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3차 침략까지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몽골의 침략과 원의 간섭에 대해 몰랐습니다.
처음에 저희들은 몽골의 침략과 원의 간섭 부분에 관심이 있어서 이 주제를 선택하였는데
이 주제를 알아볼수록 대부분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주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가 생각해 본 결과 일단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은, 한국사는 반복되므로 그 일을 잘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사를 시험으로만 공부하지 말고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고 그 일이 발생하였을 때 대처방법을 생각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한국사에 관한 교내대회를 개최하여 생활기록부도 채우고 우리 역사도 바로 알 수 있어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때문에 시험 성적은 당연히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사를 바로 잡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생각하고 노력하여 우리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론
몽골의 침입
고려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거란족을 물리치고, 몽골과 수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고려를 방문한 몽골 자신이 귀국길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몽골은 이를 수실로 고려를 7번 침략하였습니다.
1차 침입
몽골이 1차로 침략한 사건이며 몽골의 1차 침략 당시 박서가 귀주성에서 몽골군에 격렬히 저항하여 이를 물리쳤습니다. 몽골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던 칭기즈칸이 사망했고 후계자로 지명된 오고타이가 황위를 계승함으로써 몽골의 정복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몽골군의 최초 침입 기사는 고려사 <세가> 1231년의 8월 29일에 “몽골원수 사르타크가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를 도륙했다”는 것인데 실제 이들의 내침 시기는 8월 중순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사르타크의 지휘로 고려에 침략한 몽골군은 수년 전 몽사 제구우의 피살을 입경의 명분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서북면 지역, 압록강 하구의 관문인 함신진을 통해 들어왔는데, 이후 몽골의 침략군들은 거의 압록강을 건너 서북 지방에 이르는 동일 경로로 고려에 침입하게 됩니다.
당시 몽골군은 선봉의 1개 부대가 최단 노선을 택해 급거 남하하는 한편 사르타크의 주력 1개 부대는 서해안 연접의 노선을 따라, 다른 또 하나의 부대는 귀주와 자주를 거치는 내륙의 노선을 택해 서서히 남하하면서 군사지역인 북계의 여러 지역을 철저히 공략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때 몽골군은 일부 부대를 북계에 계속적으로 잔류시켜 변경의 제성 공략에 투입하는 한편으로 다른 병력을 빠른 속도로 남진시켜 서울로 직충케 하는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2차 침입
여몽간의 화의 타결로 국면은 수습 단계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곧 고려정부 내에서는 천도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습니다. 1232년 2월 20일 전목사의 재추회의에서 이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 이래 회의를 거쳐 같은 해 6월 16일 전격적으로 강화 천도가 결정되었으며 17일부터 천도작업이 추진되었습니다.
경상도 일대에서 횡행하던 선발대에 뒤이어 적장 사르타크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남하한 시기는 1232년 10월경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진 도상의 사르타크군이 11월 광주에서 고려군과 접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공취한 후 광주성을 포위, 공격했다가 부사 이세화가 지휘하는 광주민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게 됩니다.
3차 침입
제1년, 제2년, 제3년으로 구성됩니다. 1234년 금을 완전히 공략한 몽골은 같은 해 가을, 향후의 정벌계획을 새로 수집하고 이듬해 사전 계획에 의한 정복 작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1235년 탕고에 의한 제3차 침략이 그것입니다.
몽골 사령관 탕고는 1차 침략 당시 사르타크의 휘하로 고려 침략전쟁에 참여해 개경을 포의하였던 3원수 중 한 사람입니다.
4차침입
몽골의 침략이 장기화되는 징조였습니다.1247년 몽골의 4차 침략이 전개되었습니다.
고려사 <세가>에 “7월에 몽골원수 아모간이 군대를 이끌고 염주에 내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원고려기사>는 “아모간과 홍복원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토케 하여 위주와 평로성을 공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모간의 몽골군은 종래와 같이 부몽분자 홍복원을 대동, 먼저 청천강 상류의 위주, 평로성 등 북계 여러 성을 공략하고 남진하여 7월에는 개경 및 강화 연안인 염주에 까지 육박, 주둔함으로써 강도 정부를 위협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위주, 평로성을 거쳐 남진한 것은 서경을 피하려고 내륙의 길을 선택해 수안현을 거쳐 내려온 것입니다. 몽골 4차 침략군의 진로는 종래 서경을 경유하는 서북대로에 주력을 투입, 남하케 하였던 것과는 다른 양상입니다. 그 주요한 이유는 대몽 전쟁의 소강기를 이용, 고려가 이들 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5차침입
1251년 7월에 개최된 코릴타에서 바토의 지지를 받은 톨로이의 아들 멍케가 황제에 선임되었습니다. 몽골의 헌종 멍케는 즉위 즉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 고종의 친조와 개경에의 환도를 촉구했습니다.
