 순서로 정해진다. 단 동전을 넣은 사람이 여러 명일 경우 넣은 사람끼리만 다시 동전을 던져 순위를 정한다.

 

등위가 결정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등에게 동전 1~2개씩을 준다. 그러면 일등은 횡선을 밟고 한 손에 동전 모두를 쥔 다음 작은 원을 향해 던진다. 이때 던진 동전이 어떻게 떨어지느냐에 따라 돈을 따기도 하고 벌금을 내기도 하고, 또는 다음 차례로 순서가 넘어가기도 한다.

첫 번째 경우: 던진 동전이 원 안에 모두 들어가면 던진 사람이 모두 따먹게 된다. 만일 일등이 성공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동전을 던져보지도 못하고 잃게 된다. 그러나 한 번에 동전을 원 안에 모두 넣는 경우는 거의 없어, 일등이 실패하면 순서대로 돈치기를 한다.

 

두 번째 경우: 동전의 일부가 원에 들어가면 들어간 돈만 먹고 나머지는 망을 가지고 일등을 제외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정해주는 돈을 맞히게 된다. 만약 맞히면 역시 나머지 동전 모두를 따게 되는데, 엉뚱한 동전을 맞히면 벌금으로 동전 하나를 물어내고 다음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따라서 나머지 사람들은 맞히기 어려운 동전을 지정해주게 되는데, 맞히기 어려운 동전은 좌우 또는 앞뒤로 붙어 있거나 근접해 있는 동전을 말한다.

세 번째 경우: 바닥에 동전이 2개 이상 겹쳐서 떨어지면 겹친 돈은 돈치기를 하지 않고 따먹는다. 단 큰 원 안에 들어간 동전에 한해서만 적용된다.

 

네 번째 경우: 원 안에 들어간 동전이나 겹쳐서 떨어진 동전이 없을 경우에는 지정해 주는 동전을 망으로 맞혀야 따먹을 수 있다.

다섯 번째 경우: 던진 동전이 큰 원 밖으로 반 이상 나가면 낙방이 된다. 낙방을 한 사람은 망으로 지정한 동전을 맞혀보지도 못하고 그 판은 쉬어야 한다.

지방마다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경남지방의 경우에는 구멍을 파고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척 다양하다.

모떼기: 돈을 구멍을 향하여 던진 다음 순서대로 돌로 쳐서 여럿 중에 하나만 맞히면 그 사람이 모두 가져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만약 두 개 이상을 동시에 맞히면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게 된다.

푼내기: 지정된 동전을 맞힌다고 모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맞힌 것 하나만 가지며, 맞히지 못하면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사깨기: 겹친 돈을 떨어뜨려 놓으면 모두 가져가는 방식이다.

오간: 물주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던지기 전에 물주에게 미리 선금을 주고 한다. 던지는 선을 멀리 하고 구멍 앞에 동전을 5개 늘어놓고 망을 던져 맞히는데, 가운데 동전을 맞히면 5, 변두리 것을 맞히면 3배를 물주에게 받으며 맞히지 못하거나 두 개 이상을 동시에 맞히면 선금을 잃게 된다. 이 방식이 놀음의 성격이 가장 강하다.

담돈: 담에 있는 돌에다가 동전을 쳐서 가장 멀리 나간 사람이, 먼저 남의 돈을 자기 돈으로 맞혀서 따먹는 방식이다.

 

8. 딱치기

시대: (조선시대)

딱치기 유래

종이가 귀했던 옛날에는 책표지나 닥종이를 여러 겹 붙여 만들거나, 재래식 헌 장판을 사각형으로 오려서 만들었다. 그리고 종이가 점차 널리 보급된 1940년대부터 각지게 접어서 만든 딱지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6·25전쟁을 치른 후 두껍고 질긴 종이가 나오면서, 접는 딱지가 보편화되어 전국적인 아이들의 대표 놀잇감이 되었다. 처음에는 조선딱지 라고 하여 사다리꼴로 접었는데, 흔히 방석딱지 라고 하는 사각형으로 접는 방식이 보급되면서 조선딱지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경기 지방에서는 오늘날 흔히 하는 방식의 놀이가 소개되고 있으며 충청남도 지방에서는 놀이 재료로 브르지 의 단단한 것을 직경 5cm 정도 둥글게 오리거나 사각형으로 오려서 하는데 자료가 좋아야 유리하다 고 소개하고 있다.

이 놀이는 196080년대에 전성기를 맞다가 이후 종이가 흔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가 최근에는 문구점에서 인쇄되어 파는 딱지가 보급되면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문구점에서 파는 계급이나 만화 등이 인쇄된 사각형, 원형 딱지 와는다른 놀이이다.

 

딱치기 방법

1) 딱지 접는 방법

한 장으로 접는 방법과 두 장으로 접는 방법, 그리고 조선딱지라고 부르는 사다리꼴 딱지 접는 방법이 있다.

한 장으로 접는 방법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51이 되는 종이를 1장 준비하여 5등분으로 칸을 표시한다. 보통 장방형의 종이를 준비하면 여러 번 접고 접어 대강 비율을 맞출 수 있다.

