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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상여와 상여소리 연구

kjk쌤 2024. 10. 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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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상여와 상여소리 연구
 



목차

.서론
1. 조사동기 및 목적
2. 조사 방법


.지역별 상여 특징 및 상여소fl

1. 상여 보관상태
2. 지역별 상여소리
3. 신분에 따른 상여 구조


. 상여와 상여소리 보존을 위한 방안
1. 정부 및 지자체의 관리 감독


. 결론

 
.서론
1. 조사 동기 및 목적
상여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 전국에 있는 상여를 학생들과 1학년 때부터 조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생 들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였고 한계가 있었다. 상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민속학과 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여와 더불어 상여소리는 국문학의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방학 위주로 조사하고 정리해 보려고 한다.
 
상여는 건축, 공예, 회화, 조각 등이 어우러진 풍부한 예술성을 지닌 종합예술로 이름 없는 장인의 미의식과 기술이 집약된, 역사 속에 숨겨진 장인에 대한 기록이다.
근대화로 인해 오늘날 자취를 감춘 상여는 이승과 저승의 상반된 세계를 오가는 인간의 교통편으로 근대화로 인해 오늘날 자취를 감춘 상여는 19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정의 동반자인 상여는 소박하면서도 화려하다.
 
상여는 한국문화의 전통과 원형을 대표하며, 슬픔과 엄숙을 넘어 축제의 순간으로 여긴 장례문화를 통해 조상들의 철학과 인생관을 전달하였다. 특히 상여소리에서는 한국 고유의 해학과 여유를 찾아볼 수 있다.
상여는 이제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시골에 남아있는 상여는 허름한 창고에서 비와 바람에 의해 부식되고 마모되면서 우리의 혼과 전통 또한 사라지고 있다.
 
우리 삶의 일부로 함께한 상여는 보존되어야 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보존되어야 한다.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유산을 조사해 민속학과 국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 한다.
 
2. 조사 방법
상여는 우리 생활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남아 있는 상여를 이용해 장례를 치를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지역의 흉물로 남아있다. 도서관에서 상여와 관련있는 서적을 찾아보고 각 시도 읍면사무소에 연락해 이장이나 면사무소에 전화로 상여의 위치 및 사용 유무를 조사하였다.
 
제작과 관련한 궁금한 내용은 괴산에 있는 인간문화제 상여제작자를 찾아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혼자 조사하기가 힘들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조사하고 탐방해 모은 자료를 정리하였고 상여소리는 문헌을 통해 정리하였다. 상여의 보관 상태를 사진으로 남겨 잊혀지고, 훼손되고 있는 상태를 기록으로 남겼다.
 
.지역별 상여 특징 및 상여소리
1. 상여 보관상태
마을 사람이 상을 당하면, ‘상부계를 만들어서 일손을 도와가며 마을의 공동행사로 장례를 치렀다. 사위를 어르고 놀리며 노잣돈을 요구하는 내용의 상여소리 가창은 해학과 유머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축제의 장이 된다.
 
장례에 사용되었던 상여에는 악공들이나 춤추는 광대들이 새겨진 꼭두가 장식품으로 올려져 있다. 발인 전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미리 상여를 만들어 두고 상두이 서로 발을 맞추어 보기 위해 상여를 들고 연습도 한다. 상두꾼들은 발을 맞추면서 걸어가는데 넓은 도로나 다리를 건널 때 사위를 상여 채에 올려서 놀리기도 한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에서는 해낼 수 없는 원초적인 풍속이며, 죽음을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지혜로운 민중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는다. 신들은 산 위에 살고 있으며, 사람은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인간의 영혼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수직적인 타계관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죽은 날짜를 기억하고 떠난 이를 기억한다. 각각 다른 방식이지만 생일과 제삿날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구별 없이 찾아든다. 해마다 맞이하는 생일과 달리 장례는 한 사람의 생명이 다 했을 때만 치러진다. 고인의 삶을 기리는 중요한 의식이자, 이승에서 고인을 보내는 예법이다. 장례는 죽은 이에 대한 예의이며, 삶과 죽음을 다르게 보지 않았던 민족의 심성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 특히 효를 중요시 한다. 효는 산자에 대한 예의뿐만 아니라 죽은자에 대한 효로서의 장례의식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많은 예의식을 가지고 있다.
예의식 중에서 장례문화는 빼놓을 수 없는 의식 중 하나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마자막 예의 절차이다. 우리나라의 장례의식은 매장의 풍습으로 인한 절차가 까다롭다. 장례의식에서 죽은 자를 상여에 태우고 매장을 위해 장지로 가서 매장이 끝나면 상여를 해체해 보관한다. 산업사회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상여는 이제 우리들의 삶의 일부에서 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상여는 흉물로 남아 있거나 버려지고 있다.
 