예구에 의한 몽골의 제5차 고려 침입이 개시된 것은 1253년 7월의 일입니다. 예구가 4차 침략을 지휘했던 아모간과 홍복원을 5차 침략에 대동한 걸 보면, 5차 침략군의 주력은 4차 침략을 담당했던 아모간과 홍복원 휘하 병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 몽골군의 1대는 7월 15일 대동강 하마탄을 건너 동북변경의 고화주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강도정부는 몽골군의 내침에 대비해 갑곶강에서 수전을 연습함으로써 강도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6차침입
고종41~42 은 차라다이로 지휘권을 바꾼 몽골군은 재침을 단행해, 1254년부터 6년간 전쟁이 지속됩니다. 몽골의 차라다이는 휘하의 예수투, 보라다이 등의 여러 장군과 함께 영녕공준, 홍복원 등을 대동하고 1254년 7월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이들 몽골군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몽골은 예의 방식대로 본군에 앞서 척후를 멀리 내려 보냈으며 이들 척후기는 7월 24일에 서해도, 8월 6일에 광주 그리고 8월 20일에는 충북괴산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차라다이의 본군은 대체로 이들 척후기가 앞서간 노선을 따라 남하해 8월 22일경에 개경 부근 장단 남쪽의 보현원에 당도했습니다. 이들 몽골군 주력이 충주에 이른 것은 9월 중순이었습니다.
개경에서 양평군, 여주군, 이천군, 안성군의 경기지역을 돌아 음성군을 거쳐 충주에 이른 것입니다.
차라다이는 9월 중순 본군을 이끌고 요충 충주산성을 공격했지만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략을 포기한 채 경상도 지경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10월 19일 상주산성에서 황령사 승홍지의 공격에 대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몽골군은 다시 대구지방을 거쳐 남진을 계속 12월 초 단계현과 진주에까지 내려갔습니다. 몽골군이 경상도 내륙의 길을 따라 남진, 경상도 남단 지역까지 이른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고려는 차라다이의 침략에 대항해 충주, 상주 등 각처에서 용전했지만 전쟁의 피해는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몽골군이 경상도에 진입한 1254년 10월 재신들이 대묘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백성은 세가 궁하여 사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며 생자는 노예가 되어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한다 고 하고 있고, 같은 해 말 세가 의 기록은 고종41년 한 해 동안 몽병에게 포로된 자가 20만6,800여에 살육된 자는 셀 수가 없고 몽병이 지나는 곳마다 잿더미가 되는 최대의 전화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경상도 남단에 깊숙이 침입한 몽골군은 고려의 피해를 가중시켰고 격화되는 전쟁의 참화는 이후 강도정부 내부로부터 대몽 화의론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압력으로 작용하게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7차침입
강화도 투쟁이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하였습니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골이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 최우가 조직한 야벌초라는 정예군이 그 기원이었습니다.이후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다니며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1273년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원의 간섭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는 원 간섭기에 들어갔습니다. 원 간섭기는 오랜 전쟁 끝에 1259년 고려가 원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강화가 성립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강화 이후 원의 간섭이 강력하게 미쳐 왔지만, 원은 고려 왕조와 왕실을 존속시키고 고려 국왕을 통해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1278년에 원의 군대와 다루가치가 고려에서 철수한 뒤로는 원의 관리나 군대가 상주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려의 국가체제가 유지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매우드문 경우였습니다. 이전까지 고려가 송, 거란, 금 등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는 책봉이 고려에서 이미 이루어진 왕위 계승을 중국 왕조가 추인하는 절차에 불과했지만, 원 간섭기에는 원이 책봉권을 이용하여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고 더 나아가 국왕을 퇴위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위가 불안해진 고려 국왕들은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려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그 때문에 국왕 측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측근들이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무리하게 강화하는 과정에서 각종 불법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정치 질서가 문란해지고 일반 서민들의 생활도 크게 위협받았습니다
또한 1280년부터는 고려 국왕이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의 승상을 겸함으로써 원 간섭기의 고려 국왕은 부마, 국왕, 승상으로서 존재하였습니다. 국왕이 중국 왕조의 부마가 되거나 승상 등 다른 관직을겸한 것은 한국 역사상 이 시기만의 특징이었습니다.원 간섭기에는 국왕이 직접 원에 가서 친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충선왕 같은경우는 재위 기간의대부분을 원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신의 왕래도 매우 빈번하였습니다.
또는 고려를 원의 행성에 준하여 상대하려는 취지로 설치된 형식적, 명목적 기관이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한편, 원 간섭기에는 고려와 원 사이에 관리와 학자, 승려, 상인 등의 왕래가 빈번했고, 이들을 통해무역뿐 아니라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몽골족의 변발과 호복이 고려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일찍이 남송에서 발달한 성리학과 강남농법이 이 시기에 고려로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서 세계 각지의 문화가 융합되었으므로고려는 원을 통해 티베트 불교나 이슬람 과학 등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화들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참고자료: 국회도서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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