오른편에서 두 번째 칸을 대각선으로 접은 다음, 접은 부분을 세 번째 칸에 올려 접는다. 그 다음 첫 번째 칸을 접은 부분이 위로 오도록 대각선으로 접고, 접은 부분을 위로 올려 접는다.

왼편에서 두 번째 칸을 대각선으로 접어 마찬가지로 중앙으로 접는다.

마지막 남은 사각형 부분을 대각선으로 접은 다음, 접은 부분을 틈 사이로 끼워 넣으면 딱지가 완성된다.

 

두 장으로 접는 방법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31이 되는 종이 2장을 준비한다.

2장을 서로 교차하여 올려놓고 네 귀퉁이 중 한 귀를 대각선으로 접는데, 교차된 종이 중에 밑에 놓인 종이부터 접기 시작한다.

대각선으로 접은 부분을 겹쳐진 곳으로 올려 접은 다음, 같은 방법으로 차례로 접어 마지막에 접은 틈 사이로 끼우면 완성된다.

조선딱지 접는 방법

사각 장방형의 종이를 준비하고, 종이 상단부 한쪽을 가로 세로 같은 길이만큼 대각선으로 접는다.

그 다음 접힌 부분의 왼쪽 끝을 오른쪽 끝 부분과 겹치도록 다시 접는다.

 

아래쪽 나머지 종이의 절반을 접어 삼각형으로 접힌 부분의 밑변과 닿도록 한다. 같은 방법으로 다시 절반을 접는다.

접은 종이의 아래쪽 양 모서리를 그림과 같이 접어 올린 다음, 위쪽 모서리를 양귀와 아래쪽 접힌 부분 사이로 끼워 넣으면 사다리꼴 딱지가 완성된다.

 

2) 놀이방법

넘겨먹기

놀이할 사람을 정한 다음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여 진 사람이 딱지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때 딱지와 바닥이 잘 밀착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놓아야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긴 사람은 손에 딱지를 잡고 힘껏 내리치는데, 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배꼽치기라고 하여 위에서 아래로 딱지를 내리치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발대기라고 하여 딱지 바로 옆에 발을 대고 치는 방법이다. 보통 딱지가 두꺼우면 배꼽치기를 하고 얇으면 발대기를 한다.

 

내려치는 딱지의 바람에 의해 바닥의 딱지가 뒤집히면 따먹게 된다. 그러면 상대는 다시 딱지를 대주어야 한다. 처음 규칙을 정하기에 따라, 바닥의 딱지 밑으로 들어가도 먹을 수 있다. 만약 뒤집히지 않으면 내리친 딱지를 그대로 두고, 상대가 바닥에 있는 자기 딱지를 주워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내리친다.

딱지가 잘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 딱지가 바닥에 닿는 순간 재빨리 옷소매와 손을 휘저으며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바람치기라고 하여 반칙이다. 하지만 상대의 눈을 속여가면서 슬쩍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종종 시비가 일기도 한다.

 

밀어내기

밀어내기는 일정한 구역을 정한 다음 자기의 딱지로 상대의 딱지를 쳐서 그 구역 밖으로 밀어내면 따먹는 방법이다. 넘겨먹기와 함께 가장 널리 행해졌던 방법이다.

먼저 땅이 매끈하고 토질이 좋은 마당이나 공터에 직경 1~2m 정도의 원을 그리고, 가위바위보로 누가 먼저 공격할 것인가를 정한다.

 

진 사람은 딱지 한 개를 원의 가운데 놓고, 이긴 사람은 자기의 딱지로 상대의 딱지를 쳐 원 밖으로 밀어낸다. 이때 상대의 딱지가 원 밖으로 밀려나가면 그 딱지는 쳐낸 사람이 따게 된다. 단 자신의 딱지는 원 안에 있고 상대방의 딱지만 쳐내야 한다. 만일 상대방과 자신의 딱지가 모두 나가면 무효가 되고 상대방에게 칠 기회를 넘겨준다. 또한 상대의 딱지를 쳤는데 오히려 자신의 딱지가 원 밖으로 나가면 빵 이라 해서, 그 딱지는 상대에게 주어야 한다.

원이 크기 때문에 한 번에 밀어내기가 어렵고 보통 2~3회에 걸쳐 밀어낸다.

 

날려먹기

한 손으로 딱지를 잡고 앞으로 날려서 더 멀리 날아간 사람이 상대로부터 딱지 한 개를 얻는 방법이다. 여러 명이 할 경우 가장 멀리 날린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의 딱지를 모두 갖는다. 날릴 때는 요령이 있어야 한다. 딱지를 던질 때는 한쪽 모서리를 잡고 어깨의 힘을 이용하여 옆으로 던지면, 빙글빙글 돌면서 멀리 날아간다. 거리를 재는 기준은 딱지를 던진 곳에서 직선거리를 기준으로 한다.