괴산상여
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감을면 오창리 11번지
관리자: 이장님
전화번호: 010~4754~0004 043~833~0000
조사날짜:202245
 
보존상태: 상태가 양호하고 별로 손볼 것도 없다. 보존 가치가 있음 서산에 있는 상여는 상여 틀에다 관을 올리고 꽃상여를 위에 올려서 사용한다. 하지만 괴산상여는 지붕까지 만들어져 있어서 관을 집어넣고 묘지까지 간다. 괴산에 자신은 이름을 알리기 싫어하시는 인간 문화로 계시는 분의 말씀이 상여를 새로 재작하여 보존 할려고 하는데 그것 보다는 전국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여를 조사하여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그냥 보존하고 상태가 나쁜 것들은 여러 상여를 조합하여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다.
 

 
남은들 상여
주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묘 아래 있음)
중요민속자료 제31(1974315)
 
복제품 담당: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무소
전화번호: 041~339~8988
 
진품 담당: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담당자 박 경지
전화번호: 20~3701~7682
조사날짜:2022년 58
 
남연군묘 바로 아래 있는 상여 각 에는 복제품이 있고 진품은 박물관에 있다.
중요 민속 문화재 제31호 이며 이 상여를 보존해 오고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상여라 하며 이 상여는 조선 고종의 할아버지이며 흥선 대원군 이 하응 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소를 경기도 연천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성면 가동으로 옮길 때 쓰여 졌던 것이라고 한다. 상여는 지금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지만 전시는 하지 않고 수장고에 있다고 한다.

서산 상여
주소: 충남 서산시 두치로 356~9
관리자: 이동용 이장
전화번호: 010~9494~0000
조사날짜: 2022년 1229
 
관리상태
아직까지는 생태가 양호 하지만 지붕 한 쪽이 망가져 물이 들어옴 하루빨리 지붕 공사만 한다면 보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상여 집 보기가 흉하다고 철거를 원하고 있지만 이동용 이장님의 설득으로 보존되고는 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다행인 것은 꼭 필요한 곳이 있다면 주겠다고 함

 

청계사 ( )
 
주소: 경기도 의왕시 청계로 392
연이 있는 곳 : 법당 뒤
전화번호: 031~426~2348
조사날짜: 2023년 321
불교의식에 쓰이는 가마의 하나이며 영혼을 모시는 가마라는 뜻이다. 혼백과 신주를 상징하는 위패를 모신다.

 
청풍부원군상여
주소: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국립춘천박물관에서 보관 전시중
중요민속자료 제120
전화번호: 033~260~1500
조사날짜: 202388
 
김우명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둘째 아들로 본관이 청풍이며 1619(광해군11)에 태어나 1642년에 진사가 되고 현종의 국구(임금의장인)로서 청풍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후기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하사하여 사용했던 상여이다.

 
가평 현리 상여
주소: 경기도 가평군 하면 연인산로 100번지 53~8
관리자는 따로 없고 도움을 주신 분 : 김 00
전화번호: 031~585~0000
조사날짜: 2024126
 
10년 이상 사용을 하지 않아 보관 상태가 허술하고 건물도 관리를 하지 않아 출입문도 떨어져 있고 지붕도 구멍이 많이 나있다. 그나마 나무숲 사이에 있어서 비나 눈으로 부터 조금은 보호를 받은 것 같고 여러 개의 상여를 조합하여 다시금 만든다면 70% 정도 재생 할 수 있다.
 

 
 
꽃상여 만드는 곳
 
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496번길 88(이목동)
계명고등학교 입구 가기 전 100m 우측 검은색 비닐하우스
 
만드는 장인: 박성렬
조사날짜: 2024110
 
요즘은 상여를 사용하는 시골에서 무거운 상여를 운구할 사람들이 없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만 살다보니 상여 틀은 가벼운 알류미늄 소재로 만들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고 꽃상여를 덮고 묘지까지 운구 후 꽃상여는 불태우고 상여 틀도 보관하기가 편리하여 꽃상여를 많이 사용하고 주로 충청권으로 많이 나간다고 한다.

 
 
2. 지역별 상여소리
죽음의 순간에 가지는 감정은 매우 엄숙하고 순수하고 진지하다. 오랜 전통과 더불어 옛날부터 이러한 죽음의 길에 오르는 망자를 위해 가창되는 민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상여 소리이다.
상여와 상여소리는 각 마을마다 필수적으로 간직해 장례를 잘 치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전통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전통문화인 상여나 상여소리는 관심과 활용성이 없어지고 있는 것 이 현실이다.
 
