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진주강씨 소감공파세보 에는 철묘십년 기미유월이일, 1859년 (음)6월 2일생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찬구, 호는 왈우이고, 이명은 영일・강녕이다. 아버지는 강재장이고, 슬하에 중건, 일명・건형 두 아들을 두었다.
가난한 농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읜 탓에 누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수필에는 그가 스무 살 되던 해 부친이 살아계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920년 강우규의 사형이 확정된 직후 장남 중건이 동아일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하였다.
활동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곧바로 장남 중건 부부 등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처음 지린성 허룽현 두도구에 자리를 잡은 뒤,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답사하며 이동휘・박은식・계봉우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찾아와 2개월간 기거하면서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본 뒤 안중근의 의거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후일 의거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정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자, 이를 피해 1915년경 우수리강을 건너 지린성 라오허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라오허현은 북만주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이 무렵 하바롭스크에서 가족과 재회하였다 한다. 라오허현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한 결과, 처음 몇 호에 불과하던 마을이 100여 호에 달하자 신흥동이라 이름 지었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에 협성학교와 조선민회, 만주 라오허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 에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형을 허형에게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에 대해 허형은 항소를 제기하지 않고 옥고를 겪었다. 판결 후 곧바로 항소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사를 도와준 동지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 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3심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고취지서도 직접 작성하였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총독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2006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가 출범하여 남대문역두의 투혼 의사 강우규를 출간하였고, 동상 건립 기금 모금 운동을 비롯해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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