 

9. 쇠머리대기

시대: (조선시대)

쇠머리대기 유래

이 놀이는 문헌상의 기록은 없고 현지 주민들 사이에 풍수설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현재의 시장 터에 있었던 동헌의 좌향이 소자리라서 지살이 끼어 있기 때문에, 이 지살을 풀어주기 위해 벌였다는 속설이 있고, 둘째는 영산읍 북쪽에 위치한 영취산과 함박산의 산세가 두 마리 소가 서로 마주서서 겨루는 형상을 취하고 있어, 이 산살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런 속설에 근거를 두고 문화재관리국 조사보고서 에서는 쇠머리대기놀이는 처음에는 소와 소를 맞붙여 싸움을 시켰던 것이나, 나중에는 소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실제 소 대신 나무로 만든 소를 가지고 놀이를 벌여왔다고 한다. 라고 민속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풍수적인 의미보다 보다 근원적으로 소 의 성격을 파악해서 유래를 살피기도 한다. 정월은 송구영신의 시기로서 다양한 편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싸움들은 시간의 힘을 재생하고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주술 종교적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소는 줄다리기의 줄이나 횃불싸움의 횃불처럼 그 자체로서 일정한 주술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믿어져 왔다. 또한 소는 월동물 로서 기울고 차는 달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부활과 재생을 상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산쇠머리대기 의 소는 주술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채택된 소이고, 그 소의 기능은 재생과 풍요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농경이 정착되면서 풍요를 비는 의식처럼 이 놀이가 행해지다가, 점차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풍수설이 결합되어 지속성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쇠머리대기 방법

쇠머리대기는 대보름 무렵에 행해진다. 아이들은 그 전에 저희들끼리 작은 크기의 쇠머리를 만들어서 쇠머리대기를 한다. 그러다가 점차 청년들까지 가세하여 분위기가 고조되면 어른들이 주관이 된 쇠머리대기가 조직된다.

먼저 영산면을 크게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고, 양편은 대장을 선임한다. 대장은 마을 사람들 가운데 재력이 있고 덕망 있는 사람 가운데서 선출하거나 자원한다.

 

대장을 뽑고 나면, 쇠머리를 제작한다. 쇠머리는 나무로 만드는데, 소를 간략하게 추상화한 머리·몸 부분으로 만든다. 머리부분은 4~5m 길이의 소나무 3개로 삼각형모양으로 만들고, 몸부분은 지름 20cm의 소나무 20여 개를 얽어 가로 4m, 세로 5m 정도 되는 직사각형 판을 만든다. 보통 갓 베어온 소나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무게가 대단히 무거웠다.

싸움 당일이 되면 각 편은 서낭대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쇠머리를 앞닷마지기 로 운반한다. 이때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함께 따라가서 자기편을 응원한다. 싸움터에 도착하면 일단 쇠머리를 땅에 내려놓고 쇠머리대기의 앞놀이인 진잡이를 시작한다. 진잡이는 각 편의 대장이 대마를 타고 상대편의 진중을 돌파하는 놀이로서, 많이 돌파한 쪽이 이긴다.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하다보면 싸움판은 흥분과 광란의 도가니가 된다.

 

수 시간에 걸친 진잡이가 끝나면 드디어 쇠머리대기가 시작된다. 쇠머리대기의 방식은 서로 쇠머리를 부딪쳐서 많이 밀고 가거나, 상대편 쇠머리를 눌러 땅에 떨어뜨리는 쪽이 승리하게 된다. 탐색전을 계속하다가 대장의 지휘에 따라서 마침내 쇠머리가 맞부딪치게 되면, 각 편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쇠머리와 사람들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서로 상대편 쇠머리로 넘어가서 쇠머리를 내려 누른다. 어디선가 격한 욕설과 함께 죽여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양편은 육탄전을 벌이고 깃대 등으로 상대편을 마구 후려친다.

이윽고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편은 신명나게 풍물을 치면서 쇠머리를 을러메고 마을로 돌아와서 밤이 새도록 뒤풀이를 한다.

 

10. 승경도

시대: (조선시대)

승경도 유래

이 놀이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용재총화 의 저자인 성현은 조선 초에 정승을 지낸 하륜이 만든 놀이라고 하였다. 과연 하륜이 만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내용이 조선시대의 관직명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확실한 듯 하다.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놀이가 당, , 명대에 많이 행해졌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조선시대 양반들이 중국 놀이를 모방하여 만든 것을, 하륜이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정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칭호와 상호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따라서 양반집에서는 어릴 때부터 이러한 관직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을 아이들에게 미리 알려 주기 위해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 특히 서당에서도 이 놀이를 권장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야 할 벼슬길을 이해하게 하고, 선비의 자세를 익히게 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에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 이 놀이를 장교들과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군인, 장교들 사이에서도 이 놀이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놀이는 조선조가 망하고 더 이상 벼슬이 의미가 없어지면서 자연히 함께 소멸된 놀이인데, 놀이의 원리는 오늘날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승경도 방법

1) 놀이도구

윤목

길이 8~12cm, 굵기 3~5cm 정도의 크기로 만드는데, 재질은 단단한 박달나무·밤나무·대추나무 등으로 만든다. 모양은 5각 기둥인데 중앙은 약간 경사지게 배를 줘 잘 굴러가게 했고, 5개의 모서리에 1~5까지를 새겨 굴리면 모서리에 새긴 숫자가 보이도록 했다. 굴리는 나무라 해서 윤목이라고 하기도 하고, 씌어진 숫자가 윷놀이의 도, , , , 모를 나타내기때문에 윷목이라고도 했다.

성현에 의하면 하륜이 처음 만들 때는 1~6까지 썼는데, 그 후 4자까지 줄어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1~5까지 새겨진 것을 쓴다.

