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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입시(인문계열 자료실)

곽한소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by kjk쌤 2024.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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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82215일 경기도 지평군 북면 진대곡 에서 곽정현과 전의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윤도, 호는 경과 경직재이다. 집안은 본래 경기도 지평군 일대에서 명망이 있는 향반 이었다.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활동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여파로 지평군을 떠나 선대가 살던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의 온천리 와 연기군 고정 지역을 거쳐 연기군 태천에 정착하였다. 이후 16세 때 부안 임씨와 혼인한 후 부친이 초빙한 훈장 이연덕 에게 한학을 배웠다.

20세 되던 해인 1901년에 면암 최익현의 제자가 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의 선두에 선 대학자로서 충남 청양군 정산면으로 이거한 후 항일 의병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최익현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0511월 을사늑약이 이뤄졌다.

최익현은 19061월에 노성에서 항일 거사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궐리사 강회를 열어 본격적인 항일 의병 투쟁에 나섰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19051125일부터 궐리사 강회를 준비하는 한편, 강회에 참여한 후 항일 거사를 결의하였다. 먼저 계획에 따라 최익현의 포고팔도사민을 복사한 후 인근에 널리 전파하고, 각지의 유력한 인사를 방문하여 거사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9061월 예산에서 항일 지도자인 이남규를 만나 최익현의 거사 계획을 알렸고, 홍주 의병의 주도자인 족형 곽한일을 만나 거의를 논의하였다. 111일에는 수의를 주장한 전우를 만나려고 공주 신전에 방문하였으나 외출 중이었다.

서신으로 항일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호응은 없었다. 이 외에도 충남의 여러 유력 인사에게 궐리사 강회 참석을 통보하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홍주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청주 지역의 유력 인사들을 방문하는 한편, 태천의 본가로 돌아가 집안을 돌보았다. 430일 거의에 동참하려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와 521일 최익현의 태인의병에 합류하고자 최익현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615일 순창의 경내로 들어갔으나 태인의병의 패산과 스승의 체포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곽한일과 홍주의병의 재기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1117일 이남규곽한일 등이 체포되면서 그 희망마저 꺾이고 말았다. 최익현이 유배지인 일본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숨을 거두고 그 유해가 190714일 돌아왔을 때 장례를 관장하였다.

1908년 제작된 문집 간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끝까지 스승을 모셨다. 스승 최익현의 항일 투쟁에 대한 기록인 문변록을 자신의 문집인 경암문집에 남겨 그 의기를 끝까지 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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