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학은이고, 이명은 공진원이다. 의병 출신인 부친 공창준을 따라 만주에 건너갔다. 공창준은 일찍이 홍범도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이후 만주에서 이청천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활동
하얼빈에서 중국 중학을 졸업한 후 부친의 훈도로 북만주에서 청년운동과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수용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석권하게 되자 이청천을 따라 중국 관내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난징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5년 난징에서 이청천・황학수・조경한 등과 함께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창설된 민족혁명당에서 이청천 휘하의 군사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뤄양군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그 후 이청천이 김원봉 계열의 독점에 맞서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36년 난징에서 부친 공창준이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1940년 5월 쓰촨성 치장에서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한국광복군 창설 후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되면서 제2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2월 임시정부 군무부에 의해 제2징모분처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쑤이위안성 으로 전진하여 바오터우를 근거지로 삼아 초모 공작에 나섰다.
941년경 중국군 제12전구 사령관 푸쭤이에게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중국군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쑤이위안성 일대는 물론 일본 점령하에 있는 화북 지역에서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제2구대장 이달수와 유해준 등 간부들과 함께 한국 교민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던 장자커우로 잠입하여 교포를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포섭된 인물이 자수하는 바람에 유해준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는 등 거점과 조직망이 파괴되었다. 그해 겨울 대원을 인솔하고 시안으로 복귀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와 함께 충칭으로 이동하였고, 임시의정원에서 박건웅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의 폐기를 제안하는 등 의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충칭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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