만약 윤목이 없을 경우에는 윷으로 대신하는데, 큰 장작윷을 사용하지는 않고 종발 속에 넣고 흔들어 던지는 종발윷을 사용했다.

 

놀이판

보통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드는데,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세로가 약 40cm×2m 내외의 직사각형이다. 그 안에 300여 개의 칸을 만들어 관직명과 상황을 써넣는다. 각 칸 아래에는 1~5까지 씌어 있는데, 이는 윤목을 던져 나온 끗수에 따라 다음에 어디로 승진할 것인지 좌천할 것인지를 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방의 가장자리에는 이른바 외직인 8도의 감사, 병사, 수사와 주요 고을의 수령을 배치하며, 중앙부의 첫 꼭대기는 정1품을, 그 다음에는 종1품을 늘어놓고, 맨 밑에 종9품이 오게 된다. 또한 중앙의 맨 아래 또는 가장 자리의 일부에 파직, 금고, 유배, 사약 등 벌칙을 써넣는다.

보통 벼슬자리를 다 써넣기도 어렵거니와 그렇게 하면 너무 많아서 긴장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놀이판의 크기에 따라 주요 관직만을 적당히 배치한다.

 

일정한 형태가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나, 자기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이 구별되도록 표시를 해야 한다. 대부분 색깔을 달리해서 구분하였다. 색깔은 보통 문과는 붉은말, 무과는 푸른말, 남행은 누른말, 군졸은 흰말, 은일은 누른 바탕에 붉은 테를 두른 말을 사용하는데, 쌍륙의 말처럼 손으로 집기 편하게 세워 만들기도 한다.

 

2) 놀이방법

놀이하는 사람의 숫자는 제한이 없으나 보통 4~8명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 개인별로 하기도 하고 편을 짜서 하기도 한다.

신분의 결정

첫 번째 굴린 결과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기 때문에,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신분은 크게 유학, 진사, 무과, 문과, 은일 등의 5단계로 나누어진다. 가장 낮은 출신이 유학이고, 가장 높은 출신은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를 뜻하는 은일이다. 그러나 말판에 따라서는 무과를 가장 낮은 출신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혹은 생원을 넣기도 한다. 아래 도표는 금산지방에서 행해지던 신분결정 과정의 예이다.

 

두 번째 던진 결과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대기하게 된다.

자기 차례가 되면 윤목을 굴려 윤목의 숫자대로 이동한다. 처음에는 쉽게 올라가는데 점차 좌천되는 경우가 많다.

누가 먼저 끝까지 올라가는가를 겨루는데, 문관의 경우 봉조하까지, 무관의 경우 도원수까지 올라가서 은퇴하면 놀이가 끝나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올라가 은퇴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당시 관직의 속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귀양도 가고, 사약도 받아 미리 놀이판에서 탈락하기도 한다.

 

놀이의 다양한 규칙

양사법: 양사라는 것은 관리들을 법적으로 통제하고 규율을 세우는 기관인 사헌부와,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맡아보는 사간원을 말한다. 놀이를 진행하다가 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자리에 가 있는 사람이 규정된 수를 얻었을 경우, 이 법을 썼다. 법은 그 사람이 지정하는 말들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해당 말이 움직이려면 규정된 수가 나와야 했다. 예를 들어 이조판서에 있는 사람이 지정되었다면 그 사람은 양사에서 지정한 숫자가 나와야 말을 움직일 수 있다. 4를 지정했으면 다른 숫자가 나오면 움직일 수 없고, 반드시 4가 나와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은대법: 은대는 임금의 명령을 하달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승정원을 가리키는데, 승정원 벼슬에 있는 사람이 규정된 수를 얻으면 이 법을 쓰게 하였다. 예를 들어 당하에 있는 모든 말들은 다음번에 주사위를 굴려 나오는 숫자를 자기네가 쓰지 못하고 승정원의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전부 바쳐야 하는 식이다.

 

11. 유객주

시대: (조선시대)

유객주 유래

이 놀이의 정확한 기원과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놀이 재료가 고급스럽고 한가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었던 놀이라는 점에서, 주로 양반층에서 즐겨했던 놀이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유객환이라는 놀이는 이익의 성호사설에, 조조의 아들 조식이 만들어 아내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놀이가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지만, 유럽의 가정에서는 지금도 널리 하는 놀이이다.

 

유객주 방법

한쪽 끈의 고리에 있는 구슬을 다른 쪽 끈의 고리로 옮기거나, 옮겨간 구슬을 다시 처음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게 하는 놀이인데, 옮기는 방법이 쉽지 않다.

 

1) 놀이도구 만들기

옛날에는 재질이 단단한 나무에 무명실이나 명주실로 만든 노끈을 사용했는데, 요즘에는 이런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요즘에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놀이판

흔히 구할 수 있는 하드보드나 합판, 골판, 아크릴판 등으로 가로 15cm, 세로 5cm 정도의 크기로 자른다. 두께는 3~5mm가 적당하다. 이런 놀이판에 구멍을 세 개 뚫는데, 가운데 구멍은 넓게 뚫어서 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양쪽의 구멍은 작게 뚫어 실이 고정되게 한다.

