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입시(수학 세특)

교과서 속의 수학사 분석

kjk쌤 2024. 9. 1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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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의 수학사 분석

                                                                            

 I. 조사 동기 및 방법

수학을 계산하고 공식을 암기하면서 흥미를 잃을 때도 있었고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생글생글 신문에서 수학사에 관한 글을 읽고 수학이 우리의 실생활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의 학문에서 위대한 수학자는 논리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입시가 목표이기 때문에 암기한 공식에 수치를 대입하고 답안을 도출하는 과정에 익숙하기 때문에 수학에서 기쁨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신문에서 수학적 사고만으로도 실생활에 무수히 적용 가능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학습자 스스로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 있고 학습의 효과도 커질 것이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수학사에 대하여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조사방법은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를 중심으로 하고 부족한 것은 인터넷을 검색하였습니다.

 

. 교과서 수학사 내용 분석

수와 연산에 수록된 수학사 내용

수학사 속에 중요한 관심사였던 문제로 러셀의 파라독스 문제가 있다.

[평가과제]

수하의 시작은 집합과 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므로 논리의 기초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논리적 역설 즉, 파라독스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그냥 스치면 우스운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논리적 사고, 더 나아가 수학적 사고의 단서가 숨어 있기 마련이므로 여러 가지 역설적인 상황을 분석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1. 고전적인 러셀의 파라독스인 모든 집합들의 지합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하여 왜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지를 설명하라.

. 만일 모든 집합의 집합U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집합 U도 역시 집합이므로 U까지도 원소로 새로운 U보다도 더 큰 집합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집합의 집합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무한의 개념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또 다른 수학적인 엄밀한 증명을 필요로 한다.

 

수와 연산에 수록된 수학사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밴 다이어 그램, 드 모르간 수수께끼와 러셀의 역설, 무리수의 발견, 무리수와 스캔들, 가우스와 복소수, 드 모르간의 법칙,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성에 있다(칸토어), 신비로운 숫자, 허수의 기원 등에는 수학사적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우스는 독일의 수학자이며, 관측자. 대수학과 해석학 그리고 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으로 부터 독립된 순수 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천체역학·중력론·측지학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10세 때 등차 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 고교를 거쳐 괴팅겐 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이나 최소 제곱법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 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가우스는 헬름슈테트 대학으로 옮겨 22세 때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다시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페르디난드공()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1801년에 간행된 정수론연구는 2차의 상호법칙의 증명을 풀이하였으며, 합동식의 대수적 기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올렸고, 학위 논문에서 이룩한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과 더불어 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에서의 지위를 가져다 준 것은 오히려 천체역학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학계에서 뉴턴역학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 1801년 소행성 케레스가 발견되자,이 별의 궤도결정이 문제로 대두되어, 가우스가 이를 계산해 내어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807년에 괴팅겐 대학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00년 이후 가우스의 연구는 대략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소행성의 궤도결정을 시작으로 천체역학을 연구하던 1820년까지의 시기이고, 이 시기의 연구는 천체 운동론1809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수학 분야에서는 초 기하급수의 연구 및 복소 변수의 함수론의 전개가 있다
2기는 측지학에 관계한 시기로서, 18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은 일이 계기가 되어 곡면론의 검토, , 곡률의 문제, 등각 사상의 이론, 그리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미분기하학으로 향하는 최초의 일보였다.

 

한편, 정수론의 영역에서도, 주로 4차의 상호법칙 연구에서 비롯하여 복소 정수의 연구에 이르러 대수적 정수의 이론을 창시하였고, 이것은 아인슈타인, 쿠머, 데데킨트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데이터의 처리와 관련하여 18211823년의 논문에서 최소 제곱법을 이론화하여 통계에서 가우스분포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3기는 1830년부터의 10년간으로서, 주요 관심사는 물리학 쪽으로 옮겨져 갔다. 특히, W. E. 베버와의 협력 아래 추진한 지구자기의 측정 및 이의 이론적 체계화가 두드러진 업적이다. 괴팅겐에 자기관측소를 설립하고, 측정을 위하여 자기기록계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절대단위계를 도입함으로써 전자기학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고, 한편으로는 퍼텐셜론을 전개하여 이것의 수학적 기초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 전신기의 발명과 모세관현상의 연구 등도 이 시기에 이룩한 것이다.


