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9대왕
1461년 자산군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으로 개봉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천품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와 서화에도 능해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1469년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가 한명회, 신숙주 등 대신들과 의논해 형 월산군의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그를 왕위에 올렸다.
즉위 할 무렵 그의 나이는 13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그 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했고, 1476년에 비로소 친정을 하였다.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의 고명을 받았고, 세조 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 준을 유배시켰다.
1474년에 덕종을 회간왕 으로 추봉하였다.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지자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였다. 이에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1482년에는 사사했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 어세겸 등에 명해 대전속록 을 완성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 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의 영릉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 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다. 수령과 변장의 임명 때에는 친히 인견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 길재의 후손을 녹용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에서 사불양재해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을 통해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를 충실히 하여 학문 연구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켰다.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2만 4000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 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 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그의 묘호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뇌물도 성행하였다. 더욱이 규방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 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일으키게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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