 

구슬

2개의 구슬이 필요한데, 직경 3~5cm 정도의 크기가 적당하다. 그런데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하므로,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고리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길이가 60cm 정도 되는 끈이 필요한데, 너무 가늘면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굵은 끈으로 한다.

놀이판과 구슬, 끈이 준비되면 매듭은 그림의 모양과 같이 만들어, 표시된 부분을 판지 가운데의 큰 구멍에 넣고 그 매듭의 사이로 줄의 끝부분을 넣어 통과시킨다. 그리고 줄의 끝부분은 양쪽의 구멍에 넣고 묶어 고정시킨다.

 

2) 놀이방법

실제로 만들어서 그림을 따라 해보면 쉽게 할 수 있다.

놀이판을 왼손으로 잡고 표 한 곳의 가운데 부분을 앞으로 잡아당겨 공간을 만든다.

넓어진 공간으로 왼쪽 구슬을 오른쪽으로 통과시킨다.

놀이판의 뒤편에서 가운데 구멍에 있는 두 줄을 함께 잡아당기면, 구멍으로 두 개의 매듭이 따라나온다.

두 매듭은 표한 공간을 통해 구슬을 오른쪽으로 보낸다.

놀이판의 가운데 구멍 뒤편으로 보면 구멍 안으로 네 줄이 들어가 있다. 이 네 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기면 매듭 표가 따라나온다.

이 매듭을 통해 구슬을 오른쪽으로 보내고 처음과 같은 상태로 끈을 조절한다.

반대편으로 보낼 때도 위와 같은 순서로 하는데, 방향만 반대로 하면 된다.

 

12.횃불싸움

시대: (조선시대)

횃불싸움 유래

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두운 세력을 물리치고 보다 밝은 것을 인간 생활에 가져다주는 것으로 신성시하였다. 풍요다산의 상징인 만월 아래에서 횃불싸움을 벌이는 것은, 보다 풍요한 새해를 맞이하려는 소망의 표현인 것이다.

이 놀이에 대한 문헌기록으로 동국세시기 정월 상원조 에 충청도 풍속에 횃불싸움이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 에는 혼인식 거행에서 서로 다투어 횃군을 많이 세워 격에 맞지 않게 사치하는 폐단을 금지하기 위하여, 신분에 따라 횃군의 수효를 제정한 조목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조재삼의 송남잡지 에 보면 북관의 풍속으로 견마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서울 근방에서 행하는 횃불싸움과 비슷한 것이라고 하여, 결혼풍습의 일환인 횃불싸움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유만공의 세시풍요에는 횃불싸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밝고 밝은 횃불이 언덕 위에 밝으니 부르고 대답하는 많은 무리의 아이들이 줄을 이은 소리더라 절하고 꿇어앉고 금방 신선 같은 달을 맞이하던 무리들이 추격하고 달아나서 홀연히 불로 공격을 하는 병사가 되었다. 산촌에 여러 아이들이 횃불을 켜고 달을 맞이하다가 이내 편으로 나뉘어서 서로 공격하는 것을 화전이라고 한다.

 

그밖에 차상찬의 조선사외사에 횃불싸움은 옛날 우리 조선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풍속으로, 팔도 각지에서 행해지는 놀이이지만 내가 알기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격렬하게 행한 것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함경도 북청지방에서는 횃불싸움을 관원놀이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켜 진행하였다고 한다.

 

횃불싸움 방법

보통 두 개의 마을이나 집단이 밤에 횃불을 들고 싸움을 하는데, 경북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와 천천리의 횃불싸움과 광주지역의 횃불싸움을 소개하면서 놀이방법을 대신한다.

 

경북 청송군 현서면의 횃불싸움

구산리와 천천리는 해방 무렵까지 횃불싸움을 했었으나, 그 이후 전승이 중단되었다.

보름 자시에 정자 낭기 에서 정숙하게 동제를 올린다. 다음날 아침에는 제관 집에서 음복을 하고 마을회의를 한다. 마을회의가 끝나면 풍물을 치고 지신밟기를 시작한다.

오후가 되면 마을의 청소년들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가 삼간초옥 크기의 달집을 만든다. 달이 떠오르면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빈다. 새해 처음으로 떠오르는 달의 색깔이 붉으면 가물어서 흉년이 들고, 희면 물이 많아서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달집태우기가 끝나면 바로 마을로 내려와서 횃불싸움을 시작한다. 먼저 열 서너 살 먹은 아이들끼리 강변의 공터에 모여 싸움을 시작하면, 이어서 30~40대까지의 장정들이 100여 명 모여 본격적인 횃불싸움을 시작한다. 미리 만들어 놓은 홰를 빙빙 돌리면서 싸움이 시작되면 양편의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은 각기 풍물을 치면서자기편을 응원하다. 처음에는 홰를 돌리면서 상대편을 위협하다가 싸움이 격렬해지면 홰로 상대편을 내리쳐서 사람이 다치기 일쑤였다. 이렇게 두어 시간쯤 싸움을 하다보면, 어느 편이 도망가거나 홰가 많이 꺼져서 싸움이 끝나게 된다.