1840년경부터 만년에 이르는 제4기에는, 오늘날의 위상해석학인 위치해석학 및 복소 변수의 함수와 관련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학자이며, 동시에 관측자이기도 했던 그는 '괴팅겐의 거인'으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우선권 다툼이라든지 후진의 업적에 대한 냉담한 태도 등으로 가끔 나쁜 평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완전성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좌우명은 수는 적으나 완숙 하였도다였다.

 

문자와 식에 수록된 수학사 내용

문자와 식에서는 인수분해와 풀리지 않는 문제(가우스), 전자상거래와 소인수분해, 바빌론인들의 이차방정식 풀이, 근의 공식 발견과정,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계산법,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했던 원주율, 파스칼의 삼각형, 이차방정식의 근의공식, 방정식의 역사, 황금분할 문제(밀로의 비너스), 삼차방정식의 일반해법 발견 등이 수학교과서에 수록된 수학사적 내용이다.

 

방정식의 해법은 수학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중학교 시절 1차 방정식과 2차 방정식의 풀이에 관하여 수학 시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배웠다. 그런데 방정식 해법의 역사는 수많은 수학자들의 고뇌, 회한, 노력, 좌절로 점철되어 있다. 2차 방정식의 해법은 4천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3차 방정식의 해법은 16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 볼로냐의 수학자 델 페로가 발견하였다고 전해진다.

 

1535년 이탈리아 브레샤의 말 더듬이 타르탈리아라는 사람도 독립적으로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찾았고, 델 페로의 제자 피오르와 타르탈리아는 공개 문제 풀기 대결을 하였다. 여기서 타르탈리아는 피오르가 낸 3차 방정식 문제 30개를 모두 풀었으나 피오르는 타르탈리아가 낸 문제를 하나도 못 풀었다고 전해진다.


이 소문이 퍼지자 밀라노의 유명한 의사인 카르다노가 타르탈리아를 설득하여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전수받았다. 카르다노는 이 해법을 발표하지 않기로 타르탈리아와 약속을 했었으나 그 약속을 깨고 해법을 발표하였다. 타르탈리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이 해법은 카르다노의 풀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르다노의 제자였던 페라리는 곧 이어서 4차 방정식의 해법도 찾아내었다.


타르탈리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브레샤를 침입한 프랑스 군의 칼에 맞아 머리 다섯 군데에 부상을 입어 겨우 회복하였으나 혀가 짧아져 말더듬이가 되었다. 타르탈리아는 카르다노의 제자 페라리와 논쟁을 벌이며 공개 경시대회를 갖는 등 명예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가난 속에 외롭게 죽었다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카르다노는 의사라는 직업 외에도 여러 가지 분야에 아마추어로서 흥미가 있었는데 수학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사회적 혼란과 주변 인물의 음모는 그의 삶을 타르탈리아의 삶 못지 않게 힘들게 하였다. 삼촌은 독살되었고 그와 그의 아버지 역시 독살될 뻔 하였다.


장남은 자기 아내를 독살하였다는 죄목으로 참수당하였는데 카르다노는 평생 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페라리를 여동생이 독살하였다. 카르다노 자신은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투옥까지 되었으나 몇 달 후 자기 주장을 철회하여 간신이 풀려났다.


3, 4차 방정식이 풀린 뒤 사람들은 5차 방정식을 풀기 위해 300년동안 수없이 노력하였다. 그러나 5차 방정식은 +,,×,÷만 쓰는 대수적 방법으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을 182321살의 노르웨이 수학자 아벨이 증명하였다. 5차 이상의 일반적인 방정식도 대수적 방법으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은 1830년 프랑스 수학자 갈로아가 19살에 증명하였다. 아벨과 갈로아 역시 타르탈리아와 카르다노 못지 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벨은 1802년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1829년 오슬로에서 죽었다. 27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유럽 최고의 수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정부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힘들게 가족 부양을 하다가 결국은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아벨의 아버지는 교회 목사였는데 술을 많이 마시는 나쁜 습관이 있었고, 아벨의 어머니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이며 가수였지만 자식들에게는 매우 무책임하였다.

 

이러한 부모 때문에 아벨과 그 형제 자매들은 기숙학교에 맡겨졌다. 아벨의 수학교사 홀롬뵈는 한 눈에 아벨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당시의 수학교재를 잘 익히게 한 뒤 유명 수학자의 논문을 읽게 하였다. 18살 때 아벨은 5차 방정식을 푼 것으로 알고 논문까지 썼으나 곧 오류를 발견하였다. 