 
경북 영천 상여소리는 인생의 과정에서 죽음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시간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 소외감과 단절감 등 인간이 느끼는 가장 절실한 심정이 담겨져 있다.
어렸을 때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떠날 때 노자돈을 주었던 상여 문화가 기억된다. 마을에서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보통 꽃상여에 어르신을 모시고 무덤까지 이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상여는 절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지 우회하는 법은 없었고, 원래 다니던 길에 문제가 생겨 그 길을 건너기 어려울 때도 거침없이 그 길로 상여는 지나간다
.
예전에는 부모 형제 또는 일가친척 등 사람이 죽게 되면 상여와 요령소리와 구슬픈 상여소리로 저승으로 떠나는 영혼을 보내 주었다. 아직도 산골이나 농촌에는 가끔씩 상여소리가 울려 퍼진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상여를 보관해 놓고 초상이 났을 때 빌려주는 상여집이 마을마다 있고 상여소리 잘하는 선소리꾼도 마을마다 한 두 명씩 있었다. 하지만 영천지역의 상여소리는 지역별로 보존되지 않아 아쉽지만 간혹 볼 수가 있다.
 
다음은 201310월 영천 장례에서 불린 사여소리 일부이다. 꼬꼬 닭아 잘 있거라 멍멍개야 나는 간다
후렴 어-홍 어-홍 어와홍차 어-(상두꾼 합창)
친구 벗님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동행 할까
-홍 어-홍 어와홍차 어-
일가친척 많다한들 어느 일가가 대신 갈까
-홍 어-홍 어와홍차 어-(이하 생략)

이런 애절한 가사가 약 10분간 계속된다. 앞소리꾼은 중간 중간 가사를 바꿔가면서 상주들을 불러내 노잣돈을 마련하고 노잣돈의 크고 적음에 상두꾼들이 움직이므로 상주들은 미리 노잣돈을 두둑이 준비해 두고 있다. 앞소리꾼의 애절한 소리는 상주들로 하여금 슬픔을 자아내고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깊이 밀려들게 만들곤 했다.
 
다음은 충청도의 상여소리 일부이다.
꽃이피어서 화산되고 잎을피어서 청산되며
벌나비도 찾아와서 반겨워라 상봉터널
우리인생들 한번가면 어느 친구가 나를 찾나
낙영산 심리하에 높고낮은 저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가이는 그누군가
아차 우리도 한번가면 저와 저무덤 같으릴세세
상일생이 살어온길을 불철주야로 생각허면
눈물은 흘러서 한강이되고 한숨은 쉬어서
동남풍인데 (생략)
 
상여소리는 대부분이 그리움과 슬프고 애절하다. 관을 운구하면서 부르는 노래와 회다지기 하면서 부르는 노래 상여를 매고 운구 하면서 부르는 노래 등이 있다.
공주봉현리상여소리는 1997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공주봉현리상여소리는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 지역에서 내려오는 상여소리, 특히 공주 봉현리의 상여소리는 <달공소리>라고도 불린다(<달공소리><봉현리상여소리>의 일부이다
 