승부는 도망간 쪽이나 홰가 적게 남은 쪽이 지게 된다. 이긴 편은 한해의 재앙을 피할 수 있어 길하고, 진 편은 흉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횃불싸움이 끝나면 각자 마을로 돌아와서 지신밟기를 하면서 준비해둔 음식과 술, 그리고 돈을 풀어서 한바탕 거나한 뒤풀이가 밤새도록 벌어진다.

 

전라도 광주지역의 횃불싸움

정월 14일 저녁 아이들은 자기 마을의 논두렁을 태우던 쥐불이 점차 거세게 번져가면서 이웃 마을과의 경계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불을 많이 태울수록 좋다고 여겨 서로 마을의 경계너머까지 태우려다, 이웃 마을 아이들과 마주치게 되면 횃불싸움으로 발전한다. 이웃 마을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을 경계를 넘어 얼른 불을 지르고 도망오지만, 일단 마주치게 되면 마을의 명예를 걸고 불싸움을 한다. 서로 들고 있던 불붙은 빗자루를 저으며 공방을 계속하지만, 아이들이라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이때쯤이면 소식을 들은 동네 청년들이 홰를 만들어 싸움에 합류한다. 홰는 묵은 대나무를 3m 정도 잘라 돌로 자근자근 내리쳐 으스러지게 한 다음, 적당한 간격으로 짚 매듭을 엮어 만든다. 또 다른 방법은 겨릅대 한 줌에 짚을 칭칭 둘러 감아 만들기도 한다. 청년들의 횃불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긴 홰를 마구 휘두르기 때문에 화상을 입기는 예사이며, 옷에 불이 붙는 경우도 있었다. 홰가 거의 다 타면 상대를 향해 던져버리고 새로운 홰를 가지고 싸운다.

광주시 광산구 용운동 원선암마을에서는 횃불싸움을 띠싸움이라 부르는데, 이 싸움이 끝났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밤에 몰래 이웃 마을에 쳐들어가 짚가리 쌓아놓은 것을 몇 개씩 태워버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이전

1. 널뛰기

시대: (조선이전)

널뛰기 유래

속설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여성들이 담 밖에서 널뛰기를 하여 감옥 안을 넘겨다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집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이 담 밖의 세상을 보기 위해 널뛰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놀이의 형태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널뛰기는 디딜방아의 원리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디딜방아는 고구려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널뛰기가 디딜방아의 발전된 형태라면 널뛰기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론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면, 유득공의 경도잡지 세시 원일조에 항간에서 부녀자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는데, 그 높이가 몇 자씩 올라간다. 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를 초판희 라고 한다. 생각건대 주황의유구국기략에 그곳 부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라고 한다. 고 했는데 이것과 비슷하다. 조선 초에 유구가 입조할 때 어떤 이가 그것을 사모해서 본받은 것인지·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설날 풍속의 하나로 널뛰기를 소개하면서, 유구국에서 행하는 널뛰기가 고려 말엽부터 조선 초에 잦은 교류 과정에서 전래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널뛰기방법

1) 놀이도구

널빤지: 널빤지는 탄력성이 있고 견고한 나무로 하되, 일반적으로 중간이 두껍고 양끝이 좀 얇은 것이 좋다. 보통 길이는 5~6m, 너비 35~40cm, 두께 5cm 정도가 적당하다.
널 받: 널 받침이란 널빤지 가운데를 괴어 놓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고이개 라고도 한다. 보통 짚 묶음 또는 흙을 담은 가마니 같은 것으로 하며, 높이는 30cm 정도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받침이 낮으면 널이 닿은 양쪽 땅이 파이기도 한다.


2) 널뛰기 방법과 동작
널뛰기 방법: 널빤지 양쪽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처음에는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널빤지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올라앉아 널빤지를 널 받침 위에 고정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한다. 만약 두 사람의 몸무게가 차이 나면 가벼운 쪽으로 널빤지를 길게 하는데, 이때 밥을 더 많이 갖는다. 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이 마주서서 번갈아 뛰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탄력에 의해 몸은 점점 공중으로 높이 치솟게 된다. 이 놀이는 힘이 들어 오래 뛸 수 없기 때문에 번갈아 쉬었다가 뛴다.


널뛰기의 동작: 다양한 동작이 있는데 뛰어올랐을 때 두 다리를 곧추펴고 뛰는 것을 곧추뛰기 라고 하고, 두 다리를 앞뒤로 벌려 뛰는 것을 가위발뛰기 라고 한다. 그리고 기술이 능숙하게 되면 뛰어올라 몸을 한바퀴 도는 것을 데사리 라고 하고, 더 익숙해지면 공중에서 두 다리를 앞으로 내뻗치면서 상체를 앞으로 굽히는 중등꺾기와 한 바퀴 도는 어려운 동작을 하기도 한다.