 

도형에 수록된 수학사 내용

해석 기하학, 좌표이야기(데카르트의 좌표 평면 발견), 황금 분할 문제, 도형에 대한 연구(유클리드), 해석 기하학의 탄생에 공헌, 기하학의 발달과정, 미술박품에서의 대칭이동, 평행이동의 응용(미술가 에셔), 직선의 방정식 연대표, 대칭성의 아름다움 등이 도형에 수록된 수학사적 내용이다.

 

도형에서 해석기하학이란 여러 개의 수로 이뤄진 순서쌍(또는 좌표)을 기하학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인 좌표기하학 또는 카테시안 기하학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n개의 수를 사용하여 나타낸 n-순서쌍의 수를 미지수로 하는 방정식의 형태로 도형의 성질을 설명한다.

 

이때 2차원 좌표계 평면에서는 n=2이고, 3차원 좌표계 공간에서는 n=3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자들은 해석기하학에서 방정식을 대수적으로 나타내어 다룸으로써 도형의 위치 및 형태를 결정하거나 분류한다. 해석기하학은 수학에서 2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해석적 다양체의 기하학을 가리킨다. 이 글은 고전적이고 기초적인 의미 위주로 설명한다.

고전 수학에서 해석기하학은 해석학과 대수학의 원칙, 그리고 좌표계를 이용한 기하학이다. 이는 특정한 기하학적 개념을 원초적으로 다루고공리와 정리에 기반한 추론을 이용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종합기하학과 대조된다.

 

일반적으로 직교 좌표계는 2~3차원으로 된 평면, 직선, 직사각형에 대한 방정식을 다루는 데 이용된다. 기하학적으로는 유클리드 평면 (2차원)과 유클리드 공간(3차원)을 연구한다. 교과서에서 나온 바와 같이 해석기하학은 더 단순히 설명할 수 있다: 기하학적 모양을 수많은 방법으로 정의하고 결과로부터 수치 정보를 가져오는 것과 관련할 수 있다. 그러나 수치적인 결과는 벡터나 도형일 수도 있다. 실수의 대수가 기하학의 선형 연속체에 대하여 결과를 양산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칸토어 데데킨트 공리에 달려 있다.

 

해석기하학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좌표를 사용하여 공간에 있는 점들을 알아내는 방법을 설명한 책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그래프를 그려 수학적 함수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오늘날의 카테시안 좌표는 데카르트의 라틴어 이름인 '레나투스 카르테시우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1601~1665)도 독자적으로 좌표기하학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페르마는 자신이 연구한 것을 발표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카테시안 좌표는 데카르트와 페르마, 두 수학자의 연구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규칙성과 함수에 기록된 수학사 내용

일상 생활에서의 함수, 지상으로부터 쏘아올린 인공 위성의 탈출 속도, 동상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 현대적인 함수의 개념 정의,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연구, 함수의 개념 도입과 발달 과정, 기상 예측에도 함수를 사용한다, 유리함수와 무리함수, 삼각법의 활용, 근호의 역사 등이 교과서에 수록된 수학사적 내용이다.

 

기원전 5세기경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천체의 운동에서 주기성을 발견하기 위해 표를 만들었다. 이 표를 보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비례 관계를 이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표가 함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함수 개념을 본격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했는데, 함수라는 말은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가 처음 썼다고 한다. 함수를 영어로 'funct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기능, 작용'을 뜻한다. 한자로는 '函數'라고 쓰는데, 이것은 'function'의 중국어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한자 '()'에는 상자에 물건을 넣는다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값을 상자에 넣었을 때 새로운 값이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현상 중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이 많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두 양이 일정한 관계를 가지면서 변하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생활이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해 규칙성을 찾고, 그 규칙성을 연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처럼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두 양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함수의 개념이 필요했고, 발전해왔다

 

라이프니츠는 "2개의 수 x, y에서 x값이 변함에 따라 y값이 정해질 때 yx의 함수라고 한다."고 정의했다. 이때까지 함수는 곡선의 모양과 관련된 어떤 양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는 함수를 '두 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식'이라고 하면서 f(x)라는 기호도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1939년 부르바키(Nicholas Bourbaki, 1930년대 초 프랑스의 젊은 수학자들이 수학의 통일을 시도하면서 조직한 단체의 이름)가 정의한 "집합 E와 집합 F가 있다고 하자. E 집합에 있는 모든 x에 대하여 유일한 y가 존재한다면 y에서의 관계는 함수 관계라고 한다."라는 함수 개념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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