공주 상여소리는 상여소리, 축문소리, 성분가래질소리, 달공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상여소리는 메김소리와 후렴을 함께하는 짝소리, 충청도사투리의 처량하고 긴 진소리 등 8가지이며 민요조의 서정 넘치는 가사가 주를 이룬다. 성분가래질소리는 묘의 흙을 모으는 가래질을 하며 내는 소리로 진소리와 빠른 상여소리인 잦은소리가 있다. 달공소리는 기부르는 소리, 진달공, 잦은달공, 안장소리 등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공주 봉현리 상여소리는 200여 년 전부터 변함없이 전승되어 온 소리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화재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의 상여소리는 다음과 같다.
어허 허호 오호넘차 오호 / - 어허 허호 오호넘차 오호 / 어제 오늘 성튼 몸이 우는소리가 웬 말인가 / 초록겉은 우리 인생 아차하는 이 순간에 / 이 세상을 하직허고 북망산이 웬 말인가 / 가구 가도 한이 읎는 한정 없는 그 길일세 / 옛 노인의 말 들으니 장생불사는 없답디다 / 초록겉은 우리 인생 장생불사를 어찌 허리 / 이 세상에 오실 적에 빈손 들구서 오셔서 / 알뜰살뜰 모은 재물 먹구 가나 쓰구 가나 / 담배 주려 모은 재물 어디다가 버리구 가나 / 이왕지사 가는 길에 선심이나 허구갈까 / 배고픈사람 밥을 주고 아사구제 허구가리 / 어두운사람 웃어 주고 공덕 허구가리 / 목마른사람 물을 주고 음수공덕 허구가리 / 깊은물에 다리를 놓아 월천공덕 허구가리 / 높은산에 절간 지어 염불공덕 허구가리 / 인제 가시면 원제 오시나 오시는 날이나 알려주오
이처럼 상여소리는 출상전날 다시래기, 밤달애, 빈사여놀이 등에서 상여놀이에 나오기도 한다. 상여놀이는 마을 주민이나 계꾼들이 빈상여를 들고 앞소리에 맞추어 뒷소리를 따라 부른다. 이 때 역신을 쫓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방장쇠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양손과 머리를 움직이게 하여 상두꾼이 조정을 하여 춤을 추게 한다. 옛날에는 장두칼을 들고 춤을 추며 액귀를 쫓는 방장쇠를 사람이 하였으나 방장쇠를 하면 일년 안에 죽는다고 하여 그 가족이 평생먹을 주어야 했으므로 점차로 액귀를 쫓는 의미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최근의 유림장에서도 인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상여놀이에서의 상여소리는 초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으로 나누어 부르며, 앞소리꾼이 소리를 하면 계원들이 따라 소리를 하면서 진행된다. 이 때 사위나 친지를 상여 위에 올려 술값을 내게 하기도 하고,요사이 앞소리꾼이나 소리꾼이 없을 경우는 계원들만의 소리로 하기도한다.
 
3. 신분에 따른 상여 구조
상례 때 쓰이는 운반기구는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와 혼백을 운반하는 영여로 나누어진다. 이 둘을 통칭하여 상여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앞의 것만을 이른다.
상여라는 말은 우리 나라의 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며, 중국의 문헌에서는 대여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온량 온량거 영거라고도 하였다. 온량이라는 말은 원래 평안하게 누어 쉬는 수레를 뜻하였으나, 나중에 관을 싣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가에서는 대여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이나 말기에 간행된 순종국장록 에는 모두 국장에 사용하는 운반기구로 대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왕가에서 사용하는 대여는 사례편람에 나타나 있는 대여와는 그 생김새가 다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은, 또한 사례편람이 왕가의 의례가 아닌 사대부나 서인의 의례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데서도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대체로 대여는 왕가에서, 상여는 그밖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것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사례편람에 나타나 있는 대여는 우리 나라 왕가에서 사용하는 것과도 구분되는 것으로, 가례의 본문을 중요시하여, 그 글자 한 자도 빼놓지 않고 편찬하려는 우리 나라 성리학자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가례 에 나타나 있는 꾸밈새대로 대여를 꾸며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히려 그것을 간략하게 만든 상여 즉, 소여를 많이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대여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유거라는 것이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가례에 따르면 옛날의 유거를 만드는 제도가 아주 자세히 남아 있으나, 지금은 쉽게 그와 같이 만들 수 없으니, 단지 요즈음의 풍속을 따라 유거의 단단하고 평온한 점을 살린 대여를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로서 유거가 있었으나, 12세기 중엽에는 보다 더 간단한 모양의 대여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짤막하게 살펴본 내용을 통해서 상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 유거에서 대여로 대여에서 상여 또는 소여의 형태로 점차 간략화된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점점 간략화된 배경에는 경제적 조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인 문제가 없었던 계층에서는 예서에 나타나 있는 꾸밈새나 옛날부터 정해져 내려오는 격식대로 대여를 꾸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계층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식의 대여를 제작하여 사용하기에는 그 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상여 즉, 소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가에서 사용하였을 때는, 그 격식은 가례에 나와 있는 대여와 같으나, 그 구성이 복잡하게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겉치장이 더 화려한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상여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반영구적 상여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한번만 쓰고 태워버리는, 보통 일컫는 꽃상여가 그것이다.
꽃상여는 장강채 위에 대나무로 짠 틀을 세우고 그 곁에 흰종이 꽃을 달아 치장한 것으로, 그 위에는 앙장을 달았다. 보통 중소도시의 장의사에서 만들어 공급하고 있으며,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거나, 경제력이 부족한 집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용한 뒤 장강채는 그대로 두고 관을 덮었던 덮개 부분만 태운다.
반면에 반영구적인 상여는 모두 목재를 사용하고, 단청을 하여 호화롭게 꾸민 것으로,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 기본틀로서 양 끝에 두 개의 횡강이 고정되어 있는 장강이 있고, 중앙에는 소방상 대신에 관을 올려놓을 수 있는 횡목이 끼어 있다.
 