 

2. 연날리기

시대: (조선이전)

연날리기 유래

연은 서양에서는 BC 400년경 플라톤의 친구인 알투스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고, 동양에서는 BC 200년경 중국의 한신 이라는 장군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권41 김유신 전에 따르면, 647년 신라 진덕여왕을 반대하는 일부 대신이 반란을 일으켜 김유신이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성안에 별똥이 떨어져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김유신이 꾀를 내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어제 저녁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니 진덕여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 이라고 소문을 내어 싸움에서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보다 성황을 이루었는데 명종실록에 의하면, 1566년에 국왕이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연날리기를 일시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고,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에게 연을 띄워 적전을 알려줘, 평양 성을 되찾았다는 일화가 있었다. 또 같은 시기 이순신 장군이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연을 날렸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보편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조선 말기의 기록에는 연의 종류, 연 만드는 법, 연 띄우기 풍속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사실은 이 시기 연날리기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연날리기 방법
1) 재료

종이는 보통 창호지를 사용하고 살은 대나무가 가장 좋다. 대나무는 물기가 완전히 빠진 잘 마른 것을 이용하는데, 왕대 또는 참대 중에 구부러졌다가 탄력 있게 펴지는 것을 이용한다. 대나무가 없으면 싸리, 수숫대, 갈대 같은 것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모두 껍질을 좁게 째서 길게 다듬어 쓴다. 연줄은 가볍고 질긴 명주실이 가장 좋으나, 값이 너무 비싸 일반적으로 무명실, 베실 등을 이용한다. 실을 감는 얼레는 나무로 만드는데, 연줄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도구로 매우 중요하다. 얼레는 나무가 없으면 수숫대 같은 것으로도 만든다.

 

1) 연의 종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은 방패연이다. 이밖에 주로 어린이들이 많이 날리는 가오리연과 변형연이 있다. 방패연은 연 바탕에 그려진 무늬와 색깔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 꼭지연, 반달연, 치마연, 동이연, 초연, 박이연, 발연, 바둑판연, 등이 있다.


2) 연날리기
연을 날릴 때 꼭 알아두어야 할 것으로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연은 바람을 헤치고 올라가지 않고 바람을 타고 올라간다.
바람이 흐르는 방향으로 연을 띄워 바람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연 날릴 때의 몸가짐은 연과 날리는 사람의 앞가슴이 45도 각도로 마주보고 있어야 하며, 연줄 역시 직선에 가깝도록 팽팽하게 당겨야 연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


얼레질을 잘 해야 바람의 흐름과 풍압에 맞춰 연줄을 풀거나 감을 수 있다.
튀김을 잘 주어야 하는데, 튀김이란 얼레를 잦혀 연을 조종하는 기술을 말한다.
연이 곧바로 섰을 때 통줄을 주면 연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다. 이때 연줄을 재빨리 감으면 기울어진 방향으로 날게 된다.
통줄을 주어 연이 비스듬하게 될 때 튀김을 주면 연은 거꾸로 방향을 바꾸는데, 이때 얼레를 감으면 연은 수직으로 곤두박질친다. 곤두박질치는 연을 다시 바로 잡고 위로 올릴 때는 튀김을 주어 연줄을 풀어주고 감으면 된다.


3) 연놀이의 종류
높이 띄우기: 연을 약 500m 이상 띄우면 연의 무늬가 보이지 않고, 1,000m 가량 높이 띄우면 눈에 가물가물하게 보이고, 그 이상이 넘게 되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연은 높이 멀리 올라갈수록 바람을 세차게 받기 때문에 연이 망가지거나 연줄이 끊어질 우려가 있다.
재주부리기: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연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급회전, 급강하, 급상승 등 다양한 공중곡예를 부린다. 이는 연을 날리는 솜씨에 달려 있지만 우리나라 연만이 지닌 구조적 특징으로 이와 같은 기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끊어먹기: 대표적인 연놀이로 연이 서로 엇갈리며 연줄을 비벼서 상대방 연줄을 끊는 놀이이다. 승부는 연실의 질김과 약함에도 달려 있지만 그보다도 연의 조종기술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3. 윷놀이

시대: (조선이전)

윷놀이 유래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개인적으로는 한해의 길흉을 점치는 점술도구로 시작되어,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점차 놀이로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윷놀이가 소개되거나 언급된 문헌자료는 무척 많다.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의 북사와 태평어람 이다. 이 문헌들은 백제에는 저포 악삭 등의 잡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저포는 오늘날의 윷놀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 윷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놀던 윷으로 우리나라의 윷과 비슷한 것이다. 이 자료들을 근거로 할 때, 윷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김문표는 중경지에서 사도설 을 펴서, 말판 바깥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안의 모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니 하늘이 땅의 바깥까지 감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했다. 나아가 말판을 이루는 점들은 별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새벽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별들이 둘러싸고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윷말의 움직임을 해에 비유하고 말판의 네 점과 중점을 오행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사희변증설로 이어져, 윷놀이는 그해 농사를 점치던 농점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익은 성호사설 권5 사희조에서 윷놀이가 고려의 유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밖에 동국세시기 제석조에 윷가락을 던져서 새해의 길흉을 점치는 풍속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유득공의경도잡지 원일조에는 윷가락을 던져 나온 64괘에 따른 풀이까지 실려 있다.


미국인 스튜어트 컬린이 1895년에 쓴 한국의 놀이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는 윷놀이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윷놀이 방법

1) 놀이용구
윷의 모양은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이 있으나 크기에 따라 장작윷과 밤윷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장작윷

가락으로 되어 있다고 가락윷, 장작개비처럼 되어 있다고 장작윷이라고 한다. 윷은 박달나무, 통싸리나무, 밤나무, 복숭아나무 등으로 만드는데, 보통 밤나무로 가장 많이 만든다. 밤나무는 잘 쪼개지고 속은 희고 겉은 검기 때문에,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도 잘 구분할 수 있어서 많이 이용되었다.


길이는 15~20cm, 지름 3~5cm 정도의 둥근 나무 2개를 길이로 반쪽을 내어 네 가락을 만든다. 그런 다음 칼이나 낫 등으로 잘 다듬고 기름이나 색깔을 칠하여 모양을 낸다. 다듬을 때 배를 약간 불룩하게 하기 위하여 배의 계선을 둥글게 깎아낸다. 그래야 윷을 던졌을 때 잘 구르며, 굴러서 엎어질 듯 하다가 젖혀지고 젖혀질 듯 하다가도 엎어지는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남자들이 많이 가지고 노는 밤나무윷은 크고 무겁게 만들고, 여자들이 가지고 노는 박달나무윷은 작고 예쁘게 만든다. 장작윷은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밤윷

엄지손가락 정도 굵기의 나무로 2~3cm 정도 되게 만든 것인데, 밤알만 하다고 하여 밤윷이라고 불렀다. 이 밤윷은 조그만 밥공기 등의 그릇에 담아 내젓다가 바닥에 내던져서 노는 것으로, 남부지방에서 많이 하고 있다.
그밖에 재료에 따라 콩윷, 팥윷 등이 있는데, 곡물을 이용한 이런 윷은 북부지방에서 많이 한다.


윷판과 깔판
말판은 모두 29밭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나뭇가지처럼 생긴 가지말판과 방말판 두 가지가 있다. 깔판은 푹신하여 윷가락이 구르지 않는 멍석이나 짚방석 같을 것을 사용했다.

2) 윷 던지기

윷가락은 네 개를 나란히 세우거나, 두 가락씩 우물정자형으로 짜서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쥐고 던진다. 보통 윷가락이 사람들의 앉은키보다 얼마간 높이 올라가게 던져야 하는데, 멋을 부리는 사람들은 윷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고 차례로 떨어지게 던지기도 한다. 윷가락이 둘러앉은 사람들의 범위를 벗어나 떨어지거나 짚방석 밖으로 튀어나갈 때는 낙판이라 하여 무효로 하기도 한다.


3) 놀이방법

두 사람 이상 여러 사람이 편을 나누어 놀 수 있으므로, 사람 수에 제한은 없지만 보통 4~6명 정도가 어울려 논다. 한 편에 보통 4개의 말을 갖고 시작하고, 윷을 던져 나오는 끗수만큼 말을 옮겨 어느 한 편에서 먼저 말 넉동이 나면 이기게 된다.
세부적인 규칙은 아래와 같다.
순서 정하기: 먼저 어느 편이 먼저 놀기 시작할 것인가를 정하는데, 먼저 윷가락으로 정한다. 즉 각 편의 대표격인 사람 두 명이 나와, 네 가락 중 두 가락씩 나누어 가지고 던져서 숫자가 높은 편이 먼저 시작한다.
말 쓰기: 윷가락을 던져서 나온 끗수에 따라 말을 옮기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말을 달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 말을 잡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업기도 한다. 아무리 윷이나 모가 많이 나와도 말을 잘 쓰지 못하면 지게 되므로, 전체 판의 흐름에서 유리하게 말판을 써야 한다.


업고 가기: 윷가락을 던져서 만약 처음 말이 도자리에 있는데 다음 차례에 또 도가 나오면, 업어서 함께 이동할 수도 있다. 또 뒤따라가다가 앞서가던 자기편 말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업고 갈 수 있다. 두 개가 업고 가면 두동사니 세 개가 업고 가면 세동사니 네 개가 업고 가면 넉동사니라고 한다. 업는 경우가 불리하면 업지 않아도 된다.
잡기: 예를 들어 상대편 말이 도자리에 있는데, 윷을 던져서 자기편이 도가 나오면 상대편 말을 잡을 수 있다. 또 자기편 말이 뒤따라가다가 앞서가던 상대편 말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상대편의 말을 잡게 된다.
한 번 더 하기: 윷이나 모가 나오면 한 번 더 놀 수 있고, 상대편 말을 잡았을 때도 한 번 더 놀 수 있다.


동나기: 처음에 달았던 말이 말판을 돌아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동나기라고 말하는데, 먼저 넉동이 나는 편이 이긴다. 동이 빨리 나기 위해서는 길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지름길로 질러가는 방법과 세 개의 먼 길이 있다. 가장 가까운 길은 12번째에 날 수 있고, 다음은 16번째, 다음은 17번째이고, 가장 먼길은 21번을 가야 하기 때문에 가까운 길로 말을 몰아가야 한다. 그러나 뜻대로되지 않아 윷놀이가 재미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http://www.daum.net

http://www.naver.com

이상호, 전래놀이 101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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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부, 전통놀이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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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묵,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

(문화원형백과 전통놀이),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상수, 한국의 씨름과 그네의 연구

김광언, 민속놀이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 연구

심우성, 우리나라 민속놀이

김종만, 아이들 민속놀이 백가지

이상호, 놀이연구회, 가슴 펴고 어깨 걸고

문화재연구회, 중요무형문화재 2-연극과 놀이

리재선, 우리나라의 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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