그리고 아래위 두 칸으로 나누어지는 격간로 만들어진 네 개의 난간이 둘려지며, 장강에 꽂아 배방목으로 지탱되는 네 개의 기둥 위에 판첨(일반적으로 윗난간이라 불리고 있다.)병아리 못 으로 고정시키고, 주위는 띠와 수실 드림으로 치장한 휘장으로 두른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유소를 매단 봉수를 꽂고 유소에 사롱을 단다. 그 위에 보개로 불리는 별갑을 씌운다. 별갑의 네 모서리마다 십자룡의 나뭇조각으로 치장하며, 맨 위에 연봉을 붙인다.
 
이러한 구조는 전체로 보아 왕가에서 쓰는 대여와 일반에서 쓰였을 소여의 형식을 절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여는 각 마을마다 추렴에 의한 기금으로 주문받아, 장의사에서 제작하여 판매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상여를 상엿집또는 곳집이라고 부르는 작은 집에 보관하고 있다.
상여는 옛날에는 천민들이 메도록 되어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메게 되었다.
상여는 신분에 따라서 크기와 모양에 차이가 있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중요민속자료 제31호남은들 상여는 웅장함과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상여이다. 춘천에 있는 청풍부원군 상여는(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국립춘천박물관에서 보관) 고인을 위하여 별도로 만든 상여로 신분에 따라 상여가 웅장하고 화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는 다층구조의 대형 상여에서 에서도 조선시대 장례문화를 볼 수 있다.
 
. 상여와 상여소리 보존을 위한 방안
1. 정부 및 지자체의 관리 감독
시골에서 상엿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남아있는 상여는 상엿집을 관리하지 않아서 비가 새고 단청이 벗겨진 상태다. 사용하지 않아서 버려진 상태로 있는 상여를 관리하는 관공서도 없다. 오직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다.
1920년부터 3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서울에서 상여제작자 3명을 데려와 만든 강진김해김씨가 상여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이구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로 1840년과 1852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남은들 상여는 부유층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장례 문화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유명한 상여는 박물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보관하고 관리하지만 서민들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일반 상여는 버려지고 있다.
 
상여는 일반 서민이 만든 가장 화려한 가마이다. 전통 사회는 신분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이 입는 의복이나 사람이 타는 가마 등에까지도 모두 신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전통 장례문화의 상징인 상엿집을 2010년에 경산의 상엿집과 관련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예고 했다. 조선 500년 역사의 유교실천덕목인 관혼상제 중에서 효의 적극적 표현형식이 상례이다. 이 상례의 상징인 상엿집이 급속한 경제개발 생활문화의 변화와 더불어 혐오시설이라는 무관심속에 소멸 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상엿집에는 장례에 사용하던 각종 제구와 문서, 마을 공동체의 문서들이 함께 발견되어 상여문화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며 민속학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앞으로 문화재청은 지역에 남아 있는 상여가 보관되어 있는 상엿집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효율적인 보존을 위해서는 소유자나,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협조체제를 이루어야 한다.
 
상여소리 기록보존을 위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편성해 발굴하고 보존해야 한다. 민속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과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상여와 상여소리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상여와 상여소리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민속예술축제와 같은 행사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상여의 구조와 상여소리를 수집하고 보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상여를 사용하는 시대를 지나 운구차를 이용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곳집은 낡고 헐어 보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상여는 마을에 흉물로 전락해 태워 없어지거나 방치된 상태이다. 장례문화의 변천에 따라 잊혀지고 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할 문화재청의 관심과 연구가 절실하다.
 
. 결론(느낀점)
우리나라는 죽음에 관한 전통이 많다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아직도 집안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많고 명절에는 성묘도 하며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풍습인 상여가 잘 보존되어있지 않음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나는 그럼에도 계속 사회의 패턴이 바뀌고 우리나라처럼 빠른 것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 상여의 사리짐은 어쩔 수 없다고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상여에 대해 계속 조사하다보니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상여는 보존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또래 중 상여를 본 수도 적었겠지만 보더라도 완전히 조립된 꽃상여를 본 경험이 다 일 것이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상여는 여러 가지 나무들을 조립한 몸체에 꽃이나 방울 같은 여러 장신구들을 더하여 만들어 완전체를 이루는데 장신구의 모양들은 다 제각각 이였고 그 양 또한 매우 많았다, 뿐만 아니라 상여가 쓰였을 당시에 신분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참고자료
http://www.cha.go.kr
문화재청, 보도자료
http://www.naver.com
http://www.daum.net
김충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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